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
1.
또 일주일이 지났다.
본래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다.
수많은 실험을 반복해야 하며 그 안에서도 시행착오를 겪어야 겨우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것이야말로 마도(魔道)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선대 누켈라비가 준비한 ‘시련’은 훌륭한 앞잡이였다.
자신의 잠재력이 극대화된 상대와 겨루며 아무런 부담 없이 생사결을 펼칠 수 있으니 말이다.
특히 마력 충전이 몇 번이고 가능한 시우에게는 최고의 파워업 이벤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하루 다섯 번씩 일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임했으니 벌써 서른다섯 번이나 시련을 겪은 셈이다.
“후우….”
오늘 마지막 시련 할당제를 끝낸 이후 식은땀에 젖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익숙해진 탈력감과 피로감이 전신을 감싼다.
하지만 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원래 번뜩이는 영감이라는 것은 휘발성 액체와 같다.
안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끝없이 써내려 갈 수 있을 것 같던 번뜩이는 사고가 막상 펜을 휘갈길 때면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말아 버리니.
따라서 수건으로 대충 땀을 닦은 뒤 펜과 종이를 집어들어야 했다.
“…뭐였더라….”
막힘없이 종이 위를 휘갈겨지던 펜이 우뚝 멎으며, 재차 피로감이 몰려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정신을 차리자 테이블 위에 나뒹구는 수십 여장의 종이.
하루에만 이렇게 많은 종이가 들어가니 벌써 두꺼운 책으로 엮어내도 좋을 만큼 많은 마법식이 쌓여가고 있었다.
물론 단순히 관측했다고 해서 흑기사의 모든 것을 흉내 낼 순 없다.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것을 본 뒤 곧장 따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애초에 흑기사가 구현하는 마법은 인간의 계산능력으로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슈퍼컴퓨터를 위해 창조된 마법이라 생각하는 게 속 편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잠재의식과 대련하는 것.
그 안에서 뽑아낸 자료를 바탕으로 마법을 재정립하는 것.
그렇게 재정립한 마법을 들고 재차 시련에 나서 검증을 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 절차로 이루어진 루틴은 놀라운 성장세로 보답했다.
평생 무과금으로 즐기던 게임에 대기업 연봉급 금액을 현질한 기분이랄까?
흑기사의 마법을 모방하고, 뜯어고치고, 최적화하는 과정에서 이뤄낸 성과는 여태껏 혼자 끙끙거리며 수련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효율을 보여주었다.
흑기사와 전투를 벌이는 평균 시간 역시 10분~ 15분 사이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원래부터 넘기던 의욕에 고공 행진을 거듭하는 성과가 더해지니 요 며칠 간은 사실상 이 침몰한 여객선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다.
온갖 가구와 누워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소파까지 갖추게 된 것도 그 탓이었다.
“흐음, 재미있느냐?”
한 두시간 동안 끄적이던 펜을 내려놓자마자 소파에서 빈둥대던 르뤼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일주일 전, 얼떨결에 그녀와 살을 섞게 된 이후 딱히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르뤼에가 조금 더 주변에서 알짱거리게 된 것을 제외하곤 두 사람의 관계는 놀라울 정도로 평소대로였다.
역시 르뤼에 답다고 할지, 간밤의 일을 전혀 의식하는 듯한 모습이 아니었기에 시우 역시 평범하게 대할 수 있었다.
“네,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짐은 재미없도다.”
시우가 시련에 매진한 만큼 심심해진 르뤼에는 입이 댓 발은 튀어나온 채 소파에서 이리저리 몸을 굴렸다.
저 좁은 소파 위에서 저렇게나 다양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경이로울 정도다.
정 심심하면 영화라도 보면 될 텐데, 아직 볼 영화는 넘쳐흐를 텐데.
굳이 굳이 시련까지 따라와서 이렇게 칭얼거리곤 했다.
그러면서도 또 방해는 하지 않으니 목적을 알 수 없어 기묘하다.
“폐하께서는 시련에 도전하지 않으실 건가요?”
“짐은 전략을 짜느라 바쁘도다.”
“…….”
“병법에 이르길 명장은 이미 이긴 싸움에만 출진하는 법이니라.”
르뤼에는 오늘 아침부터 진전이 하나도 없는 종잇장을 팔락이며 당당하게 말했다.
마력은 이미 충분할 테니 저렇게까지 빼는 이유는 순전히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르뤼에의 보호자인 것도 아니고 본인이 하기 싫다는데 억지로 떠먹일 생각도 없었지만….
이렇게 남의 물건으로 혼자 꿀 빨고 있으니 미안해서라도 원주인도 덕을 보게 해주고 싶어진다.
“도와드릴까요?”
“도와? 짐을?”
“기왕 하는 거 같이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에 따른 르뤼에의 반응은….
별생각 없다는 듯 시큰둥했다.
분명 전에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던 것처럼 보였는데.
르뤼에야 워낙 휙휙 바뀌니 그러려니 한다.
그래도 일단 좀 더 설득에 나섰다.
“물론 위계로 따지자면 폐하가 훨씬 높은 경지이시겠지만…. 전투는 본질적으로 수 싸움이라고 봅니다. 다양한 상황에 대비해 여러 플랜을 미리 준비하고 들어가는 거죠. 저도 요즘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르뤼에가 번번이 시련에서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처음 생각한 것은 그녀의 접근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친밀도도 그렇게 쌓여있는 편이 아니었고 괜히 입 함부로 놀렸다가 미운털이 박힐 수 있으니 잠잠히 있었다.
원래 현실적인 조언이라는 건 조금 듣기 거슬리는 법 아니겠는가?
하지만 강압적인 첫 경험마저 관대히 용서해주었던 르뤼에가 그런 일로 화낼까 싶기도 하고, 조금은 건설적인 방향으로 컨설팅해 줘도 좋을 것 같았다.
“제가 시련을 겪으며 깨닫게 된 점이 있습니다.”
“무어냐?”
“시련이 해당 인물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마주하게 한다 하셨죠?”
“그랬노라.”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 ‘잠재력’의 측정 기준은 최초 마력을 주입할 때 1회에 고정되는 것 같습니다.”
“뭬야?”
잠재력이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측정되는가?
이건 꽤 중요한 정보였다.
더불어 르뤼에 덕택에 얻게 된 정보이기도 하다.
만약 꿈의 요람이 재현하는 잠재력이라는 것이 도전 때마다 갱신되는 것이라면 흑기사는 르뤼에의 자성마법을 활용했어야 한다.
시우가 질내사정을 하면 필연적으로 낙인 일부가 복사되니 말이다.
하지만 흑기사는 심해의 마녀의 마법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
반면 시우는 아주 조금이나마 그녀의 마법을 창술에 더해 응용하기 시작했다.
“즉, 폐하께서 새로운 마법을 정립하시거나 시련의 패턴을 잘 분석해 그에 맞는 전략을 준비하실 수 있다면 시련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오버스펙급으로 잘못 출시 된 보스라도 패턴이 분석되고 나면 쉽게 사냥당하기 마련이다.
시우의 경우 애초에 흑기사 자체가 규격 외의 무의식이니 여태 애를 먹고 있다 쳐도, 르뤼에는 조금만 제대로 방향성을 잡으면 해결할 수 있는 시련이었던 셈이다.
그녀가 지레 겁먹었을 뿐이지.
구태여 치부까지 들추지는 않았어도 이만큼 말했다면 알아들었을 것이다.
“…….”
빤히 시우를 바라보는 르뤼에.
이 중요한 정보에 대해 감탄이나 칭찬, 하도 못해 놀라는 시늉이라도 해오리라는 예측과는 다르게 르뤼에는 어딘가 불편한 모습이었다.
그 증거를 가져다 대듯, 편치 못한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시련을 끝내고 꺼내는 말이 또 시련 이야기이느냐?”
“예...?”
“되었다. 그대 혼자 실컷 도전하도록 하거라.”
르뤼에는 황망해하는 시우를 두고 등을 돌렸다.
어깨 뒤로 힐끗 시선을 던져 지금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고픈 욕심을 꾹 눌러담았다.
하지만 아쿨라로 복귀할 때까지 시우는 르뤼에를 붙잡지 않았다.
르뤼에의 입이 더욱 삐죽 튀어나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쫓아오지도 않다니. 괘씸하도다!”
시련에만 파묻혀 지내느라 공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시우.
그를 보니 괜히 짜증이 났다.
딱히 그 자체로 르뤼에에게 피해가 온다든가, 예전처럼 자격지심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옛날엔 이러지 않았는데…. 변해버렸느니라.”
그러나 사소한 것에도 칭찬해주고, 놀라고 끝없이 질문 세례를 던지던 신시우는 없었다.
시련에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미친 듯이 몰두하는 신시우만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르뤼에가 징벌적인 의미로 식사를 제한했기에 따로 대화할 시간도 나지 않는 상황.
하루 이틀 지나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며 넘기던 르뤼에지만 결국 이렇게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내고야 말았다.
“멍게 말미잘 해삼 같은 놈…!”
바보도 아닐 텐데 왜 공사다망한 르뤼에 누켈라비가 거의 온종일 옆에 붙어있는지는 생각 못하는 것인가?
일주일 내내 눈치를 주었으면 어련히 알아차리기라도 할 것이지.
여왕이 되어서 신하에게 같이 놀게 시간 좀 내달라고 직접 말할 수는 없기에 그러는 거 아닌가!
르뤼에는 여전히 그와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함께 영화도 보고 싶고, 2인 플레이가 가능한 오락실의 게임도 하고 싶다.
전에 하다 그만 두었던 포켓볼도 치고 싶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국가 정세에 대해서도 논하고 싶다.
“또, 그것도 다시 해봐야 하는데….”
그리고 사실 이게 가장 큰 고민인데.
너무 화끈한 첫 경험에 화상을 입었던 침대 위의 유희에도 다시 슬금슬금 호기심이 발동하고 있다는 점.
그때는 기절하랴 절정하랴 정신없이 박히기만 하느라 혼이 반쯤 나가 있었지만 몸을 절이다시피 파고들던 달콤한 쾌락만큼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조금 더 고삐를 쥔 채 행위를 한다면 얼마나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흐음.”
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 쉽게 몸을 재차 허락할 생각 따윈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시우는 말도 잘 들어주고, 얼굴도 잘생겼고, 몸도 좋고 충직한 신하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받았던 뜨거운 사랑 고백.
르뤼에를 만나고 인생관마저도 바뀌어버렸다는 그의 진솔한 고백은 르뤼에가 마음을 활짝 열기 충분했다.
그의 앞에서 엄포를 놓긴 했어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하룻밤을 부탁한다면, 못 이기는 척 어울려 줄 의향도 있었다는 것이다.
정작 신시우 본인이 전혀 그럴 의지도 의욕도 없어 보였지만..
“풀이나 뜯어 먹고 살 놈 같으니라고.”
그날 밤에는 한 마리 굶주린 맹수처럼 들이대던 남자가 무엇에 겁을 집어먹고 저리 꼬랑지를 내리고 있는지.
르뤼에는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흐음?”
그렇게 홀로 투덜거리던 르뤼에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제 행동에 존재하는 모순점이었다.
분명 신시우는 르뤼에의 신하이다.
또한 첫날밤을 보내게 된 경위를 간략히 요약하자면 르뤼에가 멋대로 그의 침소를 찾아가 덮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때와 달라진 건 거의 없다.
르뤼에가 밤놀이를 원하고 있다면 그때처럼 당당하게 명령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예 그 선택지가 소멸한 것처럼 그의 주변을 미련하게 맴돌기만 할 뿐 제대로 된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그건 왜일까?
단순히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시련으로 바쁘기 때문에?
“폐하.”
그때 뒤에서 뒤늦게 잠수정을 타고 온 시우가 말을 걸어왔다.
쇠뿔도 단숨에 빼라는 말이 있다.
이상한 자가당착을 알아차렸다면 즉시 행동을 수정하면 되는 노릇이다.
르뤼에는 씩씩하게 뒤를 돌아보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신시우, 오늘 밤 짐과….”
하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고 준비했던 입 밖으로 말을 꺼내려는 순간 섹스라는 단어라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지…짐과…. 짐과….”
르뤼에는 갑자기 발생한 기현상에 허둥지둥하며 말을 더듬었다.
왜지? 왜 갑자기 이렇게 부끄럽게 느껴지는 것이지?
“폐하?”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우의 시선을 느끼며 르뤼에는 결국 퐁 붉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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