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1.
시우가 없어진 뒤 정확히 하루가 지났을 무렵부터 아멜리아는 이 사태가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고 단정 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시우다.
고작 쪽지 하나를 남겨 놓고 하루 내내 밖에서 떠돌 리 없다.
소피아에게 부탁해 게헨나 전역에 ‘까마귀’를 펼쳐 두었으며 그의 지인들을 하나하나 찾아 행방을 물었다.
샤론, 타카쇼, 키벨리 페리윙클, 예소드 백작 더불어 제머나이 저택에도 두 번이나 방문했다.
그러나 누구도 시우를 만났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런 수확이 없이 이튿날이 되었을 때부터는 아멜리아는 무너질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확신 지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마디 말도 없이 훌쩍 떠나갔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멜리아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시우의 일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모조리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도와주세요.”
시우의 지인들을 찾아가며 도움을 구했고 게헨나를 샅샅이 뒤졌다.
그가 충동적으로 티페레트 공작을 만나러 갔을 가능성을 생각한 샤론은 현세의 수아 지부장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도 사흘이 지나도 시우의 자취는 여전히 발견되지 않았다.
정처 없이 시우를 찾아 게헨나를 떠돌던 중 소피아로부터 도착한 연락.
수상쩍은 인물이 게헨나의 공백 지대를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전언이었다.
아멜리아는 그 즉시 소피아가 해당 마녀를 발견한 단풍나무 숲으로 달려갔다.
게헨나에 추방자나 공적이 신분을 숨긴 채 밀입국하는 것은 왕왕 있는 일이니 그저 밀입국한 추방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직감이 호소했다.
사라진 시우와 공교롭게 발견된 밀입국자, 이 둘 사이에는 분명 연결고리가 있다고.
어쩌면 그저 아멜리아의 소망이 투영되어 잘못된 인지 도식을 그려간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만나 보아야 알 일이다.
소피아가 발견한 마녀와 대면한 아멜리아는 즉시 전투를 개시했다.
상대는 공적이었다.
몇 명의 인간을 해친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짙은 혈향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전투는 짧았다.
애초에 아멜리아의 입자 마법은 대응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런 특색 없이 내리는 빗물은 아멜리아의 파동에 공명해 꽃을 피우는 입자의 씨앗.
비를 무방비하게 맞는 순간 마법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마력의 주도권이 아멜리아에게 넘어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비에 ‘아무런 특색이 없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전 지식이 없고 유달리 신중한 상대가 아니라면 손쉽게 요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전투라 하기도 허망하게 끝난 싸움의 결과는 손쉽게 아멜리아의 승리로 돌아갔다.
아멜리아는 그녀의 신병을 구속해 제머나이 저택으로 도착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폐관 중이던 알비레오까지 뛰어나와 아멜리아를 맞았다.
알비레오는 살짝 황망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공적을 잡아왔어요.”
“네…?”
한편 알비레오의 시점.
아멜리아가 게헨나에 밀입국한 ‘진조의 마녀’를 포획했다는 급보를 보고받은 알비레오는 며칠째 시름시름 앓던 방에서 나와 손님을 맞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이 시점에서 아멜리아를 보는 것은 심적으로 편치 않았다.
일전 아멜리아가 ‘시우가 실종된 것 같아요’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찾아왔을 때도 죄악감을 숨기며 그녀를 돌려보내야 했으니 말이다.
아무리 아멜리아가 시우의 실종으로 걱정하고 있거니와 데네브와 사랑의 도피 여행을 떠났다는 말을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단순히 도의적인 문제나 체면치레를 넘어서 백작가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킬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대단한 일을 하셨네요.”
그러나 유명무실한 의무일지라도 제머나이 가문은 게헨나 내부로 침공한 공적의 처분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지하감옥이었으니 말이다.
“감옥에 가둬두고 심문하고 싶어요.”
알비레오는 다시 눈을 끔뻑이며 아멜리아가 대롱대롱 끌고 온 공적을 바라보았다.
아멜리아는 상처 하나 없는 반면 상대는 몰골이 말이 아니다.
당장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지만 체내의 마력회로가 곤죽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저 상태라면 한동안 제대로된 마법을 구사하긴 힘들 것이다.
진조의 마녀라면 21 위계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손쉽게 제압하다니….
새삼 아멜리아가 그 대단한 티페레트 공작과 같은 동 위계의 마녀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실종된 시우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그녀의 전투력과는 별개로 알비레오는 아멜리아의 말이 억측이라고 판단했다.
아마 아멜리아는 시우가 실종된 것으로 착각하고 게헨나를 샅샅이 뒤졌을 것이고.
이 얼빠진 공적은 별 경각심 없이 게헨나를 쏘다니다 두들겨 맞고 끌려온 것이겠지.
물론 그걸 티 낼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제머나이 백작 이외에 마법 사용이 불가능한 지하감옥인 만큼 제대로 된 신문을 위해선 알비레오의 조력이 필요할 것이다.
“네, 감옥을 개방해 드릴게요. 물론 신문도 도와드릴 수 있어요.”
“고마워요.”
원래 알비레오는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도움을 주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어떤 이익이 떨어질지를 먼저 고려하는, 뼛속까지 사업가 체질인 것이다.
그러나 아멜리아에겐 말하지 못한 마음의 빚이 있기에 알비레오는 순순히 협조를 약조했다.
2.
각종 문화로 전승되는 흡혈귀의 공통된 특징은 어쨌거나 잠을 잔다는 것이다.
성수를 뒤집어 썼건, 심장에 말뚝이 처박힌 나머지 긴 잠에 빠지게 되었건, 음침한 관작에 들어가 낮잠을 자건.
특히 마지막은 흡혈귀의 트레이드 마크쯤으로 여겨지기까지한다.
그러나 클레흐 아스모데는 수면을 혐오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잠이 들었을 때 반드시 뒤따라오는 악몽을 혐오했다고 설명하는 편이 더욱 직관적이겠지.
견습마녀 시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공부방과 어머니이자 스승님, 에르제베트 아스모데가 보인다.
흉악한 공적조차 제 견습마녀는 새끼 품듯 아낀다고들 하지만 모든 마녀 사제가 그런 단란한 유대 관계를 쌓는 것은 아니었다.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 하겠어? 병신 같은 년. 너 같은 게 어쩌다 내 견습마녀가 됐을까.’
뾰족하게 세운 스승의 손가락이 콕콕 정수리를 찌른다.
오전에만 수차례 얻어맞은 클레흐의 뺨 한쪽은 벌겋게 부어있었고, 아물 새도 없이 거듭 터져나간 입술에선 피 대신 진물이 흘렀다.
‘…죄송해요. 어머니.’
에르제베트는 주눅이 잔뜩 든 목소리로 답하는 클레흐의 뺨을 거칠게 휘어잡았다.
클레흐의 어깨가 돌처럼 굳는다.
학습된 공포가 불러오는 반사적인 반응을 만족스러운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비웃음을 머금는 에르제베트.
‘예언기관도 순 돌팔이가 따로 없다니까? 차라리 널 죽여버리고 새로운 견습마녀를 점지받을까 싶어. 클레흐, 위대한 아스모데의 이름에 네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니? 정말? 진심으로?’
단순한 폭행보다도 날이 선 말이 클레흐를 난자한다.
위대한 아스모데라.
위대했던 아스모데겠지.
본디 아스모데 가문은 마녀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드높은 위세를 자랑했었다.
흡혈귀의 전승과 설화가 범 대륙적으로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역대 아스모데가 얼마나 유세를 부리고 다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는 1,000명에 가까운 인간을 밤의 권속으로 부리며 매일 같이 음침한 성에서 호화로운 피의 만찬을 즐겼던 때도 있었다니 말이다.
그러나 케테르가 ‘공적’의 개념을 만들고 무분별한 인체 실험을 제함과 동시에 아스모데 가문은 뒤처지기 시작했다.
아스모데 가의 자성마법은 대량의 혈액을 요구한다.
전쟁 포로와 평민을 마구잡이로 권속 삼고 갈아 넣던 연구 방식이 불가능해졌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다리를 저는 개처럼 쩔뚝이게 된 아스모데의 피에는 어느덧 자부심과 긍지 대신 열등감과 히스테리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클레흐의 스승 에르제베트는 그 부정한 피를 바짝 졸여낸 듯한 인물이었다.
100년에 달한 일평생에 하나의 위계도 올리지 못했던 그녀는 제 견습마녀의 몸에 상처를 새기며 자존감을 채워나갔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클레흐의 봉긋한 유방이 성장을 끝내고 성인이 되었을 때부터 에르제베트는 묘한 눈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채찍으로 등을 내려치던 에르제베트는 클레흐를 바라보며 탁한 숨을 쉬었다.
아주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 숨결이었다.
‘그만…! 스승님! 이러지 마세요…!’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간 클레흐는 마루에 내던져졌고,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쳤다
하지만 견습마녀에 불과했던 클레흐가 에르제베트를 떨쳐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던 일이다.
‘가만히 있어! 너는 내 견습마녀니까. 스승의 말을 들어야지.’
다행이라면 이후로 멍 자국이 조금이나마 옅어졌다는 점.
불행이라면 살갗의 공백을 뾰족한 이빨 자국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
사실 어느 쪽이 불행이고 어느 쪽이 다행인지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이미지는 사방이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침대.
‘클레흐, 이리 오렴. 기어서.’
그 위에는 헐벗은 스승이 보인다.
옆 선반에는 여성에게 극심한 치욕을 주기 위해 제작된 도구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단순한 변태를 넘어 극심한 사디스트였던 에르제베트는 자신의 견습마녀를 취향대로 주무르는데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싫니?’
클레흐의 떨리는 눈동자가 그것을 훑었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스승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가 그녀를 만족하게 한다면 가혹한 학대가 그나마 잦아들었으니까.
‘걸레 같은 년, 처음엔 귀족 아가씨처럼 내빼더니. 이게 네 본성인거야. 너도 좋지?’
혹은 그녀의 장난감이 되어 비루한 신음을 내지르거나 말이다.
빌어먹을 스승 년은 끝까지 제멋대로였다.
수년 간 클레흐를 노리갯감으로 삼으며 욕망을 발산하던 에르제베트는 그마저도 질린 것인지 심장에 칼을 꽂아넣을 기회도 주지 않고 낙인을 넘기곤 사라져 버렸다.
흔하디흔한 유언조차 남기지 않은 채.
클레흐는 방황했다.
스승은 사라졌지만 클레흐는 그녀가 남겨놓고 간 또 하나의 낙인을 느꼈다.
홀로 남겨진 클레흐는 우습게도 악랄했던 스승의 공백에 혼란을, 심지어 그리움과 사랑까지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 성욕의 도구 정도로 활용되었던 클레흐가 학습한 유일한 인간관계는 자주성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채 강압적인 지배자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해방되었던 노예가 다시 노예가 되길 원하는 심리처럼.
클레흐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자유에 해방감이 아닌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안녕? 네가 내 새로운 비지니스 파트너구나? 이름이 뭐니?’
그런 클레흐의 삶을 완전히 바꿔준 연인이 비앙카 벨릴리, 욕망의 마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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