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
1.
“감히! 감히! 감히이이!!”
새로운 노예를 수집한 이후 며칠, 르뤼에는 즐거웠다.
어느 정도로 즐거웠냐 하면 그토록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무료하도다’라는 말을 한 번도 담지 않을 만큼이나 즐거웠다.
물론 충성스러운 승조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겁다.
음…. 아니, 사실 생각만큼 즐겁지는 않다.
그들이 분명 사역마의 한계를 넘어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그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신하가 반드시 즐거운 대화 상대라 여긴다면 오산이다.
그들은 시우처럼 놀라는 시늉을 하지도 못했고, 진심 어린 탄성을 내뱉는 척도 할 수도 없었다.
비록 반쯤은 겉치레라는 것을 알지만 그는 이 멋진 아쿨라를 자랑할 때마다 번번이 훌륭한 리액션을 보여주었고, 음식 하나를 입에 넣을 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스승을 제외하고 르뤼에와 이렇게 알찬 시간을 보내주던 사람은 무기상 한 명뿐.
그마저도 견습마녀 시절에나 몇 번 얼굴을 봤던 것이다.
기나긴 세월 홀로 투쟁을 거듭해 왔던 르뤼에는 오래간만에 맡아보는 사람 냄새에 온종일 들떠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그가 외무대신 라켄라켄을 죽였음에도 좋게 보았다.
일도 열심히 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유희도 제공해주니 아쿨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도 좋겠다고, 슬슬 종신 노예형을 면하고 승조원의 자격을 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괘씸하도다!”
감히 노예 주제에 군주가 도모하는 야망에 헛된 망발을 늘어놓다니.
다른 마녀가 반발할 것이라든지, 공적으로 지정될 것이라든지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무분별한 살육을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전쟁을 일으킨다 해도 정확히 군대만 상대하려 했단 말이다.
“흐음?”
씩씩거리며 전정실로 향하던 르뤼에의 눈썹이 기울어진다.
양 관자놀이 사이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천재적인 발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일반적인 상식을 탈피한 천재적 전략가가 아니면 절대로 떠올릴 수 없는 심오한 발상이었다.
“혹시, 간자(間者)인 것이냐…?”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조의 마녀와의 맹약으로 넘겨준 어항.
이제껏 그 어떤 외부인도 들인 적 없던 아쿨라에 자연스럽게 노예가 된 신시우.
“…….”
게헨나 혹은 미합중국, 러시아, 중국.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 세계 정복의 야망에 대해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하다.
간첩을 하나 심어 놓은 뒤 이쪽을 흔들며 의욕을 꺾을 심산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만약의 가능성에 불과했다.
“대단하구나.”
그리고 르뤼에는 그 가능성을 의심하거나 분노하기보다 뛰어난 적의 책략에 감탄하는 쪽을 택했다.
이런 방법이라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스파이를 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르뤼에는 한 터럭도 의심하지 않고 신뢰를 보내고 있었으니.
르뤼에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어딘가 비릿하나 웃음이었다.
“좋다, 어디에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첩보전 받아주겠노라.”
간계와 모략이 오가는 첩보전 역시 훌륭한 전쟁의 수단이다.
그리고 전쟁에 한해서라면 르뤼에는 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간사해 빠진 신시우를 매료시킨 이후 이중간첩으로 사용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적의 정보를 역으로 빼내다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다시 노예로 써주지.
“흠하하하! 음하하하!”
르뤼에의 사고방식은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꿈보다 해몽에 가까웠다.
그리고 기실, 엄청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실로 단순한데 아무리 희박한 가능성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간주한 채 행동하는 편이 더욱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장 신시우를 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무튼 램프에 초록불이 들어왔다는 것은 승조원들이 쓸만한 ‘노획품’을 발견했다는 소리다.
“질리지도 않고 새로운 일들이 펑펑 터지는 와중에 노획품이라니. 어찌 즐겁지 않을쏘냐.”
쿵쿵거리던 르뤼에의 발걸음은 어느새 깃털만큼이나 가벼워졌다.
2.
바다 밑으로 3,000M.
2도에 가까운 수온.
1제곱센티미터당 가해지는 압력은 무려 350kg.
빛 한 점들지 않는 자연의 조화 속에서도 생명은 살아간다.
반쯤 토사에 처박혀 기울어진 갑판 위에서 배를 둘러보고 있던 르뤼에는 사람을 보고도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는 작은 물고기의 코를 톡 두들겨주었다.
부리나케 도망치는 이름 모를 물고기.
그 주위로는 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노획한 물품을 아쿨라로 올려보내고 있었다.
“오랜만이로구나.”
풍랑만 몰아치면 속절없이 부서지던 대항해 시대라면 모를까,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빌딩 크기의 선박은 십수미터의 파도를 부수며 나아갔다.
지치지도 않고 군함끼리 싸워대던 세계대전이라면 모를까, 죄다 어지간해서는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강철 용골을 지니고 있어 굉침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나마 침몰하는 경우는 각국 인접한 해양에서 중소규모의 선박이 뒤집히는 경우인데 인명구조요 환경오염이오를 이유로 들며 재빠른 사후처리가 들어가버린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난파선을 찾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아쿨라가 발견하기도 전에 도로 인양해버리니 이는 온종일 바다만 들쑤시고 다니는 아쿨라에 최신 현세 물건이 거의 실리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흠….”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노획한 배는 심상치 않았다.
이런 배수량으로 감히 바다를 누빌 생각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중소형의 화물선.
가라앉은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보이는 멀끔한 모습에 일반적인 상선이라면 얼씬도 않는 도달 불능점까지 떠밀려왔다.
명백히 경로를 이탈한 화물선이 위성으로 감지됐을 것임에도 아무런 인도 절차가 없었다는 것.
다시 말해 모종의 절차나 협약에 의해 관리되는 선박이라는 의미다.
이런 선박은 두 부류다.
저기 못 먹고 사는 나라의 인간들이 먹고살려고 띄우는 해적선.
현세의 물품을 게헨나에 공수해주는 밀수선.
“밀수선이로구나.”
과장 조금 보탠다면 전설 속 보물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적인 상선이 ‘문’을 통과하려면 질량과 부피에 비례한 막대한 마력을 요구한다.
한낱 밀수꾼에게 그만한 마력이 존재할 리 없고 그렇다면 그 방대한 마력을 죄다 마력수로 때워야 한다는 말이다.
소모된 마력수 값을 제외하고라도 이윤을 남겨야 하니 자연스럽게 값비싼 사치품 위주로 선적될 수밖에 없다.
행여나 시답잖은 기성품이라도 주문한다면 적어도 수십 배의 값을 치를 각오는 해야 하고 말이다.
따라서 이름도 제대로 새겨지지 않은 배에선 답지 않게 온갖 호화로운 사치품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장인 3대가 한 땀 한 땀 짜냈을 것 같은 양탄자며, 온갖 고급술이며, 마법 연구에 소모되는 귀한 재료와 보석까지.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저 완드만 적당히 팔아치워도 이 밀수선을 10척은 일시금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르뤼에의 반응은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굉장히 먹음직스러운 과실을 베어 물었더니 풋내와 떫음만 잔뜩 올라왔을 때 같다.
“왜 하필 밀수선이냔 말이다.”
관리가 빡센 군함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폭풍을 만나 침몰한 현세의 상선이면 어디 덧나는가?
그랬더라면 조금이라도 흥미진진한 물건이 나왔을 텐데….
돈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스승과 함께 지내던 봉인된 왕국엔 추억과 더불어 막대한 재화가 묻혀있다.
석유 시추회사의 실물주식, 각종 기업에서 발행한 채권, 어마어마하게 쌓인 예술품까지.
시련만 완수한다면 항공모함은 무리더라도 최신 구축함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돈이 있다.
“작업이 끝나면 창고에 넣어두도록.”
더는 지켜볼 가치가 없다 판단한 르뤼에는 홀로 잠수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몇 시간 뒤.
함내에 들여 놓은 물건을 세척 및 건조했을 때였다.
3.
입바른 말을 꺼냈다 르뤼에의 분노를 사게 된 시우.
오지랖이다 못해 긁어 부스럼 만드는 일이었다.
딱히 그녀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어디까지나 구류되어있는 신세다.
살살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국에 그녀의 야망에 찬물 끼얹는 소리나 했다니.
하지만 후회는 없다.
시우는 르뤼에가 싫지 않았다.
가만 보면 쌍둥이를 떠올리게 하는 언행도 그렇지만 여태 만났던 공적에게 느껴지던 광기에 가까운 비틀림이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런 그녀가 어긋난 길로 나아간 끝에 물병자리의 마녀, 욕망의 마녀처럼 변하게 되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근신 처분을 내린 지 8시간이나 지났을까?
르뤼에는 시우의 객실로 와서 문을 두들기고는 외쳤다.
“빨리 와보거라! 어서! 어서!”
“네? 네?”
“머뭇거릴 때가 아니니라!”
그녀가 다시 왔을 땐 분명 진중한 대화가 오가리라 생각했다.
아니, 최소한 분노를 곱씹은 르뤼에의 질책이 쏟아지리라 예상했다.
르뤼에의 사고방식은 지극히 유치하다.
그야말로 제멋대로 자라온 공주님의 표상인 것이다.
“빨리! 빨리!”
근데 이게 웬걸?
가뜩이나 달리는 속도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걷는 와중임에도 르뤼에는 연거푸 재촉하며 시우를 앞질러갔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마주한 것은 로비에 나뒹구는 잡동사니.
“보이느냐? 방금 건져 올린 따끈따끈한 노획품이니라!”
조금 전의 앙금은 아주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는 듯 신이 나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르뤼에.
“노획품이라뇨?”
“난파선에서 건져 올린 물건이 아니겠느냐!”
혹여 그녀가 멀쩡한 상선을 상대로 해적질이라도 한 것은 아닐까, 내심 가슴이 철렁했던지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에게 새로운 임무가 내려졌도다! 이쪽을 보라!”
르뤼에는 양팔을 쭉 뻗어 어렵사리 노획한 최신 현대 물품을 가리켰다.
시우는 그제야 그 잡동사니에서 익숙한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란 TV, 각종 블루레이 디스크와 플레이어, 서라운드 스피커, 컴퓨터 기타 등등.
이번 수확은 막대했다.
높으신 마녀님들의 주문품인 만큼 완벽에 가까운 안전포장과 떨어진 컨테이너가 흙더미에 파묻힌 덕에 온전한 상태인 현세 물품 총 10종류를 건져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분류해 정리하고 용도를 짐에게 가르쳐주도록 하여라! 특히 이쪽에 쌓인 물건들을! 알겠느냐?”
“소인은 근신 중이었던 것 아니었사옵니까?”
“근신은 끝이다! 끝! 비상시국이니라!”
막대한 전리품을 얻은 르뤼에 앞에 노예의 말대꾸 따위는 화낼 가치도 없는 일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현대식 물품처럼 생긴 것은 신주단지 모시듯이 쌓아놓았으면서 그 수백 배의 가치가 있을 것이 분명한 보석 따위는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르뤼에가 현대 물품에 막대한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재차 확인했다.
저 구석에 처박힌 화물을 보아하니 밀수선임은 확실한 것 같은데….
누가 제 방에 영화관이라도 차리고 싶었던 걸까?
“우선 알겠습니다.”
시우는 아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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