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20화 (520/917)

#520

1.

두 팔이 뒤로 꺾인 채 천장에 매인 쇠사슬에 속박된 클레흐.

고개를 숙인 채 이를 꽉 깨물고 있던 그녀는 비 오듯 흐르는 식은땀과 두통에 괴로워하면서도 제 몸 상태를 점검했다.

이곳은 모종의 술식을 통해 마법 자체를 구현할 수 없게 만들어 놓은 감옥인 듯하다.

회로를 억제해 마력의 발현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겠지.

다른 마녀에게는 더 없이 효과적인 방법이겠지만 클레흐에게 완벽한 수감 방법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통상적인 마녀와 달리 혈액에 마력을 분배하여 비축한다.

몸의 상처가 조금만 회복된다면 초월적인 신체능력만큼은 고스란히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조금만 시간을 벌 수 있다면 이까짓 쇠사슬과 돌벽 따위 썩은 새끼줄과 과자 집처럼 부숴버릴 수 있다.

-또각또각

가까워진 구두 굽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기엔 방금까지 클레흐에게 온갖 질문을 던져댔던 향수의 마녀가 있었다.

“커헉!”

아무말도 없이 다가온 그녀의 손끝이 클레흐의 이마를 두드리는 순간.

클레흐는 기껏 재구축해 두었던 회로가 모조리 꼬이는 것을 느꼈다.

그 피드백으로 울컥 울혈이 올라오는 바람에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낸 클레흐.

“도망칠 생각 따위 말아요.”

이 지하감옥은 제머나이 백작 이외의 마력 행사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알비레오 백작은 위로 올라가기 전 취조를 원활히 이행할 수 있도록 ‘열쇠’를 넘기고 갔다.

소지자에 한해 감옥의 제약을 완화해주는 아티펙트였다.

“…….”

클레흐는 입을 꾹 다문 채 매서운 눈길로 아멜리아를 쏘아보았다.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실감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켰지만 아직 모든 것이 망가진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부터 저는 당신을 고문할 거에요.”

“…….”

아멜리아의 손짓과 함께 새하얗고 미세한 입자가 클레흐의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당신의 몸에 주입한 입자는 씨앗. 파동에 공명해 꽃으로 발아하죠. 일전에는 기절시키는 정도로 끝냈지만….”

-딱!

아멜리아가 손끝을 튕기자마자 클레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클레흐 역시 마법의 조예가 있는 대마녀다.

지금까지 경험만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할 수 있던 것이다.

-털썩!

하지만 꽃이 피어난 곳은 클레흐의 몸이 아닌, 그녀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이었다.

반쯤 매달려있던 클레흐는 제 손목을 옥죄던 사슬이 꽃 더미로 변한 것을 확인했다.

“이제부터는 아닐 거에요.”

명백한 협박.

클레흐는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문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멜리아는 한 발짝씩 클레흐에게 다가갔고, 클레흐는 그런 그녀를 두려운 듯 올려보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처음부터 능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힘 조절은 쉽지 않겠죠. 그러니 가능한 말을 할 수 있는 시점에서 순순히 답해주었으면 해요.”

그렇게 어기적거리며 뒤로 물러서던 클레흐는 어느새 자신의 등이 차가운 돌벽과 마주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도망칠 수 없는 이 상황 속 더 겁을 집어 먹어봐야 잡아먹힐 뿐이라는 것도.

“아주 걱정되나 봐요?”

“…….”

어차피 여기는 게헨나, 클레흐는 사로잡힌 공적이다.

자신의 처우가 어떻게 될지는 이해하고 있었다.

공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이상 살아서 돌아갈 생각 따위는 접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엔 겁먹고 질질 짜는 모습이 아니라, 최소한 속이라도 긁어놓자.

그렇게 생각한 클레흐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아멜리아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딱해서 어쩌나. 그 신시우라는 놈은 이미 뒤졌을 텐데요.”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도발.

그에 대한 아멜리아의 답변은 간단했다.

“큭…!!!!”

클레흐는 제 새끼손가락이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개화와 동시에 살갗을 꿰뚫고 나온 꽃뭉치에 의해 흩어지듯이 무너져 내렸다.

고통은 없다.

또한 클레흐의 체질 특성상 이 정도는 금방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신체 일부가 소실되는 걸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것은 끔찍한 공포를 선사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런 횡포를 저지른 아멜리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살아 있어요.”

어항에 들어갔는데도 살아 있다고?

클레흐는 그 진의를 파악하려 들었다.

아멜리아가 굳이 블러핑을 칠 필요는 없다.

역시 데네브 제머나이가 함께 들어간 것이 문제였을까?

하지만 아직 나오지 못했다는 것은 탈출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

무한에 가까운 회복력을 지닌 괴수와 다르게 마녀의 마력은 한정적이다.

그러니, 결과는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거기까지 판단을 끝낸 클레흐는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반의반 정도밖에 완수하지 못한 계획이지만 ‘귀족’이랍시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마녀 여럿에게 한 방 먹여준 것 같은 통쾌함이 남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어차피 곧 뒤질 텐데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클레흐.

“아니요. 그가 무사하길 기도하는 편이 좋을 거에요.”

아멜리아는 기꺼이 도발에 응했다.

상체를 낮춰 클레흐와 눈을 마주한다.

“만약 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괴로움보다, 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게 될 테니까.”

반드시 그렇게 해 보이겠다는 듯한 아멜리아의 발언에 숨을 집어 삼켰던 클레흐.

심장을 옥죄는 공포에 맞서려는 것처럼 있는 힘을 다해 아멜리아의 가슴을 밀쳤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난 받았던 걸 돌려줬을 뿐이에요! 지랄 맞은 티페레트 공작에게…!”

몸을 일으켜 아멜리아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가뿐히 제압당한다.

클레흐는 발버둥을 치면서 웃는 것인지 울음 짓는 것인지 모를 기괴한 표정으로 외쳤다.

“내게서 비앙카를 뺏어갔으니까, 똑같이 잃는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 비앙카는 내 전부였단 말이야!”

비앙카가 먼저 신시우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웠건, 티페레트 공작이 정당한 대응을 했을 뿐이건.

그딴 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조금이라도 더 쓸모 있는 마녀가 되어 차갑게 등을 돌렸던 비앙카가 돌아봐 주는 것.

그것이 클레흐가 바라왔던 삶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졌다.

불과 같은 복수심 이외엔 무엇도 클레흐의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죽건 이제 와서 무서워할 것 같아요? 티페레트는 어딨죠? 그 쌍년이 비탄과 슬픔으로 흐느끼는 모습이 보고 싶은데.”

이내 미친 듯이 웃음을 흘리기 시작한 클레흐를 보며 아멜리아는 그녀가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흐는 시우와 친분이 두터웠던 티페레트 공작이 욕망의 마녀를 죽인 진범이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의 마녀를 때려눕힌 것은 시우지만, 동귀어진을 시도하는 비앙카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린 것은 아멜리아다.

그마저도 시우는 비앙카가 죽음을 위장한 도주를 감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자신의 사업체가 초토화되도록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착각에 불과할 수 있지만….

굳이 세밀한 사실까지 바로잡을 필요는 없다.

지금은 정보 교환이 목적이 아니라, 신문 그 자체가 목적이다.

아멜리아는 말했다.

“비앙카 벨릴리를 죽인 건, 저예요.”

“…….”

그 발언과 함께 클레흐는 마치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잠잠해졌다.

아니,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충격에 빠진 눈으로 아멜리아를 올려보고 있었다.

“…거짓… 아니, 어….”

최초의 전제가 뒤바뀌는 충격적인 발언.

더듬더듬 흘러나오는 말.

누구보다 늠름하고, 제멋대로이며, 강하던 비앙카.

삶의 부표이자 지배받고 싶었던 정복자.

클레흐는 그런 비앙카가 죽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어지간한 마녀가 저런 발언을 했다면 코웃음 치고 말았을 것이다.

최강으로 알려진 케테르나 티페레트 공작이 아니고서야 그녀를 상대할 마녀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욕망의 마녀는 제 손에 죽었어요.”

하지만.

눈앞의 마녀라면 가능하다.

저항하는 클레흐를 어린아이 손목 꺾듯이 가볍게 제압해버린.

고문을 함에도 한점의 망설임이 없는 아멜리아 메리골드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 순간 클레흐는 휘광을 발견했다.

자유를 얻는 대신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던 때 비앙카에게서 보았던.

다가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나방을 매료시키는 모닥불처럼 아름답게 타오르는 운명의 불길을.

2.

어항의 날짜를 기점으로 약 이틀 뒤.

크라켄은 토벌되었다.

연구를 거듭해 더욱 발전되고 정제된 데네브의 마법은 바닷속에서 니가와를 시전하던 크라켄을 빈사 상태에 만드는 데 성공했다.

거기서 쐐기를 박은 것이 시우다.

창이나 검이 아닌 커다란 도끼를 생성해 낸 이후 체력도 재생력도 바닥까지 떨어진 크라켄에게 달려들었다.

싸움이라기보다는 건물 철거에 가까운 장절한 전투 끝에 머리통을 부숴준 것이다.

말로하니 아주 간편한 작업처럼 느껴지지만 원래 세상만사가 두어 줄로 표현하면 간단해지기 마련이다.

세계 2차 대전의 시작과 끝도 난폭하게 앞뒤를 쳐내면 낙제한 미대 지망생이 자살함으로 요약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발악하는 크라켄 덕에 시우도 데네브도 기진맥진이었다.

“드디어, 성공했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자연스럽게 승리를 자축하는 목소리도 맥아리가 없었다.

당장 침대만 있으면 누워서 잘 것 같은 분위기다.

선착장은 이미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었고 수위가 줄어든 듯한 검은 바다만이 지난 사투의 흔적을 증명할 뿐이다.

바스러지며 사라지는 크라켄의 사체.

반쯤 육지로 끌려나온 거대한 머리의 중앙에서 또르륵 파란 구슬이 굴러 나왔다.

그 모양이 보더 타운의 ‘문’을 오갈 때 제출하는 시민증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보아 이것이 어항의 ‘통행증’ 인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항상 시끄럽게 울리던 종탑이 재생되더니 원형의 고리를 만들어냈다.

누가 봐도 ‘여기가 출구입니다~’하는 모양새다.

이 세계가 게헨나처럼 주머니 공간이라는 데네브의 추측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정말 끝이네요.”

“다사다난한 모험이었어요. 말년에 이런 경험이라니…. 뭐, 꼭 나쁜 점만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요.”

이제 정말 끝이라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하고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서로 자제력을 잃고 뜨겁게 몸을 섞었던 이후 데네브는 퍽 살뜰해졌다.

예전처럼 못 잡아먹을 듯 굴지 않았으며, 시우도 그런 그녀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시우 군,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백작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약속은 잊지 않았죠?”

“물론입니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진짜 연인처럼 제대로 된 섹스를 한 건 딱 한 번이었고, 그 뒤에도 나름 선을 지켰으니….

데네브의 부탁 정도는 기꺼이 들어줄 예정이다.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시우가 손을 뻗자 우물쭈물 거리던 데네브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자마자 푹 자야겠어요.”

“저도요, 이제 나가면 시우 군의 도움으로 마력을 충전할 수도 없으니까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통행증을 챙기려던 그때.

시우와 데네브는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이나 놀랐다.

이곳은 어항.

본디 시우와 데네브 이외에는 크라켄밖에 존재하지 않던 세상이다.

그러나 크라켄의 시체가 놓여있던 장소엔 처음부터 여기 있었다는 듯, 한 마녀가 턱을 치켜 든 채 서 있었다.

검푸른 밤바다처럼 흐르는 장발.

심해만큼이나 깊고 짙은 눈동자.

여느 마녀처럼 아름다울 뿐, 달리 특이사항은 없다.

“…네놈들이냐?”

그럼에도 시우도 데네브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분노한 표정, 범람하듯 일렁이는 마력, 자연재해를 눈앞에서 마주한 듯한 중후한 떨림.

“버러지 같은 연놈들이 감히 짐의 백성을 해하다니….”

분노로 갈라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동시에 한 이름을 떠올린다.

“그 죄는 목숨으로 사해주마.”

이 어항의 주인이자 이미 케테르 공작에 의해 숙청당했다고 알려진 옛 마녀.

심해의 마녀라는 이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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