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
1.
“또 나왔네.”
시우는 구석에 있는 낡은 궤짝을 끌어내 뜯었다.
허름한 겉모습과 달리 이번에도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금은보화.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여기 쌓인 물품 중 대략 절반 정도가 오래된 난파선의 보물이기에 이제 와서 별로 신기할 것도 없었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현대의 것과 비교하면 다소 투박한 느낌이 강한 금괴, 보석으로 장식된 술잔 혹은 단도, 다양한 형태로 금은화, 보석 및 장신구 등등.
적게는 수kg에서 많게는 수십kg은 되는 보물이 아무렇게나 쌓여있곤 하는 것이다.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니 순도는 떨어지겠지만, 이 정도 양이라면 녹여서 판매한다고 해도 적잖은 금액이 나올 것 같다.
거기에 골동품 특유의 역사적 가치 따위가 더해진다면 얼마나 더 비싼 값을 받게 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어디보자….”
시우는 종이를 팔락거리며 르뤼에가 손수 작성한 듯한 물품 목록을 살폈다.
<2015.05.02,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해역, 보물 상자, 알록달록한 나무 궤짝, 중간>
둥글둥글한 글씨체로 작성된 목록에는 취득 시각, 위치, 내용물, 모양, 사이즈가 적혀있다.
보다시피 굉장히 대충 정리해 둔 수준이라 시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고치듯이 새로운 목록을 작성 중이다.
적어도 재질, 무게, 종류별로 나누어서 말이다.
뭐가됐건 2회차는 1회차보다 능숙하기 마련이다.
다소 다른 환경의 놓여있을지라도 축적된 경험과 연륜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노예 생활은 굉장히 순조롭고 완만하게 이루어졌다.
청소 노예에서 창고지기 노예로 승격한 지 어언 3일.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지만 그래도 심해의 마녀, 르뤼에 누켈라비에 대해 그리고 이 함의 사정에 대해 얼추 알게 되었다.
공식 명칭이 ‘전략유도탄 잠수중순양함 프로젝트 941 아쿨라’, 줄여서 대충 아쿨라라고 부르는 이 잠수함은 선대 누켈라비가 르뤼에에게 생일 선물로 준 공방이다.
여기에 탑승한 승조원 역시 실제 복무하던 소련 군인으로 선대 누켈라비는 상당히 무자비한 마녀였는지 이들을 모두 어인이자 사역마로 변신시켜버렸다.
물론 정황상 그렇다는 거지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잠수함이 르뤼에의 수중에 들어왔으며, 이 승조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누켈라비 왕조의 일원이 되었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다만 확실히 확인한 것이 있다면 확실히 사역마의 지능은 알고리즘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 정도.
종종 마주치는 승조원에게 대화나 상호작용을 시도해보았지만 기계적인 행동과 대사만 반복할 뿐 제대로 된 교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게 정상이긴 하다.
본디 사역마란 창조의 마녀가 만든 호문쿨루스를 제외하면 까마귀 정도의 지능이며, 더군다나 인간을 불로 불사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 부분의 인지능력을 제한해야 하니 말이다.
도리어 아쿨라의 승조원은 기계 장치의 유지 보수 및 운용이라는 고차원적인 행위가 가능한 점과 르뤼에에 한해 그나마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것을 보아 꽤 높은 수준의 사역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네.”
궤짝 하나 분의 목록 작성을 클리어하자 어언 1시.
시우는 창고를 나서 식당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르뤼에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하다.
이렇듯 르뤼에는 상당히 살가운 편이었다.
여왕을 자칭하는 것치고는 노예에게 침실 바로 옆의 창고지기를 맡기고, 친히 말을 걸고, 심지어 식사까지 함께하다니.
세세한 부분을 따지자면 여러모로 이상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도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앞서 말했던 사역마의 지능은 ‘대화’는 가능해도 그를 통한 ‘감정교류’를 느끼기는 쉽지 않은 수준.
줄곧 이 잠수함에서 홀로 지내던 르뤼에는 외로웠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던 중 만나게 된 시우의 존재는 처음 사귄 친구 같은 느낌이 아닐런지.
일하고 있으면 옆에서 기웃기웃거리거나, 괜히 말을 걸거나, 한번 대화가 시작되면 끝도 없이 대화를 이어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본인은 죽어도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말이다.
“…….”
예상대로 식당에 들어서자 르뤼에는 자기 스푼으로 캐비어를 뒤적이고 있었다.
르뤼에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척 힐끗 곁눈질하더니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테이블에는 시우의 몫까지 제대로 식사가 챙겨져 있다.
“편히 앉거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 슬슬 입에 익어가는 사극 체로 공손히 인사를 하고 옆에 앉았다.
“망극하지. 이 드넓은 바다의 지배자인 짐과 같은 자리에서 식사할 수 있다니. 일개 노예에게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얻어 싶은 행운인 것이니라.”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테이블 위에는 갓 만들어낸 듯한 진수성찬으로 넘쳐난다.
참고로 이 잠수함의 메뉴는 디저트 정도를 제외하면 예외 없이 해산물로 조리장이 직접 바다로 나가 잡아온다.
“들거라.”
르뤼에의 허락을 받고 조금씩 요리를 입으로 옮겼다.
“맛이 어떠한가?”
“매우 훌륭합니다.”
“흠….”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짓는 르뤼에.
이럴 때는 아부 함량을 조금 높여주면….
“폐하의 은혜를 입은 요리인데 조개껍데기인들 맛이 없겠습니까?”
“흐으음!”
곧바로 즐거워진 르뤼에 완성이다.
이렇게만 보면 이미 조교 완료다.
슬슬 분위기를 봐서 걱정하고 있을 연인을 위해 연락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면 적당히 끝나지 않을까? 싶겠지만.
이렇듯 허술한 방심이 피어나면 억지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이 배의 승조원만 봐도 알 수 있겠다.
선대 누켈라비는 추방자 마인드가 탑재 완료된 마녀였다.
그뿐 아니라 심연을 구현해 인간을 사냥해 마력을 충전케 하는 ‘다곤의 피리’ 역시 그녀의 것.
그런 마녀 아래서 세월을 보낸 르뤼에의 가치관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까지 시우에게 르뤼에는 순해 보이는 사자였다.
지금은 비위를 맞춰주고 있으니 흡족해하지만 수틀리면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
“업무를 꼼꼼히 보더구나.”
아무튼 아직까지는 원활히 관계를 개선 중인지라 아주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을 뿐인데 여지없이 르뤼에 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어느 안전이라고 도맡은 책무를 허술이 하겠습니까. 신의에 보답하며 위대한 누켈라비 왕국에 봉사할 뿐입니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간드러진 아부를 해주면 르뤼에가 좋아죽는, 일종의 콩트 같은 느낌이긴 하다.
“호오, 역시 남자면서 마녀가 된 자답게 현명하구나. 이 누켈라비 왕국의 위대함은 굳이 말할 것도 없느니라.”
그리고 신이 난 르뤼에는 추가로 장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역사는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자를 대왕이라 칭송하지. 그러나 그 호칭은 무지함에서 오는 착각이다. 그대가 알고 있는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왕이 누구더냐.”
“음, 대영제국 시절 여왕이나 칭기즈칸….”
시우는 르뤼에의 표정으로 부터 딱히 그녀가 진지한 정답을 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시옵소서.”
르뤼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세계의 지표면은 70%의 바다와 30% 육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느냐?”
“그렇습니까?”
“실로 그러하다. 그리고 모든 바다는 짐의 영토지.”
그런가?
떠오른 의문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북극해부터 남극해까지 이 드넓은 바다를 모두 통치하고 있는 나 르뤼에 누켈라비야말로 만민이 우러러보아야 마땅할 가장 위대한 대왕이니라!”
“역시 폐하십니다.”
르뤼에는 흥분한 듯이 콧김을 뿜으며 일장연설을 이어나갔다.
“그대에게만 알려주도록 하지. 지금 이 순간조차 짐은 천천히 세상을 정복하고 있느니라.”
“네…?”
돌연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상을 정복한다.
사정을 모르는 이에게는 허무맹랑한 망상으로 들리겠지만 심해의 마녀에게는 그럴 힘이 있다.
적어도 같은 마녀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현세의 그 어떤 병기도 르뤼에를 멈춰 세울 수 없다.
케테르 공작의 유고가 확정되며 혼란스러운 현세.
미쳐 날뛰는 공적 중 하나에 르뤼에가 포함된 것은 아닐까?
그녀가 입에 담은 ‘정복’이라는 단어에는 그런 불길한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같이 보낸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그녀를 향한 신뢰가 두터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변의 안전문제와 별개로 그녀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중이다.
“그리 놀랄 것 없다. 자세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30년간 해수면은 연평균 3.12mm씩 상승 중이니라.”
“…….”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더욱 많은 영토가 짐의 휘하에 들어오겠지. 이렇듯 하늘조차도 짐의 통치가 오대양을 넘어 대륙까지 펼쳐지도록 협조 중이니라!”
“대단하십니다!”
다행히 별거 아니었다.
르뤼에의 호방한 웃음에 안도하며 그녀를 편한 마음으로 치켜세웠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 물을 것이 있도다.”
웃음을 멈춘 그녀는 다시금 캐비어를 푹푹 퍼먹으며 물었다.
“예, 무엇이든.”
“케테르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더냐?”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자세한 정황에 대해는 알지 못한다는 뜻이로고.”
“예, 저 역시 전해 들은 것이 전부인지라….”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르뤼에.
“케테르의 시대가 갔으니 더더욱 짐의 시대가 오겠구나. 스승이 남겨준 시련만 해결한다면 더욱 높은 곳까지 날아오르리라.”
“시련이요?”
“궁금하느냐?”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털어놓는 르뤼에.
“견습마녀가 낙인을 계승하면 완벽하게 활용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알고 있느냐?”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게헨나 내의 속 편한 마녀라면 몰라도 짐과 같이 현세에 머무는 마녀에게 그 유예 기간은 치명적이니라. 물론 짐이라면 능히 위험을 넘어설 수 있겠으나 만에 하나가 있지 않느냐? 짐의 스승은 그것을 위한 안배를 준비해 두었다.”
그러니까 그 시련이 뭐냐고 물으려는 그때.
식당 한편에 사이렌 램프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번뜩이는 붉은 조명이 위협적으로 빛나자 만족스러운 식사 이후 풀려있던 르뤼에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습격이다. 그대도 따라오너라.”
“네? 습격이요?”
난데 없이 습격?
허둥지둥하는 시우였으나 르뤼에는 제대로 대답도 해주지 않고 달리듯 조종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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