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24화 (524/917)

#524

1.

세 걸음쯤 앞서 위층으로 올라가던 르뤼에는 실로 여왕의 품위가 넘치는 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치곤 신입 사원에게 사수가 말하는 것 같은 내용이었지만.

“하루 일해보니 어떠하느냐.”

“현재까지는 어려운 것이 없사옵니다.”

끽해야 청소나 열심히 하라는 지시를 받고 복도를 광내던 것이 전부다.

그마저도 일을 찾아서 한 격.

벌써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순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주의 사항에 대해서는 들었느냐?”

“송구하게도, 듣지 못하였사옵니다.”

르뤼에는 그런 것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떠벌떠벌 말을 이었다.

“사다리로 내려갈 수 있는 하부 기관실에는 원자로와 마력로가 있으니 절대로 들어가지 말도록. 또한 외부의 컨트롤 콘솔도 건드리지 말아야 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대도 짐작하겠으나, 짐의 공방이자 왕국인 아쿨라는 전무후무한 규모를 지닌 로망 넘치는 초거대 잠수함이니라. 전장 172M, 함폭 23M, 수중 배수량이 얼마인지 아느냐? 무려 48,000톤이니라. 48,000톤!”

굉장히 들뜬 목소리였다.

살짝 장단을 맞춰줄까?

“서, 설마! 이렇게 큰 잠수함이 존재하다니! 소인은 들어본 적도 없사옵니다!”

작은 티아라가 왕관처럼 얹혀진 르뤼에의 뒤통수가 우뚝 멈췄다.

휙 뒤를 돌아본다.

그 표정이 ‘이렇게 반응해 준 건 네가 처음이야!’ 같다는 건 순전히 착각에 불과할까?

그녀는 신중하게 시우의 반응을 살피듯이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말한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OK-650 가압수형 원자로를 개조하여 출력원으로 사용하느니라.”

“설마… 핵잠수함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듯 턱을 떠는 리액션도 해주자 희열을 느낀 것처럼 바들바들 떨리는 르뤼에의 어깨.

“대단할 것도 없다. 이만한 규모의 잠수함 전력을 원활히 공급하려면 원자로는 필수 불가결이니라.”

“이럴 수가…. 믿기지가 않습니다.”

“본디 160명의 승조원이 탑승하여야 하지만 시스템의 자동화를 통해 짐의 슬하에 있는 25명의 정예 승조원만으로 운용할 수 있으니라.”

“이렇게 거대한 잠수함을 불과 25명이…! 이런 훌륭한 왕국에서 노예로 복무할 수 있다니 폐하의 크나큰 은덕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르위에는 그전의 앙금 따위 모조리 잊어버렸다는 듯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빛냈다.

“안 되겠군. 그대에게 아쿨라는 조금 더 자랑, 아니. 소개해주어야겠군. 따라오너라.”

“영광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잠수함 투어.

대충 장례식을 훔쳐볼 때 예상이야 했다만 그 어마 무시한 규모에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헨나의 인테리어처럼 아주 세련된 느낌은 없지만, 결코 소소하다고는 말할 수 없게 장식된 온갖 방들.

시우가 밀대로 청소하던 복도가 기능을 위해 편의를 포기했다면 그녀의 생활 공간으로 보이는 위층은 본디 잠수함에서 즐길 수 없는 온갖 호화를 모아놓은 느낌이다.

르뤼에는 시우를 앞서 가며 마치 복덕방 아주머니처럼 왕국을 자랑하기 바빴다.

먼저 술병을 쌓아놓은 선반을 성벽처럼 두르고 있는 긴 테이블.

아무래도 ‘바’라는 특이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유행에서 뒤처진 디자인과 조명임에도 클래식함이 진하게 느껴진다.

“왕국의 자랑 중 하나인 몰트 바이니라. 지금은 맛볼 수 없는 온갖 진귀한 위스키들이 모여있노라.”

하지만 근사한 조명 안에 진열된 술병은 클래식해도 너무 클래식하다.

라벨 디자인이 옛스러운 것은 그렇다 쳐도 라벨이 해지거나 병에 잔 상처가 너무 많아 불투명한 것도 많이 있었다.

차라리 골동품에 가까울 지경.

“여기도 너무 멋지군요! 하나같이 대단한 명주인 것 같습니다!”

“오바하지 말거라.”

“넵.”

역시 너무 티 났던 걸까?

르뤼에는 본심을 가린 공치사를 정색으로 떨쳐냈다.

말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살짝 전전긍긍하던 차, 르뤼에가 말을 이었다.

“여기에 진열된 술들은 하나같이 난파선에서 건져낸 것이다. 본디 술이란 보관기관에 제약이 따르지만 바다의 수압과 적정한 온도에 의해 하나같이 훌륭한 상태로 숙성된 것이지.”

르뤼에는 바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술병 하나하나 꺼내 보였다.

솔직히 병 모양과 상태만 봐서는 대충 참기름 담아놓는 병처럼 생겼지만….

“이쪽은 120년 된 꼬냑, 이쪽은 140년 된 리큐르. 그리고 이쪽은… 그대도 알 법한 타이타닉에서 발견되었던 위스키니라.”

그제야 시우도 이 바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이 바에는 단순히 오래된 술을 전시하는 것이 아닌 이제는 다신 구할 수 없는 꼬냑과 역사를 담은 위스키들이 진열된 것이다.

“오….”

진심 어린 감탄에 르뤼에는 그제야 만족한 모양이다.

“무릇 현명한 왕이란 달콤한 아부를 멀리해야 하는 법. 그러니 얄팍한 말로 짐을 기쁘게 할 심산은 접어두거라.

그대가 공연히 띄우려 하지 않아도 짐의 위대함은 그대가 진심어린 감탄을 뱉게 할 터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는 얄팍한 칭찬에 너무도 기뻐하던 르뤼에지만 아무래도 좋다.

요즘 건더기도 제대로 건져내지 못하는 조악한 포도주만 마셨던지라 그 타이타닉에서 발견된 위스키 맛이 어떤지 호기심이 솟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술맛을 보는 일은 없었다.

르뤼에는 한시가 바쁘다는 듯 술을 다시 진열해 놓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으니까.

“이곳은 왕국의 중앙 욕장이니라. 믿어지느냐? 잠수함에 욕장이 있다는 사실이.”

어째 좀 들어선 장소가 습하다 했더니 욕장이었다.

“짐은 이곳에 몸을 덥히며 올바른 정사(政事)에 대해 숙고하느니라.”

욕장 자체는 별 볼 일 없었다.

깔끔하고 깨끗하긴 해도 레바나 대욕장까지 갈 것도 없이 쌍둥이네 개인 욕조 선에서 컷 되는 정도.

하지만 근사한 사우나실까지 딸려있는 것은 꽤 컬쳐쇼크였다.

잠수함은 철저한 금욕 생활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마법의 힘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원래 과학기술이 이 정도는 받쳐주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밖에도 극장, 오락실, 수만 권의 마법 장서가 비치된 도서관, 식당 등을 안내해준 르뤼에.

이 정도면 작은 상가 한 채를 통째로 욱여넣었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의 시설들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대가 해주어야 할 일을 보여주겠노라.”

잠수함 투어의 마지막 코스는 아무래도 이 거대한 나무문인 모양이다.

그럴듯한 장식으로 꾸며진 문은 척 보기에도 가장 큰 공을 들인 것처럼 보였다.

르뤼에가 앞에 서자마자 저절로 열리는 방문.

그 뒤로는 여태껏 보았던 어떤 방보다 큰 규모와 높은 천장을 자랑하는 그녀의 침실이 보였다.

“…….”

뜬금없이 침실? 이라고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왜냐하면 침실의 천장과 양 벽면으로 어두컴컴한 우주 같은 어둠이 고스란히 비쳐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우는 그것이 심해의 정경임을 알아차렸다.

한 치 앞도 분별할 수 없는, 빛 한줄기 닿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심해란 정말 우주와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야 깊은 곳이니 그저 그래도 조금만 빛이 들어오는 바다로 향해도 환상적인 풍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답지 않느냐? 특수 연금을 통해 내부에서 외부의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느니라. 아무튼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니 계속 따라오도록 하거라.”

하지만 침실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었던 듯, 르뤼에는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침대와 호화로운 가구를 지나쳐 그녀의 침실을 지나치자 침실과 곧장 연결된 또 하나의 방이 있었다.

“이곳은 짐의 가장 진귀한 보물이 놓여있는 곳이다.”

르뤼에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곤 천천히 문을 열었다.

눈 부신 불빛이 흘러나오는 그곳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온통 하얀 타일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은….

“그대의 책무는 이 안에 있는 물건의 가치를 판가름하는 것이니라.”

잡동사니.

잡동사니 그 자체.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기계는 물론이오,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쭈글쭈글한 잡지, 도자기, 첨단 기기의 일부처럼 보이는 반쯤 타들어 간 무엇인가.

도자기, 세탁기, 아예 궤짝 채로 놓여있는 금속 따위 등등.

르뤼에가 직접 말하지 않았음에도 시우는 이 물건들의 출처가 어딘지를 알 수 있었다.

바닷속이겠지 뭐.

그래도 건져 올린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둔 것은 아닌지 매우 깨끗하게 세척 및 건조가 이루어진 상태다.

“짐의 취미 중 하나는 바다에 파묻힌 보배를 건져 오는 것이니라. 여기 모인 물건들도 죄다 그런 식으로 모인 것이지. 허나 짐은 현세의 지식이 적다. 그러니 내일부터 이곳으로 출근해 물품의 가치를 평가하고 분류해 목록을 작성하도록 하거라.”

솔직히 시우도 모르는 잠수함의 스펙을 줄줄이 읊던 그녀가 현세의 지식이 적다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청소 업무와 병행하는 것이옵니까?”

이제 슬슬 익숙해져 가는 사극체로 말하자 손을 휘저으며 답하는 르뤼에.

“그건 됐다. 아쿨라에는 자동으로 위생을 유지하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느니라. 공기도 이렇게나 맑지 않은가? 이는 청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책무다. 신중을 기해 임하도록 하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시우의 병과는 하루 만에 복도 청소에서 창고지기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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