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
1.
당직인 다섯을 제외하고 모인 스무 명의 승조원과 한 명의 노예, 그리고 한 명의 여왕님은 성공적으로 끝마친 모의 훈련의 자축 파티를 열었다.
거의 20분이나 이어진 르뤼에의 일장연설 뒤에는 각기 테이블에 차려진 만찬을 만끽하는 시간이었다.
르뤼에가 호언장담 했듯 오늘의 메뉴는 심상치 않다.
끓는 버터를 몇 번이나 끼얹어 바삭바삭하게 익은 새끼 돼지 통구이.
얇게 썬 소고기를 채소와 함께 볶은 뒤 스프에 넣어 졸여낸 비프 스트로가노프와 곁들여 나온 매쉬 포테이토.
호밀과 밀을 적당히 섞어 구워낸 흑빵.
다진고기와 과일퓨레로 안을 채운 피로기.
그리고 신선한 열대과일 한 보따리까지.
군침이 절로 도는 식단은 평소 아쿨라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도 그럴게, 죄다 지상에서나 구할 수 있는 식재료였으니 말이다.
제머나이 저택에서 머물며 자연스럽게 입맛이 고급이 된 시우는 오늘 식사로 올라온 식재료가 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정작 르뤼에가 승조원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한 숟가락도 들지 못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저편에서 즐거운 듯이 웃는 르뤼에의 모습을 보자 참 많은 생각이 든다.
일전 비겁의 마녀와 겨루게 된 이후 소피아 수석 교수가 집필한 사역마 관리 개론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서 기술하길, 높은 지능을 지닌 개체를 사역마로 삼을수록 오히려 인지능력과 감정처리 능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특히 인간은 다른 생물보다 교감신경계의 시냅스 양상이 복잡 다변하다.
따라서 특수한 자성마법을 지닌 특정 마녀를 제외하면 감정 인지 능력 자체가 소실된다는 것이다.
그말인즉, 르뤼에가 승조원과 하는 모든 행동은 인형놀이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어차피 저들은 르뤼에에게 어떠한 충성심도, 존경도 갖지 못할 테니 말이다.
르뤼에에게 모종의 애잔함을 느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드넓은 잠수함 속에 그녀 홀로 외로이 지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가설이 정말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시우에게는 기계장치처럼 구는 승조원들도 상대가 르뤼에가 되면 뭔가 분위기가 변한다고 할까?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시리에게 다정한 말을 자주 해주니 감정이 생겼다’와 다를 바 없다.
단순히 기존 알고리즘에 새로이 학습된 패턴이 더해져 그럴듯한 상호작용을 보이는 것이겠지.
10년 넘게 함께 했다면 제법 잘 맞는 알고리즘이 짜였을 것이고 말이다.
딴 생각을 하는 동안 모든 승조원의 공훈을 치켜세워준 르뤼에는 상석에 털썩 앉으며 식기를 집었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느냐?”
“제가 어찌 폐하보다 먼저 식사하겠습니까.”
“흐음! 그럴 것 없다! 오늘처럼 기쁜 날엔 눈치 보지 말고 맘껏 들도록 하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랜만에 먹는 육지 음식이라 그런지 하나하나가 입에 쫙쫙 달라붙는다.
특히 입안에서 사르륵 녹는 돼지고기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모든 음식을 맛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마지막 피로기를 베어 물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오는 르뤼에.
“어떠한가? 아나스타샤 조리장의 실력이. 좋지 않으냐?”
참고로 승조원의 이름은 모두 여자 이름인데 본명이 너무 칙칙해 르뤼에가 모조리 새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아주 훌륭합니다.”
“처음에는 통조림밖에 못 따는 녀석이었느니라. 짐이 손수 요리책을 하사하고 숙달하도록 명령을 내렸지.”
그녀는 저 반대편에서 잡담 하나 않고 식사를 이어나가는 승조원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식을 보는 인자한 어머니의 눈빛이다.
“아나스타샤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처음엔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꼭두각시 같은 녀석들이었느니라. 하지만 짐의 위엄과 카리스마에 매료되어 이제 와선 진심으로 섬기고 있지.”
“그렇군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답답한 녀석들이지만 누켈라비 왕국의 일원이다.”
가슴을 펴며 말하는 르뤼에에게서는 자부심과 긍지가 느껴졌다.
겉보기엔 어찌 보일 지 모르겠지만 본인이 행복하다면 된 게 아닐까?
얼핏 그런 생각이 스쳤다.
2.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처음에는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던 너저분한 창고였지만 하루 10시간씩 꼬박꼬박 정리에 투자한 결과 그럴 듯한 성과를 보이게 되었다.
“벌써 창고를 다 정리하다니. 근면 성실한 노예로구나.”
보기 좋게 정리된 보물창고에 들어선 르뤼에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노고를 치하했다.
참고로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을 한껏 편 채, 턱을 추어올린 저 자세는 르뤼에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포즈이다.
“여기 물품 목록을 작성해 두었사옵니다.”
“흐음….”
르뤼에는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 정리하더니 단안경을 척 쓰고 목록을 살폈다.
어쩐지 성과 검토를 받는 듯한 긴장감에 괜히 숨을 죽이고 있자니.
“호오?”
지극히 의외라는 시선이 시우를 향한다.
“아주 잘 정리해두었다. 짐에게 이렇게 많은 보석이 있는 줄 몰랐느니라.”
하지만 생각보다 칭찬이 대단치 않다.
어린 아이 일기장 수준이었던 기존 기록에 비하면 깜짝 놀랄 수준의 정교한 정리라고 생각했는데.
르뤼에는 보기 좋게 보석을 진열해 둔 공간을 힐끗 보고도 별다른 감탄을 하지 않았다.
“혹여 소인이 미진했던 부분이 있사옵니까?”
“아니다. 그대는 맡겨진 책무에 온 힘을 다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르뤼에의 특성상 겉치레라는 걸 알아차리긴 어렵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던 르뤼에.
“…금은보화는 어차피 반짝반짝하고 끝이어서 재미가 없느니라.”
“아.”
눈치밥 세월 도합 5년.
다소 시큰둥한 르뤼에의 리액션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알아차렸다.
애초에 단순 정리 작업이라면 어인을 시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굳이 현대인인 노예를 데려와 창고를 정리하게 한 이유.
그것은 현대 문물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원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시우는 눈앞에서 번쩍이는 금덩이들에 정신이 팔려 당연히 그것들 정리를 우선시했고, 바다 쓰레기에 가까운 현대 물품에 대해서는 달리 신경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놓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르뤼에가 실망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이다.
“그대의 다음 병과를 생각해봐야겠구나. 그간 고생 많았다. 오늘은 조금 일찍 쉬도록 하여라.”
“황송하옵니다.”
그 길로 객실로 복귀.
침대에 누운 채 간만에 뒹굴거리는 중이다.
마냥 뒹굴거리는 건 아니고 그간 얻은 정보를 종합 탈출 계획을 생각 중이다.
먼저 르뤼에와 어느 정도 친분을 쌓는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외부 연락이나 돌아가고 싶다는 등의 의사표현은 하지 않았다.
르뤼에가 무섭다기보다는 타카쇼가 지나가듯이 했던 조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싶으면 한 방에 끝내는 게 베스트야. 사람 마음이라는 게 거절하는 입장이 되어도 어느정도 불쾌감과 부담이 쌓이거든. 되지도 않는 부탁을 자꾸 하다 보면 결국엔 설득 자체에 부정적인 감정이 전이되는 거지.
그러니까 확실하다 싶은 타이밍에, 단 한 번의 부탁으로 통과하는 게 최선이다 이 말이야.’
로즈 글래스에서 알바를 뛸 때 술김에 나왔던 말인데, 일리 있구나 싶어 적극 참조 중이다.
따라서 당장 탈출보다는 잠수함의 사정과 르뤼에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선대 누켈라비는 무시무시한 옛 마녀일지 몰라도 제 견습마녀를 아끼는 신중한 인물이었다.
르뤼에가 ‘시련’을 극복하기 전까지 모든 외부 활동을 금했으며, 심지어 유산이 남아있는 심해 왕국마저 봉인해버렸다고 한다.
그 유언을 따르기 위해 르뤼에는 외부와 교류를 일절 하지 않은 채 이 공방에서 마법 연구를 하고 있으며, 호기심을 보이는 것과 별개로 외부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다른 마녀나 밖의 이야기를 넌지시 흘리면 곧장 목소리가 경직될 정도로 말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학습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엔 친밀도가 부족하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시우의 지상과제는 어떻게든 르뤼에의 신뢰와 친애를 사는 것이었다.
“흐음….”
이하 그에 대한 분석 및 대책.
르뤼에는 왕성한 호기심과 더불어 무료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세계관 설정에 따르면 노예인 시우에게 툭툭 말을 걸어오거나 꽤 오랜 대화를 지속하는 것을 보아 심심함을 느끼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르뤼에를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신뢰 관계를 구축한 뒤 탈출을 도모하는 것.
이게 가장 최선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라면 나름의 경험이 있었다.
의욕 제로인 디아나를 데리고 다니며 놀이 선생 역할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이래서 경력직을 선호하는 건가?”
새삼 게헨나에 엮이게 된 이후 별의별 일을 다 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르뤼에를 찾았다.
3.
르뤼에는 마법 서고에서 제 허리 높이까지 쌓인 마법서에 걸터앉아 공부 중이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기도 했기에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대의 말은…. 짐의 광대가 되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며 유희를 제공하겠다. 그것이 광대의 소임이 아니면 무엇이냐?”
그녀를 찾자마자 완곡한 제안을 했고, 그에 따른 반응이다.
르뤼에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뚝을 톡톡 두드리며 숙고를 이어나갔다.
꽤 길게 이어지는 침묵이지만 솔직히 대답이 벌써 들린다.
제안을 듣자마자 그녀의 눈빛은 별이 쏟아지는 것처럼 반짝거렸으니 말이다.
“흠, 짐은 왕국의 정사와 마법 연구로 바쁜 몸이다. 노예에게 광대의 직책을 쥐여주면서까지 유희에 할애할 시간은 없느니라.”
번역기를 돌려 르뤼에어를 번역하자면, ‘이대로 고개를 끄덕이기엔 체면이 안 서니 조금 더 그럴 듯한 이유를 들어 부추기거라’ 정도가 되겠다.
“지당하신 말씁입니다. 허나 적당한 휴식은 작업 능률 향상에 도움이 되기 마련입니다. 유희 역시 휴식의 일환이며 이는 폐하의 치세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흐음….”
르뤼에는 그 정도면 됐다는 양 듯 고개를 주억였다.
만약 꼬리가 있다면 파닥파닥 거릴 기세로 벌떡 일어선 르뤼에.
“현명한 군주란 가장 낮은 존재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자이다. 비록 그대가 노예의 신분에 불과할지라도 충심 어린 조언은 잘 들었느니라.”
“황송하옵니다.”
“당장 업무를 수행하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일주일 만에 노예에서 광대로 승진하게 되었다.
승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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