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21화 (521/917)

#521

1.

사실 마녀에 관한 정보가 서적화되고 데이터베이스로 남기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일련의 작업은 티페레트 공작이 위치포인트를 설립하고 나서 대대적으로 시행되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300년 전 이미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진 ‘심해의 마녀’에 대해 정확히 기술한 문헌이나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이나 그런 구전을 엮어 만든 자료만 있을 뿐이다.

다방면의 잡학에 관심을 보였던 데네브는 심해의 마녀에 대한 자료를 읽어본 적이 있었다.

다섯 마리의 바다 괴수를 부리며 일부 제도에서는 ‘바다어미’라는 이름으로 숭배받는 심해의 마녀.

그 구전이 일컫길.

심해의 마녀는 손끝을 까딱여 범선을 난파시키고, 팔을 휘둘러 해일을 일으키며, 발을 굴러 왕국을 가라앉힌다 하였다.

그 말인 즉, 이 이야기에 다소 과장이 섞여다 해도 그녀는 이미 300년 전 대마녀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의미다.

“깊게 잠겨라.”

심해의 마녀의 스산한 영창과 동시에 일렁이던 마력이 일파만파 주위로 뻗는다.

데네브와 달리 그녀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는 시우다.

그러나 마력의 질과 양을 피부로 생생하게 느끼자 눈앞의 마녀가 어떤 존재인지를 단숨에 이해했다.

이건 진짜 싸우면 안 된다.

‘요행으로’, ‘기지를 발휘해’, ‘어떻게든’ 이라는 가능성을 말끔히 지워버리게 하는 상대였다.

지금껏 한 번도 적으로 삼은 적 없던 레벨의 강적.

그 경지는 아마도 아멜리아와 스승님과 같은 23 위계의 경지.

고작 마력의 여파에 휩쓸렸을 뿐인데 다리가 땅에서 뽑혀나갈 것 같다.

‘도망치세요. 제가 보내드릴게요.’

‘시우 군! 안 돼요! 일단 대화라도…!’

시우는 즉각 데네브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이 소음 속에서 통신을 하게 해주었던 데네브의 마법이 아직 남아있던 것이다.

사실 데네브와 시우는 이 어항에 빠져들어 나갈 길을 찾고 있었을 뿐이다.

심해의 마녀 장본인인지, 아니면 제삼자의 농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후자라면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시우와 데네브는 분명히 크라켄을 죽였고, 심해의 마녀는 생생한 분노를 표하고 있다.

‘대화의 여지가 없는 상태’라는 것이 꼭 대화를 시도하고 묵살 당해 봐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하더라도 제가 시도해보겠습니다. 우선 둘 중 하나라도 외부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그렇다면 제가 남을게요! 시우 군이 남아야 할 이유는….’

솔직히 고하자면,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취미생활이 남 대신 희생하기, 계란이 되어 바위에 돌진하기인 사람을 없을 테니까.

그러나 데네브를 먼저 대피시켜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오딜 님과 오데트 님을 생각하셔야죠.’

최악의 경우.

시우는 여기서 죽으면 시우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데네브에게는 낙인을 물려주어야 할 쌍둥이가 있다.

데네브의 신상에 유고가 생겨 낙인을 물려줄 수 없게 된다면 그건 쌍둥이에게도 더 없는 비극인 것이다.

‘시우 군….’

‘바로 뛰세요. 지금!’

따라서 심해의 마녀가 본격적으로 실력행사에 나오기 전 데네브라도 내보내는 것.

시우는 그것을 지상과제로 삼았다.

“무얼 쫑알거리는 게냐.”

어차피 데네브는 마력이 바닥난 상태, 옆에 있어 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피어라!”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파츠츠츠!

데네브의 발밑에 푸른 원이 생긴다.

이동할 좌표는 저 멀리 종탑.

다행히 며칠씩이나 같은 공간에서 머물렀던데다가 방해꾼이던 날치떼도 없다.

더군다나 데네브의 마력도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기에 복잡한 연산 없이 즉발 시행이 가능했다.

오직 심해의 마녀가 방출하는 마력 탓에 발생하는 변수만 고려해서 대입해주면 되었으니.

“시우 군, 무사해야 해요…! 꼭! 구하러 올게요…!”

데네브의 몸이 사라진 이후, 저 포탈 너머로 넘어간 것이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즉시 온몸을 갑주로 감싼 시우는 임전 태세를 갖췄다.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보자.

상대는 23 위계,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되는 강대한 마녀.

심지어 그 마녀를 머리끝까지 화나게 한 것도 모자라 공범을 도망치게 해 놓고 대화의 시도라….

그건 곧 대놓고 싸움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다.

크라켄에게 최후의 일격을 먹이느라 거듭 증폭을 5번이나 사용했다.

전신의 마력회로가 용광로처럼 달아올랐고 몇몇 곳은 아예 일시적으로 단락된 상황.

최대 변수 발생기인 붉은가지도 없다.

다시 생각해도 무모한 짓이긴 했다.

개뿔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위기를 자초하다니.

데네브의 말대로 트러블 메이커 체질이라는 것이 있나 보다.

시우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꽃처럼 피어난 마력이 갑주를 보강하고, 오른손엔 기다란 창대가 쥐어진다.

심해의 마녀는 의표를 찔린 것인지 시우가 아닌 데네브가 사라진 종탑 쪽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

지금 공격할까?

아니면 분노의 기색이 주춤한 틈을 타서 정말 대화라도 시도해볼까?

어느 쪽이건 고른 즉시 다른 루트가 사라지는 선택지.

시우는 짧은 망설임 끝에 후자를 택했다.

어차피 싸워 봐야 승산은 없다.

저런 괴물을 상대로는 무리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시우의 말에 심해의 마녀가 고개를 돌린다.

“입을 나불댈 자격을 준 기억은 없느니라.”

그 차디찬 목소리와 마주하자, 얼마나 낙천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심해의 마녀는 분노가 잦아들어 시우에게 관심을 돌렸던 것이 아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잠깐 딴생각을 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시우 역시 마냥 행운에만 기대지는 않았다.

데네브를 구출해냈으니 다음은 시우가 도망갈 차례.

미리 연산을 끝내 놓았던 좌표이동식을 통해 긴급 탈출을 도모하는 찰나의 순간.

—-쿠구구궁!!!!!!

끔찍한 굉음과 함께 지면이 갈라진다.

들키지 않게끔, 땅 아래로 그리고 있던 좌표이동식이 조각나고 마을 전체가 오버 쿡 된 파이 겉면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스며드는 것은 검은 해수.

도시 하나가 불과 5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침수되었다.

2.

시간을 조금 거슬러 심해의 마녀의 손을 거쳐 마개조된 타이픈급 잠수함 ‘아쿨라’.

그 규모와 기능은 자부심을 품을 만큼이나 대단하다.

선체 전반을 강화한 까닭에 무제한에 가까운 잠항 심도를 가지고 있음을 물론이오, 무려 핵탄두 탑재가 탑재된 대륙 간 탄도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으니.

어떤 재래식 병기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의 전투성능을 자랑한다.

그뿐이 아니다.

단순 길이로만 100M가 넘는 선내엔 흑백 영화를 상영이나 주크박스를 통한 음악감상이 가능한 극장, 핀볼이나 팩맨 따위를 즐길 수 있는 오락실, 꽤 널따란 사우나가 딸린 수영장, 극상의 미주가 진열된 몰트 바까지.

어지간한 잠수함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호화로운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세계 어느 곳을 둘러봐도 이만큼 대단한 공방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호화롭게 꾸며진 잠수함이라도 그 한계는 역력하다.

10년 넘게 같은 곳에서 머물러야 한다면 바다 위의 도시라고 불리는 항공모함이라도 답답할 판국이다.

태생적으로 공간이 제한된 아쿨라의 실생활 공간은 바다 아래의 전원주택쯤이니….

“무료하도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실로 실로 무료하도다.”

르뤼에 누켈라비는 심심했다.

따분해서 죽고 싶다는 말이 이토록 체감하는 인물은 몇 없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죽을 만큼이나 심심했다.

옥좌(회전식 안락의자)에 앉은 르뤼에와 그 옆에서 의자를 빙글빙글 돌려주던 승조원.

“멈추거라.”

르뤼에의 손짓에 승조원은 조용히 의자를 내려놓고 그녀의 등 뒤에 섰다.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고풍스럽고 나쁜 말로 표현하자면 시대에 뒤처진 라운지, 붉은 카펫에 나란히 늘어선 승조원들.

잠수함 운영을 위한 최소 인원만을 제외한 승조원이 라운지로 모여든 이유는 바로 궁중회의를 위해서였다.

르뤼에는 하품을 참으며 지엄한 음색으로 명한다.

“짐의 여흥을 위해 의견들 내보거라.”

한 명씩 앞으로 나서는 반인 반어의 승조원.

“유…유빙… 분쇄…레이싱은… 어…어떠신가요…?”

유빙 분쇄 레이싱.

잠수함의 선체로 떠다니는 빙산에 몸통박치기를 해 부수는 놀이다.

“기각한다. 저번 달에도 했느니라. 너무 빈번히 수면 밖으로 나서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다음 승조원.

“다…다트…대회….”

“기각한다. 매번 짐이 우승하지 않느냐?”

반인반어의 괴생명체 특성상 다들 동작이 굼뜨다.

저들끼리 수군수군 대화를 나누던 승조원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나…난파선… 수집… 어떠십니...까….”

말 그대로 가라앉은 배를 뒤져 쓸만한 것을 모으는 작업으로 르뤼에의 유희 생활의 메인 컨텐츠였다.

“이번에도 그것밖에 없는 게냐….”

탄식하고 있던 르뤼에는 불현듯 눈 뒤편에서 찌르르 번지는 통증을 느꼈다.

그녀가 부리던 사역마 중 한 마리, 크라켄과의 영적 연결이 해제되었다는 신호였다.

“뭣?!”

얼마전 맹약을 들먹이며 찾아온 진조의 마녀에게 어항을 던져줬음을 까먹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스모데의 설명에 따르면 먹잇감이 될 자는 허약하기 그지없는 ‘남자 마녀’.

지금쯤이면 이미 먹잇감이 되어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달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가능한 외부의 일과 얽히지 말라는 것이 스승님의 유언이었고 말이다.

“라켄라켄…!”

다른 건 몰라도 체급에서 비롯된 맷집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역마.

도망칠 곳도 마땅찮은 어항에서 지구전으로 끌고 갈 경우 어지간한 대마녀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 낙관하던 르뤼에에게 크라켄이 당했다는 급보는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르뤼에는 품에서 푸른 구슬을 꺼내 들었다.

‘어항’은 게헨나와 마찬가지로 결계에 의해 분리된 일종의 주머니 공간.

숙청당할 뻔했던 선대 누켈라비가 케테르의 마법을 본떠 만든 불완전한 공간 마법이다.

즉, 아스모데에게 건네주었던 구슬 역시 어항 그 자체라기보다는 초청권이기에 르뤼에 역시 통행권을 통해 어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감히 왕국의 외무대신을 죽이다니…!”

오랜만에 느껴보는 분노와 함께 르뤼에의 몸이 희푸른 빛에 둘러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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