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
1.
싸움종료.
아니, 르뤼에는 이것이 싸움이었다는 의식조차 없었다.
아직 완전히 낙인을 활용하기 위한 ‘시련’을 끝내지 못했어도 상대는 마녀 흉내를 내는 반푼이 마녀.
희한한 갑옷을 걸친들, 이상한 리본을 꺼내 잔재주를 부린들 두 사람의 차이는 완연했다.
르뤼에가 범람케 한 해일은 방패이자, 철퇴였으며 모든 잔재주를 일소하는 압도적인 재앙이었다.
그렇게 제압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30초.
“라켄라켄 외무대신….”
르뤼에는 크라켄이 사라진 자리로 걸어가 지면을 쓸었다.
거대한 동체는 바스러졌지만 아직 걸쭉한 점액 같은 것이 남아있다.
이 끈적하고 기분 나쁜 체액을 남기고 라켄라켄은 정말 죽어버린 것이다.
우울하다.
화가 난다.
솔직히 레비나 링바쿠르와 달리 못생긴 외모 탓에 르뤼에의 마음에 쏙 들던 사역마는 아니었다.
맹약의 이행을 요구하는 진조의 마녀에게 굳이 라켄라켄의 어항을 하사한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러나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켈라비의 종복으로 성실히 일했던 크라켄이다.
별 생각 없이 어항을 넘겨준 탓에 주제를 모르는 잡것들에 의해 목숨을 다했다.
르뤼에의 머릿속에서 라켄라켄과의 몇 안 되는 추억이 지나간다.
제 몸을 미끄럼틀처럼 만들어 승조원들과 썰매를 타게 해 주었던 일.
간만에 바다에 풀어주었더니 아쿨라에 반갑다고 달려드는 바람에 좌현이 주저 앉고 어뢰실이 침수되었던 일.
르뤼에가 아끼는 고래 무덤을 초토화했던 일.
그리고….
“…….”
그렇게 많은 추억이 있지는 않지만 어찌 됐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성대한 국장(國葬)을 치러 그대의 넋을 위로하고, 가장 깊은 바다에 그대의 무용담을 적은 묘비를 세우겠노라. 용맹했던 마지막 전투를 기리는 군가를 만들어 승조원들이 부르도록 하겠다.”
르뤼에는 눈물을 글썽이며 크라켄을 추모한 뒤 벌떡 일어섰다.
죄책감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감히 위대한 아쿨라 왕국의 외무대신을 처참하게 시해한 것도 모자라 그 범인 중 하나가 도망쳤다니.
-촤악!
르뤼에는 그녀의 발치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던 남자의 바지춤을 잡고 건져 올렸다.
파도 한 번에 두들겨 맞고 정신을 잃어버린 나약한 남자.
“말세로구나. 남자 마녀라니.”
말로만 들었을 땐 어디서 또 사기꾼이 나타났구나 싶었는데, 그래도 제법 재주를 부릴 줄 아는 녀석이었다.
특히 여자 쪽을 순식간에 순간 이동시킨 것을 보곤 깜짝 놀라 멍하니 보고 있을 만큼이나 말이다.
“…흐음….”
르뤼에는 미역처럼 물을 머금고 늘어진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반반하구나.”
사실 지금까지 봐왔던 남자라고 해봐야 오래된 흑백 영화에 나오는 남배우가 전부인 르뤼에.
승조원을 제외한 남성을 이렇게 가까이서 남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 승조원조차 중성화가 완료된 사역마, 어인이지만 말이다.
한참이나 숨통을 끓을지 말지를 고민하던 르뤼에.
그래도 제법 희귀한 존재다.
잘 활용하면 어딘가 쓸모 있어 보였다.
르뤼에는 주섬주섬 남자를 챙겨 아쿨라로 복귀했다.
2.
“끄응….”
두개골이 쪼개질 것 같은 두통.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안압 탓에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우웩…!”
기침을 하자 한 줌이나 튀어나오는 짜디짠 바닷물이 콧구멍으로 다시 흘러들어 갔다.
몇 차례나 연이은 기침 탓에 전신에 멍이 든 것처럼 격통이 흐른다.
통증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주위를 살폈다.
다른 건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 한가지.
지금 생선을 말리는 것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것.
어쩐지 머리가 유독 아프다 했다.
“여긴 또 어디야….”
상하가 반전된 시야와 어둠 탓에 식별이 어려웠지만 적응이 되자 찬찬히 내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5평 남짓한 어두컴컴한 방.
모서리 구석구석에 돌출된 낡은 파이프 배관과 곳곳에 박힌 회전식 벨브 때문에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무척 좁아 보인다.
조그마한 유리창이 뚫린 낡은 철제문 옆에는 앙상한 프레임의 3층 침대가 간신히 낑겨 있었으며, 반쯤 열린 캐비닛이 황량한 내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달리 더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시우는 자연스럽게 병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더 오버스러운 추측을 하자면 선상의 해군을 위한 객실 같다.
그것도 꽤 연식이 된.
“…….”
그렇다면 지금 상황을 점검해보자.
왜 여기 오게 되었는가? 부터 기억을 더듬는다.
어항 속에서 데네브와 함께 분투해 크라켄을 퇴치.
이후엔 진노한 심해의 마녀와 마주하게 되었다.
데네브를 우선적으로 탈출시킨 시우는 마녀와 맞섰고, 형편없이 패배했다.
마지막 기억은 집채만 한 파도가 피할 새도 없이 전신을 두들기던 광경이었으니.
그렇다면 역시 잡혀서 감금된 것이겠지.
심해의 마녀가 어떤 성향의 마녀인지는 잘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파올라 소치틀이 그녀의 예장인 ‘다곤의 피리’로 서울 한복판에서 난리를 부렸다는 것밖엔 없다.
“…아무것도 안 해놨네.”
이내 몸에 어떠한 제약도 걸려있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슬만이 발목에 매여있을 뿐.
쥐꼬리만큼 남아있는 마력이지만 분명 의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좌안으로 보이는 마력의 흐름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건물 전체에 강화 마법이 적용되고 있었다.
당연히 시우에게도 모종의 조치가 취해졌으리라 생각던지라 도리어 당황스럽다.
시우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빤히 봐놓고도 허술한 감금법이랄까.
-철그럭!
그림자로 단도를 만들어내 굵직한 쇠사슬을 끊어낸 뒤 낙법을 통해 사뿐히 착지했다.
아직 뼈마디가 좀 쑤시긴 했지만 더운밥 찬밥 가릴 때가 아니다.
문 앞에 달라붙어 좁은 창틀로 외부를 살폈다.
아무래도 선내라는 추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 같다.
일전 비앙카와 싸울 때 거닐었던 컨테이너선의 복도와 매우 비슷하다.
한동안 더 추이를 살피던 시우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여차하면 그림자를 통해 잠금장치를 해제하려 했는데 문이 잠겨있지도 않다.
“…….”
탈출을 유도한다고 해도 믿을 만큼 허술한 방비.
난데없이 잠입 미션을 하게 된 지라 심장이 두근거린다.
바닷물 탓에 건조해진 목구멍 안으로 마른 침이 넘어간다.
의미가 크게 있을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조용히 복도로 나섰다.
좁은 창으로 엿보았을 땐 보이지 않던 전체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내부를 묘사하자면 단 한마디면 충분했다.
잠수함의 복도.
비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인지 촘촘하게 천장은 물론 통행로에까지 돌출된 이름 모를 기계장치.
길이만 따지자면 굉장히 길게 뻗은 복도지만 너비가 좁았고 천장도 낮기에 밀폐된 느낌이 가득했다.
기관 각부로 뻗은 촉수 다발이 마력을 공급하고 있었고 간헐적으로 취익거리는 증기소리와 부글부글 끓는 듯한 기포 소리가 쉴새 없이 들려온다.
“난데 없이 잠수함이라니….”
그제야 허술한 방비가 조금은 이해가 되는 느낌이다.
만약 이게 정말 잠수함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탈옥이 어려운 감옥일 테니.
“피어라.”
신체에 조금 무리가 갈 것을 감수하고 마력의 거듭 증폭을 사용.
전신을 갑옷으로 뒤덮었다.
-우우웅
갑옷을 걸치자마자 복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물리적인 움직임은 아니었다.
대신 음식물을 받아들인 소화기관이 위액을 분비하듯 복도의 파이프가 마력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것이다.
갑옷 형태로 직조되었던 그림자가 마력으로 무화해 빨려 들어간다.
순식간에 뜯겨 나가는 갑옷.
게걸스럽게 마력을 갈취한 파이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조용한 소음을 내며 가동한다.
시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좌우를 살폈다.
“아무런 대책이 없을 리가 있나….”
신체 내의 자기화된 마력이나 작은 나이프 정도는 눈감아 주는 모양이지만, 마법의 규모가 조금만 커져도 얄짤 없이 ‘소화’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거듭 증폭이 가능한 시우라도 이런 조건에서 계속 갑옷을 유지하는 것은 무리다.
“후우….”
긴장 탓에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쳐낸다.
이쯤 되면 저쪽에서도 움직임을 전부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
일반적인 잠수함은 절대 아닌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어차피 저 골방에 박혀 있다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이나 아무렇게나 처박아 둔 것을 보면 아마도 당장 해코지를 한 심산을 아닐 터.
이렇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어둑하게 빛나는 조명을 따라 복도를 탐방한다.
대부분은 시우가 머물던 방과 비슷하게 생긴 객실이었으며, 그 수가 제법 되었다.
복도 중간에 밑으로 내려가는 해치와 사다리가 있는가 하면, 도저히 무슨 기계들인지 알 수 없는 장비들이 빽빽이 들어선 방도 있다.
철판, 벨브, 파이프, 전등, 기계로만 가득 찬 살풍경한 공간도 두 번 꺾인 철제 계단을 올라가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넓게 트인 홀과 푹신한 카펫, 주홍색 할루겐 조명이 반겨준 것이다.
심지어 그다지 어울리진 않지만, 샹들리에도 있었다.
이 정도면 잠수함이 아니라 오래된 영화에 나오는 호화여객선이라 해도 믿겠다.
-…… …… ……
시우를 반겨주는 홀과 고풍스러운 나무 벽으로 나뉜 공간들.
그 중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이 있었다.
황급히 숨을 죽인 채 벽에 찰싹 붙었다.
살짝 열려있는 문틈으로 내부의 정경이 보인다.
언뜻 보기에 오래된 호텔의 라운지처럼 보이는 그곳엔 심해의 마녀와 30마리 남짓한 반인 반어의 괴물들이 군복을 걸치고 있다.
밀리터리 관련 지식은 달리 없는 시우라도 그것이 소련 군복이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우리는 오늘. 가장 충성스러운 대신 라켄라켄을 잃었다. 그는 누구보다 명예로웠으며, 책무를 게을리하지 않고 왕국에 봉사하였다.”
“우어…우어… 흑흑….”
“흑흑흑….”
“외…외무…대신….”
라켄라켄?
혹시 크라켄의 이름이 라켄라켄인건가?
기막힌 작명 센스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렇다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장례식 같은 것인 모양이다.
“…….”
솔직히 저 장면만 봐서는 확신은 못하겠다.
외무대신은 또 뭐고.
“그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가장 깊은 해구에 공훈을 적은 묘비를 놓을 것이다.”
“아아…자…자비..로우셔라…. 르뤼에…폐하…. 만세…!”
“또한 그의 용맹함을 떠올릴 수 있는 진군가를 만들 것이다.”
“오오, 마…마음마저… 아리따우신… 르뤼에… 폐하… 만세에…!”
“그리고 예포를 쏠 것이다.”
“…….”
“못 들었느냐? 예포도 쏠 것이다.”
“…….”
예포라는 말과 함께 숙연한 흐름이 감돌던 예식장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이후 어수선해지는 어인들.
그들이 허둥거리는 모양새를 본 심해의 마녀는 언성을 높여 일갈한다.
“예포도 쏴야겠다! 감히 바다 같은 짐의 명령을 거스르는가!”
“토…통촉하여 주시…옵소서어….”
“해…핵미사일…은 예…예포가…아니옵…니다….”
“아…아직…중어뢰가…남아 이…있습니다….”
“서…선왕의… 당부를… 기억…해주시옵…소서….”
“닥치거라! 그럼 대체 언제 SLBM을 쏴보냔 말이다!”
“죽여…주시옵…소서어….”
단체로 엎드려 심해의 마녀에게 간청을 올리는 어인들.
“호오?”
“아….”
시야를 차폐하고 있던 어인들의 머리가 낮아지자 촌극을 관람하고 있던 시우와 심해의 마녀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전후를 살피자면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아도 모자랄 상황이긴 한데….
어째 땀만 삐질삐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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