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
1.
아쿨라에는 여러 여가시설이 존재한다.
자막도 없는 흑백 외국 영화를 볼 수 있는 영화실.
한눈에 봐도 시우보다 나이가 두세 배는 많은 게임기가 비치된 오락실.
르뤼에가 자랑한 적 외에는 들어간 적 없는 사우나 딸린 욕실까지.
그 중 르뤼에와 시우가 찾은 곳은 오락실이었다.
“어떠하느냐? 최첨단 과학 기술을 고작 게임에 사용할 수 있는 누켈라비 왕국의 저력이.”
“멋집니다!”
“음하하하!”
언제나 자신만만한 르뤼에가 골라잡은 게임은 핀볼.
놀랍게도 비디오 게임 형식이 아니라 파칭코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한 형식이었다.
좌우 버튼을 누르면 레버가 움직이며 구슬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 쏘아진 구슬이 각종 플리퍼에 부딪칠 때마다 추가 점수를 얻는다.
간혹 이벤트 구역에 들어가면 구슬의 위치가 랜덤하게 바뀌며 발사되거나 하는데 어쨌거나 구슬이 바 사이로 떨어지면 죽음인….
흔히 아는 핀볼이었다.
사실 최첨단 과학 기술이라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많았지만….
르뤼에의 상식은 거의 냉전 즈음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아마 그 당시에 견습마녀 시절을 보내며 외부를 돌아다녔기 때문이겠지.
“그대가 먼저 해보거라.”
“좋습니다.”
-뾰롱 뾰로롱
조악한 음향, 번쩍이는 조명과 함께 시작된 게임.
떨어지는 구슬을 딸깍딸깍 받아내고 있자니 한가지 궁금한 게 생겼다.
“폐하.”
“왜 그러느냐?”
“그러고 보니 소인이 남자인 게 신기하지 않으십니까?”
“무슨 의미더냐?”
그러고 보니 르뤼에는 남자 마녀의 존재를 보고도 단 한 번도 실험이라던가, 하다못해 마법을 보여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게헨나에서조차 그 소동이 났었는데 말이다.
“소인은 남자이면서 낙인을 지니고 있사온데 괘념치 않는 듯하여 여쭈어보았습니다.”
“…….”
왠일인지 르뤼에는 몹시도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이 체통에 맞지 않는다는 듯 조용히 답한다.
“그대 역시 마녀의 실험체이지 않느냐?”
“…네?”
“인체실험의 피험자라면 그대 나름의 상처가 있겠지. 그걸 헤집을 정도로 못난 군주는 아니니라.”
승조원처럼 개조된 인간이라는 식으로 오해를 산 모양이다.
엄밀히 말하면 케테르 공작의 실험체인가 싶은 느낌도 있지만 마녀가 되는 과정에서 딱히 트라우마랄 것은 없었다.
“그리고 짐은 스승께서 남긴 유산을 획득하기에도 벅차다.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 따윈 없느니라.”
불편하다는 듯 얼버무리며 화제를 전환하는 르뤼에.
이건 좀 감동이었다.
제멋대로이고 자기중심적이지만 의외의 부분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면모가 있달까.
이런 점도 쌍둥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게임에 집중하여라. 잊었느냐? 그대는 짐과 내기 중이니라.”
“알겠습니다.”
애초에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지닌 시우다.
대화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쳐낼 수 있는 것은 단 한번도 놓치지 않으며 게임을 이어나갔다.
“아차.”
문제는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어도 핀볼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곳으로 구슬이 떨어지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고득점이지 않을까?
“처음치고는 제법이구나. 비켜 보아라.”
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게임기 앞에 서는 르뤼에를 보자 자신감이 조금 죽는다.
“보거라, 짐의 능력을.”
-뿅!
우하단에서 쏘아진 구슬과 함께 시작된 게임.
르뤼에는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는 쇠구슬의 자취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주 섬세한 조작으로 구슬을 쳐내는 순간.
“짐의 승리니라.”
르뤼에는 승리를 확신한 듯 팔짱을 꼈다.
핀볼 기계에는 플리퍼가 존재한다.
한 번 구슬이 부딪치면 역으로 튕겨내는 기믹이다.
높은 점수를 주긴 하지만 무작위로 구슬을 튕기기에 게임오버가 될 수도 있는 핀볼의 최대 변수 메이커.
그러나 르뤼에 앞에서는 달랐다.
“일정한 타이밍에 일정한 구간으로 구슬을 보내면 영원히 게임오버 없이 득점할 수 있노라.”
-팅! 팅! 팅! 팅! 팅!
르뤼에의 말대로 쇠 구슬을 정확히 3개의 플리퍼 사이에서 튕기기를 반복할 뿐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물론 점수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오르더니 순식간에 시우의 기록을 뛰어넘었다.
“짐은 이 기술에 ‘마의 삼각지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떠한가?”
“대…대단하시네요….”
일종의 버그성 플레이긴 하지만 정확한 타이밍에 저 안으로 구슬을 밀어 넣는 것 자체가 곡예에 가까운 기술이었다.
그 밖에 비디오 게임인 팩맨, 잠수함 사격 따위가 있었는데 르뤼에는 하나같이 신기에 가까운 실력을 보여주며 클리어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달리 할 일이 없는 이 잠수함 내부에서 각각 몇천 번 넘게 플레이해온 고인물인 것이다.
“오래도록 단련된 솜씨니라. 어떠한가?”
“대단하십니다!”
약 2시간의 르뤼에 갈라쇼 이후.
어찌나 열심히 했는지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생긴 르뤼에는 이마에 흐르는 땀 한 방울을 상쾌하게 훔쳐내며 하얀 치아를 드러냈다.
심히 공감이 간다.
여지껏 아무도 혼자 열심히 하던 게임을 처음으로 자랑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하나하나 감탄 어린 추임새를 받고 있으니 르뤼에의 보조개는 지금껏 본 것 중 가장 깊게 패여 있었다.
“짐 역시 짐의 천재적인 실력이 때로 두렵노라.”
2.
식당을 들러 아이스크림 기계에서 아이스크림을 뽑고 2차로 향한 곳은, 포켓볼대와 다트판 따위가 설치된 몰트 바였다.
“기다리고 있거라. 놀기 좋은 의복으로 갈아입고 올 테니.”
한마디를 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르뤼에.
시우는 바 테이블에 기대 타이타닉 위스키를 홀짝였다.
아무리 잠수함이 크다 해도 일주일이나 지내다 보면 그 장소가 그 장소다.
내심 이런 협소한 장소에서 홀로 10년을 버틴 르뤼에가 대단해 보였다.
“훕…!”
다시 르뤼에가 돌아왔을 때 시우는 입에 머금었던 위스키를 절반 정도 뱉어내고 말았다.
왜냐하면 지엄하신 르뤼에 폐하께서 찰싹 달라붙는 뇌쇄적인 옷차림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록한 허리와 골반 라인이 도드라지는 검은 치마와 스타킹, 발목이 꺾일까 무서운 높다란 힐.
흰 와이셔츠에 둘러싸인 상체를 코르셋처럼 조이는 셔츠는 일견 여성용 사냥복 같기도 했고, 카지노를 돌아다니는 딜러 같기도 했다.
아무튼 최고다.
시선이 저도 모르게 셔츠를 슬며시 삐져나온 검은색 브래지어의 레이스와 가슴골에 머문다.
그러고보니 이제껏 르뤼에의 복장은 하늘하늘한 드레스거나 살짝 헐렁해 보이는 제복이었다.
옷을 들어 올리는 가슴의 존재감보다는 그녀의 성격과 행동에 집중되어 대충 쌍둥이와 비슷한 사이즈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원숙한 몸매, 거의 스승님과 비견될 것 같은 사이즈다.
시우가 시선 처리에 신경을 쓰는 동안 큐대를 쥔 르뤼에는 능숙한 손길로 초크질을 하며 당구대 앞으로 걸어왔다.
“짐은 포켓볼 솜씨도 세계 제일이니라. 칠 줄 아느냐?”
“예, 대학 다닐 때 조금 해본 적이 있사옵니다.”
한국에서야 3·4구가 주류지만 세계적으로, 특히 북미 쪽에서 유행하는 것은 포켓볼이다.
잘 친다고는 못해도 룰 정도는 숙지하고 있었다.
“좋다. 초구는 짐이 맡지.”
늘씬한 자태로 테이블 위에 상체를 누인 르뤼에는 부드럽게 공을 밀었다.
삼각형 모양으로 예쁘게 쌓여있던 공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두 사람의 대화에도 자연 물꼬가 트였다.
“대학이라 하였는데. 현세에 대해 잘 알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흐음…. 현세는 어떤지 이야기해 보거라.”
르뤼에가 시우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떤 것부터 해드리면 될까요?”
“가장 강대한 국가부터 털어놓아 보거라. 훗날 짐이 세계를 정복할 초석으로 삼을 수 있으니.”
간혹 이런 주제가 나올 때마다 르뤼에의 허무맹랑한 망상으로 치부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
그녀보다 한 위계 낮았던 비앙카조차 다른 마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홀로 세계 정복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격도 불가능한 무자비한 일격을 수백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 쏘아대는데다가, 극초음속 미사일마저 단순 비행으로 따돌리는 마녀를 어떻게 상대하란 말인가?
위계 간의 격차는 경지가 높아질 수록 가파르게 벌어진다.
모든 자성 마법을 제대로 계승 받은 23 위계 마녀가 현세에서 깽판을 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었다.
케테르 공작이 잠적한 지금 르뤼에가 ‘전쟁’을 일으킨다면?
지금이야 천진 무해해 보이는 르뤼에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손에 쥔 어린 폭군이 될 수도 있다.
“…혹시나 해서 그런데. 한가지 여쭐 수 있겠습니까?”
“윤허한다.”
“시련이란 걸 해결하시면 정말 전쟁을 일으키실 생각이신가요?”
“물론이다. 짐에겐 뼛속부터 지배자의 피가 끓고 있느니라.”
“왕사께서도 같은 생각을 하셨나요?”
돌연 진지해진 말투에 르뤼에는 공을 치다 말고 멈칫한다.
“스승께서는 케테르 공작을 두려워하였느니라. 야망을 떨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지. 선대의 못다 한 꿈을 짐이 이루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많은 마녀가 반발할 것입니다.”
“잡것들이야 모두 수장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심해의 마녀는 엄밀히 따지자면 공적이 아닌 추방자일터.
추방자와 공적의 분류가 모호한 경향이 있지만 르뤼에의 발언은 명백히 공적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만약 그녀가 다짐한 바를 실행으로 올린다면 찾아올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그녀는 현세에 치명적인 피해를 끼칠 것이고, 위치포인트의 마녀들이 좌시하지 않고 찾아오겠지.
르뤼에의 장담대로 그저 그런 대마녀 수준은 피해를 끼칠 수 없겠지만 사태가 심각해지면 결국 스승님이 찾아올 것이다.
르뤼에와의 인연이 짧긴해도 죽거나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기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폐하라도 토벌을 위해 몰려드는 마녀를 모두 상대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공적으로 지정되실 거고요.”
“무엄하다!”
르뤼에는 큐대를 쾅 내려놓으며 서슬 퍼렇게 소리쳤다.
“발칙하게도 짐의 신위와 웅대한 계획에 의구심을 품는가!”
“전쟁은 무고한 사람을 죽게 만드는 일입니다. 폐하께서 죽거나 다치는 일도 원하지 않습니다.”
“감히….”
르뤼에가 분개할 무렵.
이번에는 붉은색이 아닌 초록색의 램프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뭔가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콧김을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던 르뤼에는 뾰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망발을 입에 담은 그대의 처우는 미뤄두겠노라. 숙소에서 근신하도록 하거라.”
르뤼에는 발을 쿵쿵거리며 몰트 바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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