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47화 (547/917)

#547

1.

승조원도 휴식에 들고, 시우는 객실에서마저 마법 연구를 진행하고, 평소 르뤼에라면 잠들었을 시각.

홀로 극장에 앉은 르뤼에의 앞에 영화가 흘러 지나가고 있었다.

흘러지나가고 있다는 표현이 적합한 이유는 그녀가 영화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잠수함에서 홀로 보내온 십여년.

만성 흥미 결핍증에 걸려있는 르뤼에는 본디 제아무리 망작이라 평가받는 영화도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지금은 그보다 커다란 고민거리가 눈과 귀를 닫고 있을 뿐.

“사랑한다…. 안 한다…. 사랑한다…. 안 한다….”

르뤼에는 신중한 눈빛으로 손에 들린 산호의 곁가지를 하나씩 뚝뚝 꺾었다.

모든 가지를 꺾었을 때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것, 반대로 ‘안 한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

실로 원시적인 점술이었으나 르뤼에는 무서울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며 신중하게 가지를 떼어냈다.

“그럴 리가 없도다…!”

마지막 산호를 손에 쥔 르뤼에의 눈빛이 부들부들 흔들렸다.

무려 3번에 거듭한 산호점.

하지만 모든 결과가 여지없이 ’사랑한다’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짐이 사랑 따위를 한단 말이냐!”

저 멀리 내팽개쳐진 앙상한 산호.

르뤼에는 소파에 쭉 뻗은 채 마구마구 발버둥쳤다.

지금까지 르뤼에는 혼자였다.

아무리 승조원들이 충성을 다짐한다 해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사역마.

정서적인 교류나 교감을 나누기 어렵다.

따라서 신시우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부터 들떴던 것은 사실이다.

시련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줄곧 혼자일 것으로 생각했던 그녀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겼으니까.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상담도 잘 해주고, 외모도 잘생겼다.

성격도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하고 다소 억지스러운 요구에도 잘 어울려준다.

이만큼 좋은 친구가 어디 있단 말인가?

“…….”

그러나 신시우의 뜨거운 고백 이후 슬금슬금 기미를 보였으나 오늘에야 직시한 감정은 분명 ‘친구’에게 향하기에는 너무도 깊은 것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불쑥 찾아온 감정은 르뤼에에게 동요를 일으켰다.

그 감정의 이름은 아마도 사랑.

겨우 두 음절의 단어에 담아내고 표현하기엔 너무도 복잡한 감정.

그 앞에 음절이 하나 더 붙어 ‘첫사랑’이 된다면 그것은 한층 다루기 난해한 난제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이냐…”

물론 대부분의 첫사랑이 그렇듯 르뤼에가 시우에게 느끼는 사랑은 성숙함과 심오함보다는 풋풋함 쪽에 가깝다.

가뜩이나 르뤼에가 만나는 첫 남자가 시우인 만큼 더욱 그랬다.

르뤼에의 혼란스러움 역시 그 풋풋함에서 기인했다.

본디 감정의 섬세함과 깊이는 인지능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남자라면 한 번쯤은 행복한 망상 거리로 삼는 여탕 출입.

개중에는 이미 그 로망을 실현했던 사람도 다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들어간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여탕에서 부끄러움이나 흥미를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성’에 대한 인지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르뤼에의 상황도 위와 흡사하다.

남녀 관계에 대한 인지 없이 그를 대했던 르뤼에에겐 키스, 유사성행위 및 성행위는 딱히 남사스런 행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서적 사춘기의 열병에 앓고 있는 지금은 그와 입을 맞추는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 죽어버릴 것 같아진 것이다.

도대체 그에게 알몸은 어떻게 보여 주었는지조차 의문이다.

심란할대로 심란해진 르뤼에는 결국 마시던 술병만 들고 극장을 나섰다.

르뤼에도 사랑이란 개념 자체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최근엔 영화까지 보면서 사랑하는 남녀가 어떤 행동 양상을 보이는지도 학습했다.

유일한 문제는 남의 영상을 보는 것과 당사자가 되었을 때의 감상이 천지 차이라는 것이지만….

결국 답은 하나.

“짐은 도망치지 않노라!”

일단 부딪쳐봐야 한다.

2.

르뤼에의 당혹은 비단 처음 느낀 사랑이라는 점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먼저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르뤼에 누켈라비가 누구인가?

스승 샬리트 누켈라비에게 23 위계의 경지를 물려받고 드넓은 바다를 통치하는 심해의 여왕이다.

신시우가 사랑에 눈이 멀어 애걸복걸하면 몰라도 르뤼에가 먼저 아쉬운 입장이 되는 것은 그녀의 드높은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못했다.

-뚜벅뚜벅

야심한 밤이라 그럴까?

아니면 그날 밤 이후 그의 객실에 발을 들이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일까?

두근두근 뛰는 심장.

르뤼에는 흐릿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객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노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여왕이기 때문이다.

비실비실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일반적인 잠수함에서 담배 따위는 크나큰 사치지만 아쿨라는 다르다.

복도는 물론 객실마다 구비된 흡기 장치 덕에 방에서도 흡연이 가능한 최첨단 환기 시설을 자랑했다.

신시우는 흐릿하게 번지는 연기 속에서 담배를 입에 문 채 마법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온종일 시련의 방에서 사는 것도 모자라 공부할 거리를 침실까지 들고 오다니.

굉장한 열정이다.

그는 르뤼에가 들어온 사실조차 잊고 펜을 끄적이고 있었다.

르뤼에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왁!”

“끄악!”

그의 등을 팡 치자 깜짝 놀란 표정이 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계획대로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에 르뤼에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짐이 친히 숙소까지 문안을 와주었거늘, 마땅한 존경도 표하지 않다니 부덕한 신하도다!”

“죄송합니다. 집중 중이었어서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쓴웃음을 짓는 그의 표정에 와르르 무너진다.

조금 전부터 두근거리던 심장이 이젠 아예 쿵쾅거리는 것으로 RPM을 올리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 것이다.

시우는 의자를 돌려 르뤼에를 바라보았고, 르뤼에는 침대와 일체형인 책상 위로 걸터앉았다.

“어쩐 일이신가요?”

“용무가 없으면 찾아와서도 안 되는 것이냐?”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온종일 해놓고 얼마나 더 남았느냐?”

“곧 정리하려던 참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니라.”

그리고 찾아온 뇌 정지.

일단 오기는 왔는데 뭘 해야 할지, 또 어떤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야 할지.

예전엔 자연스럽게 했던 행동이 고장이 난 것처럼 턱턱 멈춘다.

“침소에 드실 시각 아닌가요?”

탁탁 종이 뭉치를 정리한 시우가 속도 모르고 태연히 물어온다.

르뤼에는 안간힘을 써 평소처럼 답했다.

“짐은 자는 시각도 일어나는 시간도 짐이 정하니라.”

“아하….”

“그대는 무엇을 할 예정이냐?”

“두어 시간 정도 눈을 붙이려던 참이었습니다.”

“흐음, 한가하다는 말이로구나. 짐도 마침 한가하다.”

“같이 영화라도 보실래요?”

그의 제안을 받는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발꿈치가 헬륨 풍선보다 가벼워져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착각.

마음속 구석에서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환희가 폭죽처럼 터져나간 것이다.

고작! 영화를 보자는 말에!

“영화도 좋다. 하지만 다른 것도 하고 싶노라.”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을 억지로 눌러 넣으며 르뤼에는 단호하게 입매를 굳혔다.

그를 찾은 것은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해벌쭉대는 한심한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사랑에 휘둘리는 연약한 소녀로 남고자 함도 아니다.

그것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그 기원을 되짚어가는 것이 옳다.

시우와 르뤼에의 관계에 트러블이 생긴 순간은 섹스 이후.

르뤼에가 싱숭생숭한 떨림을 느끼게 된 순간 역시 그에게 ‘섹스하자!’라고 말하지 못한 이후.

그렇다면 해결의 실마리는 성교로 귀결됨이 합당하다.

허나 그렇다하여 먼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그를 매혹해 저번처럼 이성을 잃게 한다면 주도권을 잡고 다시 여왕의 품격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히자 르뤼에도 자신감이 샘솟았다.

신시우는 변해버린 것이 아닐 것이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르뤼에에게 푹 빠졌던 그가 하루아침에 저주와 같은 매혹에서 벗어났을 리 없다.

그렇다면 그가 극도로 몸을 사리는 이유는 강압적인 첫 경험에 대해 르뤼에가 엄포를 놓았기 때문 아닐까?

실은 그도 엄청 안달이 나고 있으리란 의미다.

조금만 살살 꾀어주면 홀라당 넘어올 것이 분명하다.

“영화가 별로시면…. 전에 못 쳤던 포켓볼이라도 마저 할까요?”

“그것도 싫다.”

“음…. 그럼 술은 어떠신가요?”

“이미 마시고 왔느니라.”

따라서 모든 것을 거절함으로 선택지를 좁혀가는 르뤼에.

이것저것 제안을 늘어놓던 시우도 슬슬 르뤼에의 의도를 짐작한 것인지 잠잠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르뤼에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우아한 자태로 하얀 허벅지를 꼬았다.

“짐은 다른 재미난 게 하고 싶도다. 그대와.”

매끈하게 드러난 허벅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시우와 그 모습에 자신감이 두 배로 샘솟는 르뤼에.

빤히 보이는 미끼를 내놓은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여왕이 되어서 어정쩡한 추파에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은 없다.

이제 애원해라! 욕망에 굴복하고 복종에 맹세하며 발등에 입을 맞춰라!

제발 한 번만 안게 해주세요 르뤼에 폐하라고 낑낑거려라!

그렇다면 특별히 달콤한 하룻밤의 꿈을 꾸게 해주겠노라!

“폐하.”

하지만 당차게 마음을 먹었던 르뤼에는 고작 그의 부름 한마디에 다시 마음이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이젠 심장이 아예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맥동한다.

설마 대뜸 키스하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저번처럼 거칠게 덮쳐오는 건가?

하지만 어느 쪽이건 그따위로 나온다면 걷어차 줄 것이다.

아니지, 키스 정도는 허락해 줘도 되려나?

아니다. 잘못하면 버릇이 나빠지는 수가 있다.

안 그래도 첫 경험은 종일 휘둘리다 끝나지 않았는가?

이번 기회에 철저히 그를 길들일 것이다.

노심처럼 달아오르던 르뤼에의 심장은 다음 이어진 말에 액화 수소 웅덩이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럼 저희 같이 마법 공부할까요?”

왜냐하면 이런 멍청한 대답은 조금도 상상 못했으니까!

심지어 제 겉옷으로 허벅지를 가려주는 것도 상상 못 했으니까!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나치게 생뚱맞은 그의 태도는 르뤼에에게 크나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렇다.

왜 신시우가 저런 식으로 나오는지 완벽한 가설이 선 것이다.

마치 발정 난 짐승처럼 르뤼에의 알몸을 탐하며 강압적으로 굴던 신시우는 지극히 정복자의 성향을 보였다.

그리고 그날 밤 이후, 신시우는 이상할 정도로 르뤼에에게 철벽을 쳤다.

이것은 연인 간 주도권을 잡는 치열한 싸움, 소위 ‘밀당’이 아닐까?

신시우가 르뤼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이쪽의 고삐를 잡겠다고 승부에 나선 것은 아닐까?

즉,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애원해라! 여왕의 품위 따위는 던져버리고 일개 아녀자처럼 애달픈 목소리로 사랑을 구걸해라!

제발 한 번만 안아 주세요 신시우 님이라고 낑낑거려라!

그렇다면 애욕에 몸부림치는 하룻밤의 꿈을 꾸게 해주겠노라! 라고.

“하….”

진상을 알게 되자 헛웃음이 나온다.

비록 결은 다르지만, 그는 감히 신하 주제에 여왕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틀림없다!

“짐은 걸려온 싸움엔 등 돌리지 않노라. 신시우여.”

“네?”

“승부에 응해주겠노라!”

물론 거의 다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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