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31화 (531/917)

#531

1.

그녀가 이제껏 흑백으로 보았던 영화는 상업용 필름이 아니었다.

애초에 르뤼에가 고른 것조차 아니었다.

뭘 말하고 싶은지도 난해한 예술 영화 혹은 자국의 장병을 대상으로 만든 노골적인 선전 영화였는데 영사기만 기존 함내에 비치되었던 것이고 좌초됐던 군함에서 건져낸 것이었다.

더럽게 재미없지만 가뜩이나 할 일이 없는 르뤼에에게는 꽤 괜찮은 심심풀이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풀컬러로 처음 보게 됐던 영화는 차원이 달랐다.

입술의 움직임과 어긋나지 않는 립싱크.

화려한 색감, 다채로운 연출, 세련된 음악, 정말로 안에 사람이 숨 쉬는 듯한 생동감, 좌우 스피커에서 가슴을 울리는 웅장한 음향.

과학과 문화의 발전이 항상 예술의 진보를 이끄는 것은 아니지만, 현세의 최신 영화는 전에 없이 재밌었으며 화려했다.

그런데 왜?

영화를 모두 본 뒤 이렇게 침울한 기분이 감도는 걸까?

여왕의 품위에 맞지 않게 소파 한구석에 찌그러져 앉아있게 되는 걸까?

“이건 선동, 프로파간다를 위한 영화니라.”

이 영화 속에는 선도 악도 없었다.

어떨 때는 주인공의 동료나 상사, 혹은 주인공이 광기에 미친 듯이 행동했다.

어떨 때는 악랄하기 그지없는 적군이 더 없이 인간으로 보였다.

머리가 아팠다.

만약 세계 정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영화 속 참사가 재현되는 걸까?

철저하게 통제된 군대라면, 마법과 과학을 결합해 만들어낸 최첨단 병기라면 민간인이 휘말려 드는 것을 철저히 배제할 수 있을까?

전에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도덕적 숙고가 르뤼에의 머리를 맴돈다.

아주 어설프고 미약하지만 그건 분명 자기 성찰이었다.

그가 왜 굳이 이 영화를 보여주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모르겠노라.”

르뤼에는 빈 페트병을 툭 쓰러뜨리며 짜증을 부렸다.

머리 아픈 건 딱 질색이다.

“하여간 첩자이긴 한 모양이구나.”

문화적 세뇌라니, 실로 교묘한 방법이었다.

경쟁 국가는 누켈라비 왕국의 수장을 반전주의자로 만들어 전쟁의 발발을 막으려는 심산인 걸까.

분하지만 제대로 먹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르뤼에는 한숨을 쉬고 영화 케이스가 한가득 쌓인 상자로 다가갔다.

그러나 태생이 낙천적인 르뤼에다.

방금까지 상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던 르뤼에의 얼굴에 헤벌쭉한 미소가 번졌다.

이럴 땐 분위기 전환이 최고다. 어쨌거나 방금 영화 진짜 재밌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안에는 그에 준할 것이 분명한 영화들이 수백 편 씩이나 쌓여있다.

“오? 오오! 오호….”

플라스틱 케이스를 촤르륵 넘기며 내용품을 제대로 살피는 르뤼에.

뭐가 뭔지는 제대로 모르겠지만 화려한 케이스만 봐도 신기하기 그지없다.

으스스한 것이 어째 무서워 보이는 것도 있고, 총을 든 남녀가 등을 맞대고 기대고 있는 것도 있다.

거기에 라켄라켄 만큼은 못해도 엄청나게 커다란 빌딩을 몸으로 휘감고 있는 괴수가 등장하는 영화도 있었다.

레이어만 봐도 현세의 자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것에 기뻐하는 와중.

-바스락

“흐음?”

르뤼에는 상자의 가장 안쪽, 그러니까 산더미 같은 케이스 아래 안이 비치지 않는 검은 포장지에 둘러싸인 물건을 찾아내었다.

지체 없이 뜯어보자 드러난 내용품은 여지없이 영화 50여 편. 르뤼에는 눈썹을 찡그렸다.

“흐으음…?”

아무것도 없다.

케이스는 화려한 여타 영화와 달리 반투명한 플라스틱이 끝이었고 레이어도 하얀색으로 끝이다.

대신 검은 비닐 안에서 팔락팔락 쪽지가 떨어졌다.

[고객 요청 사항: 표지 제거 부탁해요. 내용품도 알아볼 수 없게 해주세요]

불쑥 호기심이 들었지만 이내 구석에 밀어 놓았다.

가뜩이나 재밌어 보이는 영화가 한가득인데 내용품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먼저 볼 생각은 없던 것이다.

르뤼에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영화 상영을 시작했다.

2.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노획품의 양은 기존 보물창고 안에 쌓여있던 양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르뤼에가 말하건대, 이토록 많은 노획품을 단박에 걷어본 적은 거의 처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며칠 정도는 정리에 시간을 할애해야 했을 테지만 르뤼에는 그런 시우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신가요?”

“금일은 시련의 날이니라.”

르뤼에는 벌게진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영체의 내구도는 무한대에 가깝지만 근 36시간을 TV만 빤히 바라보고 있다면 눈이 충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련의 날이요?”

“궁금해하지 않았더냐. 짐은 풀 에이치디 테레비전이라는 멋진 영사기를 설치해준 그대에게 누켈라비 왕국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권한을 주겠노라.”

“누켈라비 왕국은 아쿨라 아니었사옵니까?”

“진정한 누켈라비 왕국 말이다.”

그렇게 말한 르뤼에는 정전실의 위층으로 뻗은 계단을 시우와 함께 올랐다.

머지않아 시우는 그녀와 함께 향하는 곳이 잠수함의 수직 방향타 겸 망루, 잠수함을 고래라 치면 커다란 등지느러미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취이이익!

르뤼에는 두께만 50cm는 되어 보이는 두터운 철문을 닫고 회전 손잡이를 돌렸다.

어뢰 사출구로 나가는 방법도 있지만 이편이 갑판을 걸어갈 수 있어 더 편하기 때문이었다.

기압을 맞추듯 천천히 발밑부터 해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수천년이 지나도 따스한 태양 볕 한 번 내리쬔 적 없는 심해의 바닷물은 해수가 아니었으면 살얼음이 끼었을까 싶을 만치 차가웠다.

“바다로 나가는 건가요?”

"그러하다."

혹시 이대로 내뺄 수 있지는 않을까, 잠깐 고민했던 시우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여긴 바닷속이다.

아무리 튼튼한 영체이고 마력을 통한 영체 강화가 능숙한 시우지만 물을 헤치며 르뤼에를 따돌리면서 도망칠 자신은 없었다.

안 그래도 호감도작도 차곡차곡 하고 있는 것 같고 조만간 연락이라도 할 수 있게 부탁할 심산이다.

“그렇게 두려워 말거라. 짐의 손을 잡아라.”

신앙심 테스트를 당하는 베드로가 된 기분이다.

시키는 대로 손을 잡았다.

손마디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랗고 살짝 차가운 손이었다.

“짐의 옥수를 잡았음에도 감사를 표하지 않다니. 괘씸하구나.”

“송구하옵니다. 너무나 황송하여 할 말을 잃었습니다.”

평소의 르뤼에라면 방실방실 웃거나 우쭐해 할 테지만 오늘의 그녀는 모래사장에 떠밀려온 미역 같은 느낌이다.

기운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시련’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뭔가 어려운 일을 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일까?

빠르게 차오르던 물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반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진짜 더럽게 차갑다.

“호들갑 떨 것 있겠느냐? 그대의 어깨엔 짐의 가호가 함께 하니라.”

“어?”

외부로 통하는 전면 해치가 개방되고 얼음장 같은 해수가 전신을 휘감았음에도 멀쩡히 숨이 쉬어진다.

심지어 대화도 편하게 할 수 있었으며 움직일 때 발생하는 약간의 저항감을 제외하면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눈이 따갑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이내 완전히 개방된 해치 너머로 심해의 풍경이 보인다.

“어떠하느냐.”

“…….”

말문이 막혔다.

이제껏 많은 경험을 해왔다.

게헨나의 자연 풍광도 구경해왔고 항모도 통째로 소멸시킬 거대한 일격에 맞서기도 했다.

잠수함의 갑판 위에 내려서자 위대한 자연이 빚어낸 경관이 더욱 자세히 보였다.

빛 한 점 없음에도 생생히 보이는 해저의 풍경은 온갖 신비를 경험했던 시우에게도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것은 어두운 밤하늘처럼 짙푸른 어둠.

그 아래로는 넓게 펼쳐진 평원이 있다.

평원을 이루는 것은 밟는 대로 발자국이 남을 것 같은 부드러운 모래.

아쿠아리움에서도 본 적 없었던 독특한 생김새의 어류가 새처럼 날아다니는 와중에 드문드문 자라난 산호 숲이 심층 해류의 느린 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시선을 쫓아 경사진 구릉을 쫓다 보면 갑작스레 등장하는 것은 거대한 산.

족히 1,000M는 될 것 같은 산맥이 해령이라는 이름으로 봉우리를 줄지어 늘어놓고 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지 않더냐?”

진심 어린 경탄이 르뤼에는 썩 흡족했는지 씩 웃음을 지었다.

바다와 맞닿은 그녀의 머리카락은 산들바람에 휘날리듯 너울거리며 청옥 같은 푸른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도 금새 사그라진다.

해파리처럼 펄럭이며 날아온 비닐 봉투를 본 순간이었다.

정성스레 가꾼 정원을 흙발로 짓밟고 지나간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저런 표정이겠지.

르뤼에가 손을 뻗자 비닐봉지는 녹아들듯 사라져 버렸다.

“짐이 세상을 정복하려는 것은 알량한 욕심 때문이라 여겼더냐?  아니다. 이것은 정당한 징벌이다. 인간은 아무런 가책 없이 바다를 더럽히길 일삼지. 심해의 지배자인 짐이 그것을 묵과해야 하겠느냐?”

“폐하를 위해 드리는 진언이었습니다.”

“충언을 바치는 신하가 언제나 바른 판단만 하였을까? 짐은 그리 생각지 않는다.”

르뤼에는 언쟁을 더 이어나가지 않았다.

대신 잠수함의 갑판 위에서 풀쩍 뛰어내려 해저평원을 거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된, 그녀의 말을 따르자면, 진정한 누켈라비 왕국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해령의 정상부의 맞닿는 V자의 열곡 사이에 끼워지듯 놓여있는 거대한 여객선이었다.

르뤼에의 잠수함이 거대하다지만 저 여객선에 비하면 절반의 절반 크기도 못 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가라앉은 침몰선의 창에서 황홀할 정도의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르뤼에의 가호 덕에 시야가 트였다 해도 바다 밑바닥을 기본적으로 어둡다.

깊은 바닷속 황량한 열곡에서 교교한 빛을 흘리며 서 있는 여객선은 인적 드문 숲 속 화려한 유령저택만큼이나 위화감을 풍겼다.

“언젠가 내가 되찾을 왕국이니라.”

시우는 르뤼에를 따라 누켈라비 왕국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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