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
1.
비앙카 벨릴리.
그녀는 실로 철혈의 정복자이자 욕망의 마녀라는 이명답게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지배자였다.
더군다나 스승에게는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카리스마와 위엄은 순식간에 클레흐를 매료시켰다.
한편 비앙카는 클레흐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클레흐는 선장을 잃은 배.
키를 대신 잡아줄 선장이 필요했고 비앙카는 타인의 결핍에 깊은 흥미를 보이는 타입이었으니.
둘은 단순히 비지니스 파트너 관계를 넘어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까지 발전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클레흐는 자신의 모든 과거와 스승에 관한 이야기를 비앙카에게 말해주었다.
술김에 내뱉은.
무엇을 원하고 입 밖에 꺼낸 것인지도 모를 비참한 과거를 전해 들은 비앙카는 코웃음으로 그것을 일소했다.
‘네 스승 참 병신년이네.’
그 순간 클레흐는 전율에 가까운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에레제베트의 망령이 갈갈이 찢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클레흐는 비앙카를 선망했고, 동경했으며 자신의 남은 삶을 지배해주기를 원하며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연인 관계가 된 이후 비앙카는 클레흐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마녀와의 전투법은 물론이오, 현세를 살아가는 방법, 헌혈 단체를 설립하고 혈액 팩을 밀매하는 식으로 케테르 공작의 눈에 띄지 않고 마법 연구를 이어나가는 방법을 제시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오늘도 괴롭힘 당하고 싶지? 난 겁에 질린 네 표정이 참 좋거든.’
‘수수료 좀 줄여줄래? 요즘 사정이 빠듯해서.’
‘이번에 새로운 조합법을 만들었다며? 나도 봐도 괜찮아?’
‘나도 슬슬 직접 플랜트 관리를 해보고 싶은데. 비법 좀 전수해줘.’
‘이거 좋아 보이는데. 가져갈게.’
몸을 요구할 때도, 마법 연구의 자료나 소재를 요구할 때도, 사업 관련된 이권을 요구할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적당한 양보를 원하던 비앙카였으나 점차 요구사항이 커졌다.
종국에는 폭리에 가까운 이권을 뺏어가며 야금야금 클레흐의 자산을 갉아먹었다.
그러나 클레흐는 그런 비앙카의 요구를 전부 들어주었다.
비앙카의 옆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런 것쯤은 아깝지 않았다.
그것이 클레흐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꿈 같은 나날이었다.
돌연 찾아온 파국이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미안, 넌 너무 질렸어. 이제 뭘해도 재미가 없네.’
애초에 비앙카가 클레흐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은 최초엔 호기심, 그 이후엔 이용해 먹기 쉬운 상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온갖 것에 쉽게 질리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클레흐에게 더는 빨아먹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비앙카는 이별을 선언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에요! 내가 더 잘할게요! 떠나지 마요! 잘못했어요!’
울며불며 매달려 봤다.
치맛자락을 붙잡고 질질 늘어져도 봤다.
하지만 비앙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클레흐,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남한테 기댈 생각만 하지 말고 스스로 좀 뭘 해보는 거 어떠니?’
동경하고 선망했던 그녀의 잔혹함은, 날 끝이 클레흐를 향하는 순간조차 뾰족하기 짝이 없었다.
마지막 비웃음을 끝으로 비앙카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클레흐에게 등을 돌렸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남긴 것은 폭리에 가까운 수수류와 막대한 채권뿐이었다.
이 정도라면 클레흐가 비앙카를 원망하고 증오할 이유로서는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실은 알고 있었다.
클레흐는 비앙카가 그녀를 버리는 순간부터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의 입꼬리에 매달린 비웃음과 싸늘한 시선이 심장을 꿰뚫는 순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야말로 에레제베트를 대신해 클레흐를 지배해 줄 유일한 마녀.
홀로 설 수 없이 휘청이는 나약함을 붙들어 매어 줄 유일한 여왕.
비앙카는 죽었다.
이제 누구를 기다리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클레흐는 눈을 떴다.
전신을 송곳으로 난자하는 듯한 고통이 의식의 각성을 돕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장소가 지하감옥이며, 자신의 몸이 움직일 수 없게 구속되어있음을 깨닫는다.
“큭…!”
동시에 오랜 기억 속 트라우마가 클레흐의 전신을 축축한 식은땀으로 물들인다.
지하실은 싫다. 무섭다.
몸이 묶여 있는 것도 싫다. 두렵다.
“놔, 놔줘! 이… 씨발! 풀어! 풀어…!”
반쯤 패닉에 빠진 채 발버둥치는 클레흐와 더욱 죄어 오는 쇠사슬.
이미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심박은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구역질과 두통을 동반한 공황발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누군가 거칠게 휘어잡는다.
과호흡 탓에 헐떡이는 숨과 눈물로 흐려진 시야.
거기에 비치는 것은 에레제베트나 비앙카가 아니었다.
조금 전 클레흐를 손 하나 까딱 못하게 제압해버렸던 향수의 마녀.
“클레흐 아스모데. 지금부터 제 질문에 순순히 답하는 게 좋을 거에요.”
그녀는 서릿발 같은 시선과 심장이 얼어붙어 버릴 것 같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시우 어딨어요.”
2.
알비레오는 지하실에 갇힌 클레흐에게 자백의 시를 걸어주었다.
자율방어가 작동하지 않는 이 지하실이라면 속마음을 모조리 실토하게 되니 더없이 훌륭한 신문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공황발작을 보이며 난동을 부리던 클레흐는 이미 자백의 시에 걸려있는 상태임에도 아무 말도 답하지 않았다.
신시우의 행방에 대해 30분간이나 아멜리아가 캐물었지만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은 것이다.
진전되지 않는 상황에 아멜리아가 이를 악물고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자백의 시는 걸어두었어요. 아마 그녀의 신체가 근본적으로 항마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비레오는 조심스레 자신의 추측을 덧붙였다.
비록 이 지하감옥에서 제한되었다 해도 그녀의 몸에 흐르는 혈류는 그 자체로 강력한 마법의 결과물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클레흐의 몸에 있는 잔 상처는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회복되었으며 엉망이었던 마법 회로 역시 실시간으로 복구되는 중이었다.
더군다나 온갖 사술의 정점에 도달한 흡혈귀인 만큼 정신마법에 대해선 자체 방호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더 강한 마법은 없는 건가요?”
차갑게 굳어가는 아멜리아의 목소리.
그녀의 표정에 결의가 맺히는 것을 본 알비레오는 깨달았다.
신시우의 문제가 걸린 이상 아멜리아는 고문도 불사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
어차피 상대는 공적이다.
아멜리아가 주리를 틀건 토막을 치건 알비레오는 딱히 괘념치 않았다.
조만간 제 발로 나타나겠거니 해서 숨기고 있던 것인데.
그러나 더 이상 초조해하는 아멜리아를 보며 모르쇠로 일관하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알비레오는 눈을 꾹꾹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아멜리아 양.”
“…….”
“그녀를 심문해봐야 딱히 나오는 건 없을 거에요.”
“…네?”
이런 굴욕적인 자백을 하게 만든 데네브를 용서치 않으리라 다짐하며 알비레오는 조심스레 자신이 아는 진실을 입에 올렸다.
“사실….”
알비레오는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 무덤까지 안고 갈 예정이었던 정보를 털어놓았다.
물론 이 불미스러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클레흐에게까지 들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고 말이다.
즉, 시우와 데네브가 함께 있다는 것.
둘이 여러 차례에 걸쳐 육체적 관계를 맺었다는 것.
데네브가 호출도 묵살하고 위치도 감추고 있으며 따라서 알비레오도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까지.
어지간하면 진실을 죄다 실토하고 싶었지만, 쾌감을 공유한다는 것만은 감추었다.
“…그러니 아마, 진조의 마녀는 이 사건과 연관이 없을 거에요…. 미안해요, 더 일찍 말해주지 못해서.”
알비레오는 면목이 없다는 듯 아멜리아 앞에 고개를 숙였다.
조금 더 일찍 말했다면 그녀의 마음고생은 없었을 것이다.
“…….”
기나긴 침묵 끝에 고개를 들었을 때.
아멜리아가 신시우에게든 알비레오에게든 화가 난 상태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상하네요.”
하지만 아연한 표정을 짓던 아멜리아는 오히려 이 상황이 미심쩍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이상해요.”
“…….”
알비레오는 동정심과 동병상련을 느꼈다.
그녀도 자신의 여동생이 시우와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을 때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신시우를 믿고 있는 아멜리아도 같은 마음이겠지.
“성교 자체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어요.”
“네?”
시우는 사정할 때 마력을 복제한다.
따로 자기화 과정이 필요 없는 고순도의 마력을.
그렇다면 두 사람이 모종의 위기에 빠졌고 지속적인 마력의 충전이 목적이라면?
“…….”
알비레오는 덧붙여진 아멜리아의 추측에 귀 기울였다.
솔직히 여동생과 사위를 믿고 싶은 마음은 억측이나 다름없는 아멜리아의 가설에 적극 찬동하고 있었으나, 역시 정보 자체는 너무 부족하다.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8시간의 주기를 거의 칼같이 지키는 관계.
아멜리아는 물론 주위 연인들에게도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진 시우.
마찬가지로 알비레오의 염파를 수신 차단 중인 데네브.
시우가 적어도 여성관계에 대해 자제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이 걱정할 것을 알면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질 인물인가?
마찬가지로 데네브가 충동적이고 철딱서니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마땅한 이유 없이 사랑하는 쌍둥이의 애인과 살을 섞을 정도로 분별이 없는 인물인가?
그리고 때마침 잡혀들어온 공적.
둘 사이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인가?
알비레오는 쾌감의 연동이라는 낯부끄러운 사건 탓에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조금 더 물어보겠어요. 거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네, 저도 그 당시 정황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볼게요.”
술렁이는 마음.
알비레오 역시 아멜리아를 돕고 싶지만 당장 급한 일이 있었다.
슬슬 시간이 된 것이다.
“저, 저는 잠깐 올라갔다 올 테니. 조사를 부탁할게요.”
알비레오는 허벅지를 찰싹 붙인 채 제 방으로 달려나갔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