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
1.
여객선의 갑판 위에 오른 시점부터는 구태여 르뤼에의 손을 잡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여객선을 두르고 있는 반투명한 결계로 진입하자 실내 공간에 들어온 것처럼 조성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무거운 수압에 짓누르는 환경에서 이 정도의 결계를, 그것도 이렇게 대규모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객선 또한 아쿨라에 뒤지지 않는 아티펙트였다.
최대한 원형을 살린 아쿨라와 달리 여객선은 껍데기만 유지해 놓은 상태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외관으로는 전혀 추측할 수 없는 화려한 홀이 시우와 르뤼에를 반겨주었다.
대단한 공방이라는 예상은 했다.
아무리 견습마녀를 아낀다지만 원잠을 밀수해 선물로 줄 정도면 고만고만한 부자는 아닐테니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풍경은 예상마저 뛰어넘는다.
“우와….”
시우가 아는 건물 중에 가장 호화로워 보였다.
우선 바닥이고 천장이고 벽이고 할 것 없이 전체가 눈이 아플 만큼 반짝이는 보석과 금으로 치장되어 있다.
아름드리나무 둘레의 기둥조차 세련된 조각이 가미되어 있었고 주먹만한 수정 장식이 십 수개씩 박혀있다.
돈을 있는 대로 발라 넣어 일견 졸부처럼 보이는 인테리어도 이만큼 본격적이면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쪽이도다.”
하지만 르뤼에는 힐끗 건물 안을 훑었을 뿐, 별다른 설명이나 자랑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도리어 해저의 풍광을 자랑할 때 그녀의 모습이 더욱 자신만만해 보였다.
“훌륭한 기품이 깃든 왕국이옵니다.”
“…기탄 없이 고하자면 짐은 스승의 인테리어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노라. 짐의 소유가 되면 모조리 뜯어고칠 것이야.”
“예를 들면요?”
“항모를 구매해볼 예정이니라.”
“…….”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홀의 왼쪽으로 빠져나와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걸었다.
좌우로 드문드문 나 있는 문은 모조리 잠겨있고, 실내는 느껴지는 인적 하나 없음에도 어제 대청소를 마친 것처럼 깔끔했다.
벽면을 장식한 촛대를 구경하며 물었다.
“폐하, 시련이라는 건 정확히 어떤 것인가요?”
“마녀가 가장 쉽게 죽는 시기가 언제인지 아느냐?”
“견습마녀가 낙인을 물려받은 직후라 하셨던 것이 기억 납니다.”
“그러하다.”
선대에게 낙인을 승계받았다 하여 곧장 안에 있는 모든 마법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계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10년을 잡고 최적화를 맞춰야 선대와 비슷한 퍼포먼스를 뽑아낼 수 있으며, 진정한 마녀의 삶은 거기부터 시작된다고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기를 단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겠느냐.”
“가르침을 주시옵소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요…?”
“목숨이 오가는 전투 속에서 마녀의 마법은 더욱 빠르게 정련되는 것이니라.”
그렇다면 시련이란 목숨을 건 싸움인 걸까?
그런데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란 건 무슨 의미일까?
비정상적으로 긴 복도를 지나자 문이 나왔다.
다른 문이 꽁꽁 잠겨있던 것에 비해 르뤼에가 앞에 도착하자마자 스르륵 열렸다.
기둥과 촛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텅 빈 방.
그 중앙에는 시우의 허리쯤 오는 높이의 커다란 구슬.
흑진주처럼 불투명한 검은 색감과 모양을 지닌 구슬이 푹신한 방석 위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매끈하다면 얼굴이 비쳐 보일 법도 한데, 이 구슬은 모든 빛을 빨아들이고 다시 내보내지 않는 심연처럼 어두컴컴했다.
“으….”
르뤼에는 식사 중 숟가락 위에 싫어하는 반찬이 올라간 때의 표정을 지었다.
정말 먹기 싫지만 이미 집어든 음식을 내려놓는 것은 기품 없다 생각하는지 꾸역꾸역 먹을 때의 표정을 말이다.
뭐, 그녀가 시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정황으로 파악한 뒤이다.
별로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나가는 르뤼에.
“이 구슬은 ‘꿈의 요람’이라 명명된 아티펙트니라. 마력을 불어넣으면 사용자를 심층 무의식으로 보내주지.”
“그렇군요.”
“심층 무의식 속에서 잠재력을 모두 이끌어낸 자신과 전투를 벌이게 되니라. 그 전투에서 승리는 곧 제 한계를 초월했음을 의미하지.”
막 계승을 끝낸 마녀는 아직 모든 잠재력을 개방하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
그렇다면 모든 잠재력을 개방한 자신을 죽임으로써 완전한 계승을 끝냈음을 검증하는 것이다.
르뤼에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한 시우는 귀가 솔깃했다.
비앙카와 일전 이후 이 몸 안에 잠들어있는 또 하나의 인격을 발견했다.
탐욕적으로 마법을 갈구하며 동시에 어떠한 인간미도 품지 않는 마법을 위한 기계장치.
그것은 죽음과 동시에 몸의 제어권을 가져갔고 비앙카를 상대로 대등한 대결을 벌였다.
그뿐 아니다.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무렵 그 녀석이 마법을 사용했던 방식을 더듬은 것만으로 시우의 마법적 능력은 월등히 향상되어 있었다.
이후 무의식 속 인격을 다시 만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아무리 아인으로 진입해도 만날 수 없던 상황.
하지만 저 아티펙트라면 어떨까.
“폐하, 이 꿈의 요람은 폐하께서만 사용하실 수 있는 건가요?”
“음?”
꿈의 요람이 재현하는 잠재력이 정확히 어떤 범위와 수준까지 측정하여 내보이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식 속 시우’까지 포함하고 있다면.
그것과 겨뤄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발상이 떠오른 것이다.
“시련 말이냐? 아니다. 사용의 제약은 없도다.”
“그렇다면 저도 사용해 보고 싶사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자 르뤼에는 희한한 것을 다본다는 듯 시우를 바라보았다.
“달리 허락하지 못할 것은 없느니라. 허나 힘들고 귀찮고 아플 것이다. 전투 자체는 무의식 속에서 벌어진다 해도 의식은 선명하니. 실제로 싸우는 것과 조금의 차이도 없느니라.”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예.”
이건 좋은 기회다.
스승님과 아무리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서로 다치지 않게 손속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뤼에의 설명에 따르면 꿈의 요람은 사실상 정교한 VR장치.
더 없이 실전에 가까운 전투를 부상이나 죽음의 위험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커다란 메리트다.
목숨을 건 전투를 넘길 때마다 월등한 실력 향상을 이뤄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거기에 당장은 무리더라도 무의식 속 신시우를 초월한다면?
어지간한 마녀에게 꿀릴 일 없는 강함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서 공적을 사냥하느라 고생 중인 스승님께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시우의 눈에서 기묘한 열의를 읽은 르뤼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서 고생하다니. 독특한 취향이구나. 거짓 없이 고하자면 짐은 이 시련이 굉장히 싫도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가 짐의 몫까지 전부 해주었음 좋겠느니라.”
“그래도 하고 싶습니다.”
“윤허한다.”
르뤼에와 시우는 나란히 구슬 앞에 섰다.
“바라는 대로 그대가 먼저 해보아라. 방법은 단순하다. 위에 손을 얹거라.”
그녀가 시키는 대로 손을 얹자 차갑고 매끈한 촉감이 손바닥에 달라붙는다.
“이제 마력을 불어넣거라.”
“얼마면 될까요?”
“전부 넣는다는 생각으로 주입하면 되느니라. 그래서 짐도 한 달의 한 번밖에 도전할 수 없도다.”
“그 밖에 주의사항은 없을까요? 알아두면 좋은 것이라던가.”
잠깐 턱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하는 르뤼에.
“다치면 몹시 아플 테니 주의하도록 하거라. 치명상을 입으면 자동으로 깨어나지만 단순한 부상은 환통이 남을 만큼 끔찍하노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부에 진입하면 커다란 정사각형 형태의 판이 있을 것이다. 싸움을 포기하고 싶거든 그 끝으로 달려가 뛰어내리면 끝이니라.”
“네, 감사합니다.”
“그럼, 무운을 빌겠노라.”
시우는 마력을 주입했고, 그와 동시에 세상이 검게 변했다.
2.
체감상으로는 눈을 깜빡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다른 장소에 도달해 있었다.
옆에 있던 르뤼에가 간데없어진 것은 물론이다.
이곳은 아인처럼 무의식 속의 공간이니 타인이 침범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변에 보이는 것을 묘사하자면….
아인이 그렇듯 우주 한가운데 던져진 것처럼 새까맣다.
또한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는 어둠이 끝도 없이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어쩌면 꿈의 요람이라는 것은 아인을 본떠 만든 아티펙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인과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공중을 의지대로 유영할 수 있던 아인과 달리 분명한 중력이 작용한다는 것.
그리고 중력에 의해 추락할 육체를 단단하게 붙잡아줄 수 있는 정사각형 형태의 넓고 하얀 대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워낙에 커다래서 쉽게 식별할 순 없었지만 르뤼에의 말대로라면 이 판대기 끝에 낭떠러지가 존재하는 듯하다.
“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느새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붉은가지를 발견했다.
처음부터 거기에 존재했다는 듯 이제야 존재감을 드러내는 붉은가지.
시우가 거의 주무장처럼 삼아온 붉은가지는 이미 예장으로서 자성 마법에 가깝다.
이곳은 무의식의 공간이기에 물리적으로는 외부에 존재할지라도 그대로 구현되는 것이다.
아직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선 그림자로 갑옷을 직조해 몸에 걸쳤다.
갑옷의 이음매가 철컥이는 소리가 기차 소리처럼 들릴 정도의 기이한 정적.
이곳이 일상과 다른 공간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조용히 흐르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혈액 속으로 아드레날린이 뻗어 나간다.
-철컥 철컥 철컥
그때 등 뒤로 무거운 갑주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투구를 푹 눌러쓴 흑기사가 있었다.
옛날에 했던 망겜을 토대로 만들어진 멋들어진 검은 갑주.
솔직히 ‘그림자’니까 정상적으로 착용할 수 있지 세상에 존재하는 금속이었다면 멋있다는 것을 뺴면 아무런 장점이 없는 디자인이다.
어깨에 대충 걸친 붉은가지.
눌러 쓴 투구의 눈가리개 사이로 흐르는 황금빛의 안광.
“…….”
누가 봐도 신시우다.
자기 자신이 움직이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굉장히 기묘한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다.”
“…….”
당연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무장을 걸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세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니, 세 보이는 게 아니지. 이 흑기사는 정말 강할 것이다.
본능이 알려주고 있다.
이건 단순히 신시우의 잠재력이 아닌, 신시우를 초월한 무의식의 잠재력까지 포함되어 구현된 것이라고.
-척
같은 의식을 공유해 만들어진 허상이기 때문일까?
두 사람이 전운을 감지하고 자세를 취한 시간은 정확히 동일했다.
언제든 앞으로 튀어 나갈 수 있게 탄력을 머금은 채 살짝 굽혀진 무릎.
그보다 살짝 아래로 드리운 붉은 창끝.
좌우가 반전되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창의 각도마저 똑같다.
“피어라.”
“피어라.”
동일한 영창과 함께 두 기의 갑옷이 붓으로 그은 듯한 잔영을 남기며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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