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1.
게헨나의 이름없는 공백 지대.
단풍나무 숲 한가운데로 숨어든 클레흐는 숨죽인 채 이를 갈았다.
계획은 성공했다.
하지만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반 푼짜리 성공이었다.
우선 밀입국 이후 박쥐를 통해 신시우의 위치를 어렵지 않게 확보했다.
어항의 사용법은 단순하다.
마력을 부여해 던져주면 반경 5M의 인간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구조다.
따라서 클레흐는 적발 위험을 안고 그 뒤를 쫓는 것보다 폭탄을 떨어뜨리는 드론처럼 사역마를 활용하는 길을 택했다.
계획대로라면 신시우를 어항에 밀어 넣은 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완전범죄여야 할 텐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가 데네브 제머나이와 함께 있었다는 점이다.
이래서야 어항의 효력이 반감된다.
마녀를 참칭하는 반푼이 남자라면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어도 백작쯤 되면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쌍둥이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니 완전한 상태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클레흐가 뒤늦게 투하 중지 명령을 내렸을 때 박쥐는 이미 어항을 투척한 뒤였다.
그 결과 힘겹게 게헨나까지 기어들어온 마당에 소득이 아예 없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부닥쳤다.
사실 전적으로 클레흐의 잘못이었다.
아무리 기척을 죽이느라 본신의 힘을 제한하고, 추가로 역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은폐 기능을 덕지덕지 붙이는 바람에 호환성이 떨어졌다지만 사역마의 통제에 실패했으니.
하지만 클레흐는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기보다 사역마를 탓하길 택하는 성격이었다.
“멍청한 새대가리 새끼!”
참고로 박쥐는 포유류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쏘아져 과녁에 꽂혔다.
무고하게 휘말린 백작과 함께.
더 머문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이상 무사히 게헨나를 빠져나가는 것만을 생각해야 한다.
계획이 반쯤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신중을 기한 까닭에 누군가 그녀의 밀입국을 눈치챘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미리 환술을 사용해 포섭해 둔 밀수꾼은 다음 출항이 3일 뒤임을 알려주었다.
사건 당일로부터 3일이 순조롭게 지나갔으니 이 지긋지긋한 토굴을 벗어나 해가 저무는 대로 보더 타운으로 향하면 된다.
투덜거리며 토굴 안에서 몸을 굴리던 클레흐.
“비앙카….”
불현듯 잃어버린 애증의 대상이 떠오른다.
누구보다 냉혹하고, 신중하며, 잔인한 그녀였다면 이 정도의 일은 아주 손쉽게 성공했겠지.
‘봤지?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하는 메마른 비웃음이 환청처럼 맴도는 것 같았다.
“닥쳐요, 나만의 방식이 있으니까.”
클레흐는 머리를 흔드는 것으로 잡념을 털어내고 임시 은신처로 파두었던 토굴 밖으로 기어 나왔다.
3일 내내 좁은 땅굴에서 지내느라 핏빛의 적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는 클레흐는 일견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실 클레흐는 공적 중에서도 강자에 속한다.
21 위계, 전투에 특화된 온갖 자성 마법.
클레흐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다소 허술해 보이는 언행 탓에 그녀를 노리는 공적은 많았다.
하지만 클레흐는 살아남았으며 계승 직후부터 핏빛의 길을 걸어온 만큼 풍부한 전투 경험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 클레흐가 밀입국부터 은신까지, 번잡스러운 수단을 쓴 것은 이곳이 ‘마녀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마녀는 마법을 신봉하고 맹신한다.
대를 걸쳐, 목숨까지 바쳐가며 매달리는 위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밀입국한 ‘공적’이 땅굴 따위를 파고 은신해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책이 상책인 상황.
예상대로 사흘만에 느껴보는 선선한 공기 속, 달리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까악
별안간의 울음소리에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던 클레흐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엔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고개를 휙휙 돌리며 단풍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있었다.
“씨발, 깜짝아….”
신경이 곤두서 있던 클레흐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순막이 껌뻑이는 눈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기분 나쁠 정도로 시커먼 눈동자였다.
-퍼덕! 퍼덕! 퍼덕!
그리고 한 마리, 두 마리.
그 주위로 까마귀가 날아드는 것을 본 클레흐는 그 즉시 무엇인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까마귀는 행동하고 호기심이 많고 지능도 높다.
그러나 영역을 침범당했을 때 내는 경계음도 아닌, 이렇게 노골적으로 몰려들며 조용히 바라보는 것은 명백히 이상하다.
“젠장…!”
이 까마귀는 모두 사역마다.
즉, 누군가에게 존재를 들켰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클레흐는 손끝의 핏방울을 산탄총처럼 튀기며 까마귀를 날려버렸다.
-까악! 까악! 까악!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마법에 의해 간단히 학살당하고 검은 깃털이 너울거리며 눈이 쌓인 숲으로 떨어진다.
그 비명에 호응하듯 가지 틈새으로 올려다 본 하늘을 까맣게 물들이는 까마귀떼.
“미친….”
그러나 클레흐에게 아연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단순히 게헨나 전역에서 몰려드는 까마귀 탓이 아니었다.
어수선한 바람과 함께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다.
거대한 폭풍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듯 꽤 거리가 있음에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존재감.
어마어마한 마력을 두른 기척이 숨길 생각도 않은 채 가까워진다.
거칠고 난폭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여파만으로 숲이 울었다.
귀곡성을 내며 나부끼는 폭풍 속에서 마력을 끌어올리는 클레흐 앞에 사뿐히 착지한 한 마녀.
“…….”
마주했을 뿐인데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진다.
이 감각은 일전 티페레트 공작의 무자비한 사냥을 엿보았을 때나 느꼈던 것.
어떤 기지를 발휘해도 좁힐 수 없는 까마득한 벽을 느끼게 하는 경지.
밝은 금발에 하늘색을 띠는 눈동자.
소름 끼치는 아름다움으로 요정을 연상케 하는 그 마녀는 오싹한 무표정이었다.
아직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음에도 들끓는 분노를 느끼게 할 만큼 말이다.
그녀의 정체라면 알고 있다.
비앙카가 수집했던 신시우의 주변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향수의 마녀, 아멜리아 메리골드.
그러나 클레흐로서는 살짝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비앙카가 수집한 자료에도 그녀에 관한 내용이 있었지만 그다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클레흐가 귀동냥으로 들은 ‘향수의 마녀가 게헨나에서 난동을 부리다가 남작 위를 박탈당했다’라는 소문 쪽이 더욱 자세할 정도다.
아무튼 이렇게 벼르고 있었다는 듯, 투지 만반으로 등장할 이유가 짐작 가지 않았던 것이다.
“뭐죠?”
클레흐는 짚어내지 못한 가능성을 나열했다.
예상외로 신시우와 친분이 있을 가능성.
신시우와 데네브 제머나이가 어항을 깨고 나와 경위를 전했을 가능성.
하지만 이 정도로 사태를 파악하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전투에 돌입하지 않았으니 대화로 시간을 끌고 도망칠 빈틈을 노려야 한다.
“울어라.”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향수의 마녀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대신 영창과 함께 희푸른 마력 반사광이 눈가에 맺히며 소나기가 내리듯 일대에 비가 쏟아져 내린다.
“썅년아! 말로 해요! 흘러넘쳐라, 선혈이여!”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클레흐는 즉각 온몸의 마력혈(魔力血)의 봉인을 해방했다.
기척을 숨기기 위해 극도로 억제됐던 피가 미쳐 날뛰며 전신에 힘을 공급했다.
클레흐의 자성 마법은 진조의 마녀라는 이명에 걸맞게 혈액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녀의 몸에 흐르는 마력혈은 단순한 피가 아니다.
한 방울을 뽑아내기 위해 수백 명 분의 혈액을 정제하고 증류한 혈정(血精).
응축된 힘과 생명력이 오롯이 깃든 그녀는 통상적인 영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신체를 강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속하는 혈류.
그 탓에 피부 위를 튀어나오는 새파란 정맥과 더더욱 붉게 변한 눈동자가 모든 현상을 슬로우 모션으로 인식한다.
클레흐는 짐승처럼 상대를 덮쳐가는 그 짧은 순간 단검을 만들어내었다.
핏빛의 얇은 도신을 지닌 이 단검 역시 그녀의 혈액으로 이루어진 것.
강적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도 잠시, 선공권을 잡았다.
완벽한 거리를 잡았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일격이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일견 무방비 상태로 보이는 적에게 달려드는 이 순간만큼은 승리를 확신한다.
극독을 바른 것이나 다름없는 무구로 몇이나 되는 마녀의 심장을 꿰뚫어왔던 것이다.
“뒤져!”
매섭게 휘둘러진 단도가 가녀린 목에 처박혔을 때.
클레흐는 자신의 단정이 섣불렀음을 깨달았다.
부서지듯 흩어지는 신형.
클레흐가 목표로 삼았던 적의 모습은 본체가 아닌 세밀한 입자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분신이었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전장 이탈을 준비하는 클레흐.
-쾅!!!
초인적인 힘이 응축된 다리가 지면을 박차는 순간 채굴용 TNT가 터진 것처럼 폭발이 일어난다.
공기가 터져나가는 소닉붐이 거칠게 숲을 뒤흔들었다.
공격도 아닌 순수한 이동의 반작용만으로 이만한 후폭풍이 오는 것이다.
“좆될 뻔했네!”
아직 완전히 상황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한숨 돌렸다.
일단 숨어들 수만 있다면 기척을 숨기고 게헨나를 빠져나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딱!
“뭐…?”
그러나 순식간에 숲을 넘어 사라지려던 클레흐는 손끝이 튕길 때 나는 맑고 깨끗한 소리를 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으니까.
이윽고 그 불길한 소리의 근원지가 자신의 몸 ‘내부’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크학!”
깨끗한 파동이 몸을 뒤흔드는 순간 클레흐는 속도를 잃고 그대로 숲의 한가운데 처박혔다.
일순 마력에 대한 장악력을 완전히 빼앗긴 것이다.
“크흑… 크으윽…!”
아무리 마력을 끌어 올려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새어나간다.
그제야 클레흐는 향수의 마녀가 이미 마법을 전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갑자기 쏟아져 내리던 비.
언뜻 아무런 마력 작용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것을 몸으로 받아낸 순간 클레흐는 이미 마법에 휘말렸던 것이다.
이 정도의 강력한 마법을, 이 정도로 은밀하게 사용할 수 있다니.
경악하는 클레흐의 앞에 마침내 향수의 마녀가 본 모습을 드러낸다.
진흙에 처박힌 클레흐는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보았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한 점의 자비도 용서도 내비치지 않는, 경멸 어린 냉혹한 시선.
정신과 몸이 모두 한계에 도달해도 무참히 짓밟아 줄 것 같은 여왕의 품위.
“울어라.”
향수의 마녀는 망설임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두 번째 영창과 동시에 비에 맞닿은 모든 곳에서 야생화가 돋아났다.
아름답다.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 감상을 마지막으로 클레흐의 의식이 잘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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