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44화 (544/917)

#544

1.

시원하게 뺨을 맞고 무릎을 꿇은 채 구구절절 사정을 늘어놓는 시우.

그걸 전부 귀담아 들은 르뤼에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딴 허무맹랑한 변명을 짐더러 믿으라는 얘기냐?”

“참말이옵니다…!”

그가 입에 담은 것은 하나같이 믿기 힘든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체취를 맡게 되면 성욕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고? 웃기는 소리 말거라! 발정기 짐승도 그 정도는 아니니라.”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력이 회복되지 않으셨습니까?”

“신통방통하게도 그러하다. 허나 일부 진실이 옳다 하여 모든 진술에 신빙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15분만에 침실 밖으로 나온 르뤼에.

깨어나자마자 보여주었던 모습에 비하면 뜻밖에 그렇게까지 화난 것 같지는 않다.

설마 죽이기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며칠 동안은 객실에서 근신해야 할 것을 예상했는데 곧장 돌아와 변명할 기회라도 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의껏 진실을 성토해도 르뤼에는 좀처럼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뺨을 때리는 것으로 기껏 화를 참던 르뤼에는 시우의 말이 계속될수록 언짢아지고 있었다.

“짐을 바보천치로 아느냐?”

그녀의 말마따나 허무맹랑한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제까지 다른 여인들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믿어주거나 아예 의심조차 하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신뢰도가 바닥을 뚫고 들어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가장 곤란한 것은 이 발언이 진실임을 확인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르뤼에에게 체취를 맡게 해주고 반응을 지켜보라고 했다간 또 큰 업보를 쌓을 뿐이고,

르뤼에를 덮칠 것을 각오하고 체취를 맡아도 성욕과 체취의 상관관계를 명시적으로 입증하는 건 불가능하다.

성욕이란 무형의 욕망이니 말이다.

“믿어주시옵소서. 정말입니다.”

“…….”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처럼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신뢰에 진실을 호소하는 것밖에 없었다.

르뤼에는 팔짱을 낀 채 한참이나 숙고했다.

찡그려진 미간이 좀처럼 펴질 줄을 모르는 것이 불안하다.

“그깟 비루한 변명이나 듣자고 시간을 쏟은 것을 생각하니 재차 부아가 치미는 도다.”

“…….”

“실망스럽구나. 진실을 고할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짐의 자비가 여기까지 임을 명심하거라.”

단호한 최후통첩과 함께 르뤼에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째깍째깍 빠르게 읽는 초침소리와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여기서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사활이 갈린다.

“…….”

이미 모든 진실을 한 점의 거짓 없이 그녀에게 알렸다.

하지만 르뤼에는 그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같은 진술을 반복한다 하여 새삼 설득력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듣고 싶은 대답은 뭘까?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사이로 한 가닥의 영감이 흘렀다.

그것은 때로는 듣고 싶지 않은 진실보다 듣고 싶은 거짓이 더욱 그럴듯하다는 진리였다.

“소인이….”

하지만 말이 중간에 막힌다.

이걸 정말 말해도 괜찮은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말을 하다 마느냐?”

입을 떼는 순간 유예시간은 더 짧아진바, 어쩔 수 없이 기존에 준비했던 답변을 내놓았다.

“소인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폐하의 아리따운 옥체에 눈이 멀어, 절제를 잊고 욕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뭐, 아주 거짓말인 것도 아니다.

필요 이상으로 폭주한 이유에는 분명 르뤼에가 그만큼 아름다운 몸과 미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도 포함되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

아직도 전혀 누그러지지 않은 눈썹과 입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변명이 성에 차지 않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인다.

하지만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상 어정쩡하게 실언임을 인정하는 건 하책 중 하책이다.

오히려 과감하고 뻔뻔하게 밀어 붙여야 한다.

“미천한 소인이 폐하를 품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폐하와 하룻밤을 보낸다면 설령 죽더라도 행복하게 웃으리라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

호랑이등에 올라탔다.

더 이상의 후퇴는 확실히 없기에 주먹을 불끈 쥐고 웅변가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실로 행복했사옵니다. 허나! 거사를 치르고 나자 이제 미련 없다 생각했던 삶에 욕심이 났습니다.

폐하와의 하룻밤은 단순히 남녀의 사랑을 나누는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저의 인생관마저 뒤바꿔놓을 정도로 행복했던 까닭입니다.”

“…….”

“그 탓에 폐하를 감히 기만하고 말았습니다. 살아만 있다면 다시 기회가 찾아올 테니까요!

체취를 맡아서 주체할 수 없었다뇨! 다시 생각해도 어리석기 그지없는 급조된 변명이옵니다! 제 자신이 부끄럽고 또 부끄럽습니다!”

“…….”

“소인은 저주와 같은 폐하의 매력에 매혹되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호스트바에서 배웠던 언변에 살짝 과장까지 섞어 우다다 털어놓는다.

사실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갈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나도 낯뜨거운 말이기에 가속이 붙어버리고 말았다.

“죽여 주시옵소서!”

고개를 숙인 채 르뤼에의 판결을 기다렸다.

10분 같은 10초가 흐르고 진땀이 식어 차디찬 냉기가 목덜미를 덮을 무렵.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모기만 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 그랬단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고개를 들자 얼굴이 벌겋게 된 르뤼에가 머리카락을 빙빙 손가락으로 꼬꼬 있었다.

두 다리도 잠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왈츠를 추는 것처럼 천천히 스텝을 밟는 중이다.

“짐이~ 그런 달콤한 사탕발림에~ 넘어갈 성 싶더냐~?”

대사와는 정반대로 갑자기 사근사근해진 목소리.

제자리에서 들썩거리던 르뤼에는 요상한 걸음걸이로 시우 주변을 빙글빙글 돌더니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 짐의 매력이 저주와 같았다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도다, 흠흠….”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투닥투닥 두드리면서 말을 잇는다.

“하…. 참…. 이렇게 관대히 넘어가도 괜찮은 사건이 아니거늘…. 그래서, 짐의 어떤 부분이 그대의 인생관을 바꿀 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졌느냐?”

너무나도 효과적이어서 도리어 놀랍다.

오락실에서 고인물의 실력을 뽐냈을 때와 같은 원리였다.

본디 칭찬이란 백날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보다 남이 해준 한 마디가 기분 좋은 법.

눈에 빤히 보이는 찬미일지언정 생전 처음 남성에게 듣는 외모 칭찬이 르뤼에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콧대가 우쭐해지다 못해 지난밤 불명예스러운 기억이 닿지 않는 곳까지 도달해 버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랫배가 아니라 가슴 쪽에서 느껴지는 간질간질함에 몸을 부르르 떠는 르뤼에..

팔짱을 푼 그녀는 마치 런웨이 위의 모델처럼 비스듬하게 자세를 취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자, 어서 말해 보아라. 짐의 어떤 부분이 그리도 매력적이었느냐?”

사람이라는게 일이 이 정도로 잘 풀리면 도리어 불길한 법이지만….

방심했다가 ‘몸매’라고 말할 뻔한 것을 주워담았다.

“우선…. 폐하의 머릿결이옵니다.”

“흠? 짐의 머릿결? 딱히 관리에 신경 써 본 적도 없거늘, 그렇게 아름답더냐?”

르뤼에는 귀밑머리를 사라락 흐트러뜨리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체취를 맞지 않게 조심하며 신중하게 상소를 올린다.

“예, 밤바다의 물결이 일듯 찰랑거리는 모습은 샴푸 모델보다 아름다우십니다.”

“그리고?”

“총기 가득한 눈동자가 실로 혜안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며 고아한 눈썹은 명인이 붓으로 그려낸 듯하옵니다.”

“그리고? 그게 끝이냐? 더 해보도록 하거라.”

“키가 아담하시면서도….”

“키가 아담해?”

찌리릿 쏟아지는 르뤼에의 눈총에 황급히 말을 주워담는다.

“늘씬한 체구임에도 여성스러운 라인을 지니고 계시니. 바다의 여왕이 아닌 여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 옵니다. 그리고 신장도 마녀 평균 이상이옵니다.”

워낙에 쫓듯이 물어보는 까닭에 말실수할 뻔한 것을 제외하고는 훌륭한 임기응변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많은 경험을 해봐야 하나 보다.

“흐으으음…!”

르뤼에는 언제 화냈느냐는 듯 흡족한 콧바람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달싹였다.

저렇게까지 단순해도 될까 싶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여왕님을 속여먹는 느낌이라 죄책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듣고보니 그대의 부덕만을 탓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도다. 짐의 치명적인 미색이 그대를 홀렸을 뿐이니 어찌 등불에 날아드는 부나방을 탓할 수 있겠느냐?”

“황송하옵니다.”

“허나! 아무런 처벌 없이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르뤼에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명했다.

앳된 기색이 가득한 높은 음색이었지만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이런 걸 보면 역시 마녀는 아무나 하는 거 아니구나 싶다.

“내무 대신 신시우는 오늘부터 일주일간 식당에 출입하는 것을 금한다! 아이스크림과 디저트를 먹는 것도 금하겠노라!”

다시 노예에서 내무대신으로 복직되었다.

“누켈라비의 본궁으로 유배를 보내겠노라! 그곳에서 면벽하며 부족한 자제력과 인내심을 재차 돌보도록 하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형식상으로나 유배지 가서 시련이나 도전하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재차 시련에 도전할 수 있도록 르뤼에에게 부탁한 것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보이지 않는 배려에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시우.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서 일이 조금 꼬이긴 했다.

본래는 오늘쯤 르뤼에에게 외부 통신이나 연락 가능 여부를 물으려 했는데 간신히 기분이 좋아진 상황에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다는 염려가 남는다.

그렇다면 우선은 시련에 열중해야겠지.

르뤼에의 마법까지 복제되어 더 강해졌을까? 그 여부를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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