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
1.
즐거운 저녁 식사 시간.
시우는 수북이 쌓인 음식을 앞 접시에 덜어놓았다.
“일용할 양식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냐.”
르뤼에가 이상하다.
물론 지켜봐 온바 르뤼에는 항상 기행을 일삼고 담았으니 새삼 이상하다는 말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분명히 이상하다.
오늘 결투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기 바빴던 시우가 금세 이변을 눈치챘을 정도니 말이다.
시련을 끝내고 온 시점부터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이, 혹은 번뇌하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관자놀이에 얹은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것이다.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르뤼에가 왕새우를 깨작깨작 먹기 시작했을 무렵, 더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폐하.”
“왜 그러느냐?”
“무슨 일 있으신가요?”
딴 생각 중이던 르뤼에는 푸른 눈을 들어 시우를 한 번 보고 알 수 없는 복잡한 시선을 내비쳤다.
“없느니라.”
“그렇군요. 괜한 걸 여쭤 죄송합니다.”
“…….”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할 것이고 아니면 말겠지.
사실 시우는 시우대로 빨리 식사를 끝내고 마법 연구하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다.
하지만 침묵을 깨고 불현듯 르뤼에가 질문을 던졌다.
시선은 접시에 고정한 채 입술만 조금 달싹여 말을 꺼내는 르뤼에.
“그대는 싸움이 두렵지 않은 것이냐?”
“싸움이요?”
“오늘 시련을 다섯 번이나 하지 않았느냐? 승산이 보였던 게냐?”
“아닙니다. 다섯 번 다 형편없이 깨졌죠. 예상보다 훨씬 난적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쓴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어느새 르뤼에는 자못 진지하게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헌데 어찌하여 계속 도전했느냐.”
질문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진지한 분위기였다.
여기서는 슬쩍 아부를 섞는 게 좋지 않을까?
그간 노예 생활로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된 사탕발림을 살짝 섞어 전했다.
“폐하께서도 포기 않으신 채 시련을 계속해오셨지 않습니까. 저 역시 폐하의 모습을 본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르뤼에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지는 것을.
품위를 지키기 위해 평정을 가장하려 안간힘을 써도 좀처럼 수복되지 않는 것을.
시우는 똑똑히 보았다.
격렬한 감정은 곧장 밖으로 드러나는 르뤼에기에 시우는 그녀에게 묻어나오는 격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수치심.
부끄러움.
르뤼에는 테이블을 두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쳤다.
“닥쳐라! 네놈 따위가 뭘 안다고 망발을 지껄이느냐.”
라켄라켄 외무대신을 죽였을 때도 저 정도로 화내지 않았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역린을 단단히 건드린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시우는 즉각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사실 그녀에게는 지금 마력이 거의 없다.
막 시련을 끝낸 만큼 1할이거나 그 미만일 것이며 시우는 아직 몇 번 정도는 거듭 증폭을 통한 마력 회복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하여 반역을 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세 마리의 사역마가 추가로 존재하지 않는가?
크라켄 같은 녀석이 셋이나 있다면 시우가 만전인 상태여도 승산을 점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런 게 아니더라도 순조롭게 신뢰 관계를 쌓아가고 있는 와중에 배반을 선택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
르뤼에는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휙 사라졌다.
“큰일 났네….”
뭐가 뭔진 몰라도 이번만큼은 단단히 미움을 산 것 같다.
2.
르뤼에는 화가 났다.
그로 인해 화가 나는 것은 이로써 세 번째이다.
첫 번째는 실력 행사로 응수했고, 두 번째는 진노를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그의 아부에 관대히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이번엔 분노의 대상이 신시우가 아니라, 다름 아닌 르뤼에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꿈의 요람 앞에서 기겁하듯 몸을 일으키던 신시우.
그 모습을 보아 안에서 죽음을 맞은 것은 분명했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르뤼에는 내심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반복적으로 운동하면 어제보다 조금 더 무서운 물건을 들어 올릴 수 있듯이.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제보다 조금 더 고음역의 음을 안정적으로 낼 수 있듯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그리 어려운 주문이 아니다.
누구든 약간의 노력과 꾸준함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꿈의 요람에서 마주하는 ‘자신’과는 다르다.
모든 잠재력을 개방한 분신은 감히 오를 생각이 들지 않는 높다란 벽이 된다.
누구든 마주하면 의욕이 꺾일 만큼이나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지체 없이 마력을 회복하고 연거푸 시련에 도전했다.
깨어나고, 잠깐 골똘히 생각하다 다시 들어가고.
실패해 깨어나고, 몸을 추스르자 마자 다시 들어가고.
비디오 게임 속 어려운 보스를 끝없이 재도전하는 도전자의 모양새였다.
예전 르뤼에가 그랬듯 말이다.
어설픈 허세나 보여주기식이 아닌 한 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몰두하는 그의 뒤편에서 과거 자신의 자취를 읽은 르뤼에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위액이 역류하는 듯한 화끈한 수치심이 가슴에 번지는 바람에 그것을 숨기기 바빴다.
“…….”
르뤼에는 시련에 전혀 집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승 후 첫 1년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시우가 그랬듯 르뤼에는 열성적으로 시련에 임했으며 함내에 대책반을 세워 열띤 전술 회의와 토론을 이어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좁혀지지 않는 격차.
악을 질러도 가시지 않는 고통과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발악해도 넘어설 수 없는 지독한 장벽은 르뤼에의 의지를 앗아갔다.
이제 그녀는 시련에 들어서면 곧장 가장자리를 향해 뛰어간다.
뒤에서 쫓아오는 무서운 ‘르뤼에’를 피해 꼴사납게 도주하며 정신없이 달리다가 깨어난다.
그리고 나선 ‘아직은 준비가 부족하다’라고 합리화하기 바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은 도주가 아니라 완벽한 준비를 위한 일보 후퇴다’ 따위의 생각을 저 혼자 뇌까린다.
그것도 모자라 한 달에 한 번 꾸준히 시련을 찾으며 ‘그래도 의무를 저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있다’라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왔다.
더 이상 자괴감을 느끼지 않게 될 때까지 그렇게 해왔다.
“정작….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제에….”
의외로 인간이란 놀라울 정도로 자기 합리화에 능숙한 법이다.
하지만 오늘 그의 모습을 보며 르뤼에는 그녀를 감싸던 얄팍한 기만이 낱낱이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옷이 찢어발겨 지는 것보다 수백 배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르뤼에는 영화관에 처박혀 소파에 누워 콩 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왜 스승께선 이런 가혹한 시련을 남긴 것일까?
케테르에 의해 핍박받아 숨어 살고 사방 팔방에 적을 두었던 스승인 만큼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미하게 뇌까리던 르뤼에.
괜히 눈물이 찔끔 날 것 같던 그때.
“폐하.”
시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르뤼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쏙 되 삼키고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일개 노예에게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업무 시간일 터 누구의 허락을 받고 찾아온 게냐.”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펴는 르뤼에지만 시우는 그녀가 평소 같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벌게진 눈가와 콕 찌르면 눈물이 줄줄 흐를 것 같이 튀어나온 두 뺨을 보면 누구나 알 것이다.
“소인이 혹여 실언한 것은 아닌지.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죄송할 것 없다. 업무로 복귀하거라.”
“그래도….”
자존심 강한 르뤼에라면 혼자 두는 편이 더 좋으리라고 이성은 말한다.
적어도 불똥 튈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딱 봐도 우울해 보이는데 이유라도 들어주고 싶었다.
사역마 밖에 없는 잠수함에서 달리 하소연할 곳이라도 있겠는가?
“걱정되어서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르뤼에는 깜짝 놀란 듯이 코를 훌쩍였다.
“거…걱정? 짐을 걱정? 왜 걱정하느냐? 짐은 위대한 누켈라비 왕국의 여왕 르뤼에 누켈라비니라….”
르뤼에는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짐이 그대의 위로나 받을 정도로 나약한 줄 아느냐!!!”
이런 대우가 익숙지 않다는 듯 말꼬리를 흐리다가도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시 르뤼에 스탠드 자세를 취한다.
이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르뤼에 스탠드란 그녀가 하루의 50%가량을 취하고 있는 자세로,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한껏 편 포즈다.
“…….”
눈을 감고 일갈했던 르뤼에는 한쪽 눈만 힐끗 떠 시우의 눈치를 살폈다.
기세등등하게 올라가 있던 어깨에 힘이 슬쩍 빠지는 르뤼에.
굉장한 내적 갈등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그녀가 택한 것은 결국엔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었다.
“여기 앉거라.”
“감사합니다.”
“짐은 위로를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짐은 철인이자 완전무결한 통치자니라. 허나 그대가 어떤 걱정을 품었는지 들어 보겠느니라.”
다리를 꼬고 앉은 르뤼에는 제 옆을 팡팡 내리치며 말했다.
못이기는 척 상담 아닌 상담을 청하는 르뤼에를 보며 시우는 쓴웃음을 꾹 참아야 했다.
“그리고…. 그대에게 화냈던 것은 아니니라. 안절부절할 것 없도다.”
“네, 경청하겠습니다.”
역시 그녀에게는 조금 더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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