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23화 (523/917)

#523

1.

포승줄에 묶여 심해의 마녀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어차피 반항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분위기고, 도망쳐봐야 도망갈 곳도 없다.

좌표이동식을 쓰려면 한 번 가보았던 곳, 혹은 육안으로 식별되는 장소여야 하는데 이곳은 심도도 알 수 없는 바다 한가운데니….

그나마 대화를 나눌 여건이 되었다는 점에서 안도를 느끼고 있었다.

회전식 안락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심해의 마녀는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명했다.

사실 내리깔았다고 해도 위엄이 넘친다기보다는 하이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허락이 떨어지고 비로소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빛에 비치어봐야 간신히 푸른색이 섞였음을 알 수 있는 세련된 흑발.

청옥처럼 짙고 푸른 눈동자와 예쁘게 휜 눈꼬리.

여기에 자기주장이 강하게 위로 뻗은 눈썹이 더해지자 강렬하게 각인되는 마이웨이의 인상.

태생은 귀여운 인상이나 위엄을 두르기 위해 안간힘을 쓴 느낌이다.

“이름이 무어냐.”

“신시우라… 하옵니다.”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투에 맞춰 대충 사극 체로 답했다.

잠깐 들었던 고개를 냉큼 내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녀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라면 나름 자신 있다.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면 펼쳐지는 것은 지뢰밭 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 신시우, 네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폐하의 신하를 해치게 된 점에 대해 깊게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이 자리에서 제 목숨을 취하신다고 해도 마땅히 치러야 할 속죄라 여기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입 꾹 다물고 모든 오해를 품고 가라는 것은 아니다.

단락적인 부분에 불과하지만 관찰한 그녀의 언행을 토대로 정보를 종합한다.

우선 그녀는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

마녀는 불로 불사의 존재, 겉보기만으로는 몇 살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많은 마녀를 상대하다 보면 언행이나 분위기를 통해 성숙한 마녀인지, 혹은 승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녀인지 구별할 수 있다.

가령 샤론과 제머나이 백작은 외양으로는 나이가 비슷하지만, 분위기가 전혀 다르지 않은가?

시우가 짐작하기에 눈앞의 마녀는 샤론보다도 어려 보였다.

조금 전부터 쌍둥이를 대하고 있는 것 같은 감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으니.

또한 ‘왕국’을 지칭하는 점이나 사역마들에게 ‘폐하’라는 호칭을 듣는 점, 1인칭이 ‘짐’인 점을 토대로 최대한 그녀의 세계관 설정에 호응해 주었다.

원래 애들은 자기 말 잘 들어주는 어른을 좋아한다.

“그러나 절 처분하시기에 앞서, 폐하께 아뢰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예상대로 심해의 마녀는 폐하라는 호칭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다.

“…윤허한다. 고하거라.”

아니다.

예상외다.

저렇게 흡족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눈을 부릅뜬 채 귀를 쫑긋거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다.

진짜 딱 하는 행동이 쌍둥이 평균인데….

아무튼 구구절절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항에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간 것이 아니다.

크라켄에게 먹잇감으로 인식되어 공격을 받았고 그에 대해 맞섰다.

그리고 어항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이렇듯 정당방위였음을 주장함과 동시에 크라켄이 얼마나 강적이었는지, 어항이 얼마나 경이로운 공간 마법이었는지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부디 폐하의 선처를 청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은 점이 있다면…. 어항을 사용하신 건 폐하가 아닌 건가요?”

“…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이 불운한 사고에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제복을 입고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 심해의 마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사정을 알겠노라. 허나 그대가 누켈라비 왕국의 외무대신을 시해한 것은 사실. 어떤 연유가 있어도 처벌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판결한다.”

조금 전에 들었던 외무대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구나.

허무맹랑한 설정놀음에 황망함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판결에 귀를 기울인다.

“죄인 신시우에게 종신 노예형을 선고하겠노라.”

종신 노예형?

어디서 많이 들어본 형벌에 트라우마 스위치가 눌렸지만 꾹 눌러 담았다.

일단 목숨을 건졌다면 그것으로 시간을 벌었다는 것.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라도 살아만 있다면 기회는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폐하의 관대한 처분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하면 어떤 업무를 수행하면 되는지요.”

쌍둥이를 떠올릴 만큼 허술해 보이는 심해의 마녀지만 겨우 겉모습으로 판단하기엔 위험하다.

권위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며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그건 나탈리 음탐장이 지도해 줄 것이다. 따라가거라. 나탈리.”

“네, 폐…폐하…. 죄…죄인은… 이쪽으로….”

족쇄를 달지도, 소지품을 압류하지도, 심지어 마법 사용에 제한을 걸지도 않은 채 음탐장이라고 불린 나탈리를 따라갔다.

다시 칙칙한 철제 계단을 거쳐 복도로 돌아온 시우.

“음탐장님.”

“…….”

“나탈리 음탐장님.”

“…….”

혹시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말을 걸었지만 묵묵부답이다.

원래 사역마란 일정 이상의 지능을 지니지 못한다.

정해진 알고리즘을 따라 움직이는 수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처…청소해라…인간…. 구석구석… 싸…싹싹…. 기…기계는… 건들지…말아라….”

나탈리 음탕장도 별다를 바 없는 것인지 함, 구석의 청소함을 보여주고는 부정확한 지시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감시역도 없이 홀로 배치된 뒤에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후우… 쫄렸다.”

대체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행동, 판결, 사후관리 삼박자지만….

심해의 마녀가 안전한 마녀라 단정 짓는 것은 섣부름에서 기인한 오독일 수 있다.

게헨나 내부의 마녀는 감히 티페레트 공작과 제머나이 백작의 공증을 받은 시우를 해코지 하려는 자가 없다.

그러나 상대는 추방자고 그런 인맥빨이 먹힌다는 보장이 없다.

도리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라는 걸 예의주시하며 대응해야 한다.

“억울하긴 하네.”

대걸레를 집어들긴 했지만 선빵 맞은 입장에선 억울하기 짝이 없다.

태산조차 허물 괴물이 일국의 외무대신일 줄, 심지어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심해의 마녀가 살아있어 그 사실에 분노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는 말이다.

“다들 걱정할 텐데….”

지금쯤이면 데네브가 납치 사실을 전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전화라도 한 통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일단은…. 살고보자.”

안전의 보장도, 외부와의 연락도 무엇보다 심해의 마녀와 친밀도를 쌓아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시우는 부지런히 밀대를 밀었다.

그렇게 두 번째 이색 노예 생활이 시작되었다.

2.

솔직히 청소라기에 별생각 없었다.

그 넓은 트리니티 아카데미 교사를 타카쇼와 단둘이 반짝반짝 윤내고, 배수로까지 파내는 와중에 종종 사다리를 타고 가지치기까지 했던 경험이 있다.

허드렛일이라면 프로패션널한 경지에 오른 몸이라는 뜻이다.

괜히 마법을 사용했다가 눈 밖에 나는 것도 마땅치 않고 이 공간 자체가 마법의 행사를 방해하고 있었으니 ‘하지 말란 건 하지 말자’라는 심정으로 순순히 육체노동에 임했다.

문제는 잠수함 청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줄 알고 임했는데….

“잠수함이 이래도 돼?”

너무 크다.

정말 너무너무 크다.

비좁아 보였던 복도는 몇 개나 되는 중간계단을 기점으로 2중, 3중으로 쌓여 있었고 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인지 작은 미로처럼 빽빽한 공간을 자랑한다.

햇볕도 들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시계도 없어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순 없었지만 체감 12시간 정도는 뼈 빠지게 일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복도 한 층을 클리어했다.

심지어 사다리로 내려갈 수 있는 복도 하부 기관실이나, 방구석은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래도 뭘 어쩌겠는가?

까라면 까야지.

이제 슬슬 2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때.

인기척이 느껴진 곳을 바라보니 삐죽 실루엣이 보인다.

꽤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는데 청소에 여념이 없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시선이 그쪽을 향하자마자 튀어나왔던 머리가 쏙 사라졌으니 말이다.

이걸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아니면 눈치채지 못한 척해야 하나 고민하던 때.

들켰다고 판단한 것인지 복도 구석을 돌아 나오는 심해의 마녀.

“흠흠….”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던 그녀는 턱을 치켜든 자세로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다가왔다.

전에 봤던 제복차림이 아니라 편안해 보이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미천한 노예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미천한 노예가 황제 폐하께 감히 인사를 건네도 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녀가 폐하라는 경칭을 좋아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

점잖은 표정과 점잖지 못하게 쫑긋거리는 귀를 보아하니 다행히도 문제 삼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커흠, 때마침 왕국을 순시 중이었느니라. 아직도 일하고 있느냐?”

“미처 절반도 끝내지 못했기에…. 송구하옵니다.”

어색한 사극 말투에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다.

“그대가 아무리 죄인이며 노예라고 해도, 이 잠수정에 탄 순간부터는 나 르뤼에 누켈라비 왕조의 일원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귀를 기울이자 생각보다 파격적인 말이 이어졌다.

“짐은 승조원의 복리후생과 작업효율을 위해 일일 10시간 이상 초과 근무를 금하고 있노라. 비상시와 훈련 시에는 초과근무가 발생할 수 있지만 그에 따른 수당이 지급되니 자세한 규정은 법전의 근로기준법 항목을 참고하거라.”

뜻밖에 어지간한 중소기업보다 괜찮은 여건.

그러고보니 폐쇄된 공간에서 몇 개월씩 얼굴을 보고 지내야 하는 잠수함 승조원은 똥군기도 없고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폐하의 은덕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다만, 오늘은 그대에게 책무가 있으니 동행하도록.”

“예, 폐하.”

그런 가운데 왕국 놀이를 하다 보니 황제에게 노예가 직접 와서 용무를 말하는 일도 가능한 건가?

아니면 생각보다 허술한 설정인 건가.

아니면 생각보다 허물 없는 성격인 건가.

혼란스러워하는 시우에게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심해의 마녀는 뚜벅뚜벅 위층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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