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33화 (533/917)

#533

1.

-까드득!

두 개의 쇠 구슬이 강렬하게 부딪치는 소리.

그것은 허공에서 뱀처럼 뒤엉킨 붉은가지의 비명이었다.

기선을 잡기 위해 내지르는 상단과 중단, 그리고 하단을 노리는 찌르기.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인식할 수도 없는 세 번의 찌르기의 뒤에는 오직 하나의 괴음이 튀어나온다.

낙인에 자리 잡은 만병지왕의 계약이 알려준다.

어디를 어느 타이밍에 공략하는 것이 생사를 결할 일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어떤 방식의 공격이 가장 효과적일 것인지.

-까드드드드드득!

1초를 여러 번으로 나눈 찰나 속, 뒤엉켜졌던 두 개의 창끝은 이내 독사처럼 허공에서 몸을 꼬기 시작한다.

불똥 대신 터져 나오는 붉은 결계.

굉음 대신 터져 나오는 왜곡장.

기교로 상대를 누르기 위해, 거칠게 뻗어지는 공세를 흘리기 위해.

첨예한 고음역의 격돌음속 창 끝에서 벌어지는 레슬링에 두 사람이 딛고 선 지면이 부서져 나갔다.

-챙!

꼬리에 꼬리를 물며 씨름하던 창격의 맞물림이 풀려나가고.

연이어 한 쌍의 붉은 반원이 나비처럼 날개를 펼쳤다.

-쾅!

인간의 영역을 초월한 초현실적인 싸움.

시야가 뿌옇게 변하는 아득한 충격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크윽!”

단순히 충격이 문제가 아니다.

붉은가지는 본디 근접전에서 일방적인 우위를 가져오는 사기적인 예장이다.

시우가 아는 한 최강의 무투가인 스승님조차 이 가지 앞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 가지가 사정없이 격돌한 결과 왜곡의 충격파가 이쪽에게도 뻗어오는 것이다.

예소드 백작과 연구했던 제어식이 새겨진 리본으로 창대 일부를 감아 역류를 감쇄하긴 했으나 이것이 미봉책이나 다름없다.

“……..”

그러나 할만하다.

전력으로 휘두른 방금의 격돌로 더 크게 물러난 것은 흑기사 쪽이었다.

일 점에 힘을 싣는 발경의 묘리 역시 흑기사의 것은 어딘가 모자라다.

그도 그렇겠지.

르뤼에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시우가 마주한 ‘잠재력을 최대로 끌어올린 신시우’는 또다른 인격이었다.

모든 기능을 포기하고 오직 마법을 위해 최적화된 신체.

허나 ‘창술’은 마법이 아니다.

반면 시우는 주기적으로 스승님과 대련으로 체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상태다.

같은 만병지왕의 계약을 지니고 있더라도 숙련도가 다른 것이다.

파고들 여지가 보였다.

“후웁!”

-쾅!

그렇기에 다시 한 번 크게 휘두른다.

유리한 거리에서 싸우는 것.

그것은 엘로아가 가르쳐주었던 가장 첫번째 가르침이다.

내디딘 발밑의 땅은 충격에 터져 나가고 그만큼의 힘이 오롯이 창대에 실린 그 순간.

-촤르르륵!

흑기사와 시우의 사이에 장막이 내려앉듯 검은 리본의 향연이 가로질렀다.

예상하고 있었다.

계속 맞붙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거리를 벌릴 것이라고.

그를 위해 리본을 활용하리라는 것까지 예측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몸으로 알아내야 할 필요도 없다.

흑기사는 다름 아닌 신시우 자신인 것이다.

처녀의 베틀은 어디까지나 중거리 전투에 특화된 마법이다.

훌륭한 물리 계열의 마법이지만 직조된 직후엔 틈새가 존재한다.

이 거리에서는 붉은가지 쪽이 위력도 속도도 한 수 위.

창격에 비해 민첩성이 떨어지는 리본을 그대로 찢어발기며 몸을 밀어 넣는다.

“….!”

일격에 찢긴 리본이 꽃잎처럼 흩어지는 가운데 시우는 파랗게 일렁이는 마력의 여파를 감지했다.

이는 좌표이동식의 잔흔.

-기이이익!

곧장 뒤를 돌아보자 단숨에 수십 미터의 거리를 벌린 흑기사가 검은 날개를 펼친 채 리본의 끝을 랜스처럼 날카롭게 꼬고 있었다.

한 가닥에 실린 힘은 중장비의 힘에 버금가는 리본.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궤도와 믿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거기에 그 수는 족히 수백, 시우가 다룰 수 있는 것의 5배는 되는 개수.

이 거리로 전투가 교착된다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야 하는 국면에 영원히 머물게 될 것이다.

“피어라!”

따라서 거듭 증폭을 사용하면서까지 억지로 좌표이동식을 사용하려는 찰나.

시우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오싹함을 느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숱한 투쟁을 이겨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직감.

당장 눈 앞에서 전해지는 위기감과 ‘눈을 떼지 마’라는 내면의 속삭임을 강제로 밀어낸 뒤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창자루가 리본에 묶인 붉은가지가 등 뒤로 날아들고 있었다.

리본을 눈속임으로 사용해 시간을 벌고, 좌표이동식으로 뒤를 잡는 와중에.

붉은 가지를 리본 사이에 은폐한 채 숨겨두고 있던 것이다.

바로 지금.

시우가 억지로 거리를 좁히기 위해 좌표이동식을 사용할 것에 대비해서.

놈은 단순히 마법을 사용한 전투에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시우가 강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기책을 짜냈던 것처럼, 흑기사 역시 시우를 상대로 수 싸움을 펼치고 있었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쪽만 흑기사의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흑기사 역시 시우가 활용할 수 있는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

“피어라.”

흑기사의 거듭 증폭과 무미건조하게 들려오는 영창.

동시에 부채꼴로 펼쳐졌던 리본 가닥이 일제히 마력으로 부풀어 오른다.

앞에는 이제 막 폭격을 개시하려는 리본의 향연.

뒤로는 곧장 등을 꿰뚫으려 집요하게 파고드는 붉은가지.

대응할 우선순위는 확실했다.

좌표이동식을 취소하고 몸을 억지로 비틀어 가지를 쳐낸다.

그 이후 리본을 받아내며 교착을 풀어낼 방도를 생각한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각오를 굳히던 찰나였다.

-팅

시우의 귓전으로 맑고 청명한 소리가 파문처럼 번졌다.

물을 반쯤 채운 유리잔을 스푼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어….”

그와 동시에 비스듬하게 기울어가는 세상.

이건 세상이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격한 소음 속 아랑곳하지 않게 퍼진 파동은 시우도 일직이 경험했던 것이었다.

제머나이의 소리를 이용한 자성마법.

마력을 매개로 전달된 진동이 반고리관을 뒤흔들자 구역질과 함께 몸의 중심을 잃는다.

간신히 땅을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시우 위로.

중기병의  랜스돌격처럼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인 뾰족한 리본이 끝없이 쏟아진다.

여기부터는 무엇을 해도 늦었다.

시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지막이 욕설을 지껄이는 정도였다.

“이런 시발, 존나 세네.”

그리고 시우의 의식은 오래된 브라운관이 꺼지는 것처럼 암전했다.

2.

“허억…! 헉…!”

눈이 번쩍 떠졌다.

탁 트인 시야로 천장이 보이고 그 반절을 차지한 르뤼에의 얼굴이 보인다.

끔뻑끔뻑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 덕에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괜찮느냐?”

“아… 네.”

“입에서 침이 흐르고 있도다.”

“감사합니다.”

르뤼에가 얼굴에 툭 떨궈준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겸사겸사 이마에서 흐르는 비지땀도 닦았다.

마력이 쭉 빠져나가서 몸이 피로하다.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가요?”

“3분 정도 지났느니라.”

“3분….”

그 안으로 들어가 분신을 만나기까지 1분 정도.

죽음을 맞이하자마자 깨어났다고 해도 2분가량이다.

고작 2분 만에 패배한 것이다.

격차를 알고 있었기에 쉽게 생각한 적은 없다.

한 치의 방심도 없이 진지하게 임했다.

그러나 무의식 속 분신은 시우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강했다.

동시에 다룰 수 있는 리본의 개수도 천양지차.

좌표이동식의 사용에 인터벌이 거의 없으며 가장 최근에 얻은 제머나이의 자성마법까지 다룬다.

더군다나 둘이 사용하는 마법이 동일한 가운데 스펙 차이만 존재했기 때문에 상성이나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 변수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짐 이외에 꿈의 요람을 사용한 자는 그대가 처음이니라. 어땠느냐?”

“…얼떨떨합니다.”

“아프진 않았더냐?”

“뭐가 뭔지 알기도 전에 끝나버려서….”

왜곡장에 휘말린 여파로 몸이 좀 욱신거렸던 것을 제외하면 딱히 아팠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게 실전이었더라면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갈기갈기 찢어졌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등골이 오싹했다.

“조금 쉬고 있거라. 이제 짐의 차례니. 오늘에야말로 가짜를 상대로 웅대한 승리를 거머쥐고 왕국을 계승하겠다!”

르뤼에는 허리에 손을 얻고 전방에 함성을 발사하듯이 기운차게 말했다.

아직은 전투의 여파로 정신이 없었다만 살짝 쥐어짜내는 듯한 기백임을 눈치채긴 어렵지 않았다.

“어째서 갈채하지 않는거냐?”

“역시 폐하! 멋지십니다!”

시우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들으며 꿈의 요람에 손을 얹는 르뤼에.

“발진!”

이상한 기합과 함께 마력이 번쩍였다.

마력량은 의외로 위계와 관계없이 낙인의 저장 용량에 따라 달라지는데 르뤼에의 경우 실로 어마어마한 마력의 보유자였다.

-우우우웅!

중후한 파도와 같은 일렁임이 일더니 검은 구슬이 새파랗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르뤼에는 풀썩 무릎 꿇더니 옆으로 쓰러진다.

어차피 조금 기다려야 할 테니 오늘의 전투를 복기해보는 시우.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난 일전이었으나 배울 것이 없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정신을 차리고나자 이것이 천세일시의 기연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딘가 호환이 부족한 시우의 마법과는 달리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체화가 완료된 마법의 연계.

이 왼눈으로 관측한 마법식과 마력의 흐름은 확실히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이건 컨닝 페이퍼나 다름없었다.

본래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전을 거치며 얻어야 할 데이터를 미리 당겨와 직접 볼 수 있으니 시련을 반복한다면 분명 비약적인 진전이 있을 터.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빠른 약 30초 뒤.

“푸하아아아!!!!!!!”

실끊긴 인형처럼 쓰러졌던 르뤼에가 상체를 무서운 기세로 벌떡 일으켰다.

동그랗게 치켜뜬 눈과 삐쭉삐쭉 곤두선 머리카락이 흡사 찬물 세례를 맞은 고양이 꼴이었다.

“짐의 시련은 끝났다! 돌아가겠노라!”

“네? 벌써요?”

시우도 빨랐지만 르뤼에는 그냥저냥 빠르다 수준이 아니었다.

체감상 등을 눕히자마자 일어난 것.

이쯤 되면 시작되자마자 냅다 낭떠러지를 향해 달렸다고 해도 믿을 수준이었다.

“무엄하다! 졌지만 잘 싸웠노라! 짐의 분투를 ‘벌써요?’라는 한 마디로 치부하다니!”

“소, 송구하옵니다.”

어설픈 성대모사까지 곁들이며 분개하는 르뤼에.

하지만 기분 탓일까?

그녀는 하기 싫었던 숙제를 대충 휘갈겨 끝낸 이후처럼 상쾌해 보였다.

시련이라매.

차라리 이쪽이 훨씬 진지하게 임한 것 같다.

“돌아가면 마저 영화를 봐야겠노라.”

“폐하.”

대단한 일을 했다는 양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지개를 쭉 켜는 르뤼에를 붙잡았다.

“음? 무슨 용무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 시련을 한 번 더 도전해 볼 수 있겠사옵니까?”

‘내가 제대로 들었나?’ 싶은 반신반의하는 반응.

그 뒤로 얇게 내비친 감정은 어째서인지 떨떠름함이었다.

“윤허한다. 어차피 사용한다고 닳는 물건도 아니니라. 다음에 시련도 동행할 영광을 하사하겠느니라.”

“그게 아니라…. 지금 바로 다시 해봐도 괜찮을까요?”

“…….”

멍한 눈길로 바라보는 르뤼에.

“마력이 바닥나지 않았느냐?”

“금방 채울 수 있습니다.”

장기 중 하나인 거듭 증폭으로 바닥난 마력을 끝까지 회복했다.

이렇게 5, 6번 정도는 무리 없이 가능하다.

살짝 넋이 나가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 르뤼에.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시우는 총 4번 자신의 분신과 자웅을 겨루었다.

그래 봤자 도합 20분짜리 전투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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