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1.
크라켄이 바다로 도주했다고 해서 낮이 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날은 어두웠고 크라켄이 고통으로 몸을 뒤척일 때마다 작은 해일이 일어나며 선착장을 덮쳤다.
쫓아오는 상위포식자가 사라진 날치떼가 광란 상태에서 벗어나 유유히 주위를 날아다니는 와중.
시우는 선착장 인근에서 바닷속을 살폈다.
바라본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데네브의 말대로 ‘심해의 마녀’라는 이명이 달리 붙은 것도 아닐 것이고, 무엇보다 크라켄의 외양만 봐도 검게 일렁이는 바닷속은 놈의 홈그라운드.
수상전에 경험이 조금도 없는 시우가 쫓아가 추가타를 날린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선택지다.
데네브를 데려와 한 번 더 마법을 시전하는 것도 문제가 있었다.
첫째로는 날치떼가 돌아다니는 와중에 ‘충전’을 할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점.
둘째로는 마법에 소모되는 자원이 단순히 마력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마력을 끄집어내 사용하는 건 영체의 회로에 무리를 준다.
대규모 연산에 필요한 정신력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모 자원이기에 보충이 필요하다.
시우가 거듭 증폭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해서 무한대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결국 아무것도 못 한 채 간혹 날아드는 날치떼에게서 데네브를 지키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날이 밝으며 도시가 복구되고.
이번에는 예배당이 아닌 근처 상인의 집을 휴식 장소로 삼았다.
침구류도 깃털을 듬뿍 넣은 고급품이었고 집안의 와인도 교회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했다.
하지만 모처럼 괜찮은 침대에 걸터앉은 데네브의 표정은 썩 밝지 못했다.
그녀로서도 복잡할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시우와 성관계까지 하고 나서 사용한 최고 출력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콧대 드높은 백작님이시니 자존심에도 스크레치가 생겼겠지.
그렇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양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아쉽네요.”
사실 시우도 조금 싱숭생숭했다.
이렇게 된 이상 추가적인 마력충전은 필수불가결.
솔직히 말해 남자의 본능은 환호의 샤우팅을 외치고 있으나, 지금쯤 시우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알아차리고 가슴 졸이고 있을 연인들, 특히 쌍둥이를 생각하면 면목이 없어지는 것이다.
“시우 군, 혼자 생각 좀 할게요.”
“네?”
“잠깐 자리를 비켜주겠어요?”
“알겠습니다. 옆방에서 쉬고 있겠습니다.”
시우가 나가는 것을 본 데네브는 술을 홀짝였다.
밤샘 연구를 한 것처럼 열기가 오른 이마를 부여잡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쉰다.
“하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모든 마력을 담아 가했다.
예상외의 사건이 있었다면 설마 그걸 맞고도 살아남은 괴수가 그대로 바다로 내뺐다는 것.
크라켄이 보여주었던 회복력을 고려해본다면 밤의 3시간 + 낮 동안의 4시간은 모든 부상을 회복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시우와 몸을 섞는다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했는데 결국 크라켄을 사냥하지 못한 이상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다.
크라켄의 도주력과 재생력.
이 둘보다 앞서는 중요한 포인트는 데네브의 화력 부족이다.
일격에 처치할 수 있었더라면 도주도 재생도 허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언니만 있었더라면….”
오늘의 전투를 통해 데네브는 알비레오의 빈자리를 통감했다.
데네브는 이토록 대규모 마법을 홀로 전개해 본 적이 없었다.
둘이서 하나인 제머나이의 특성상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데네브가 홀로 펼치는 대규모 마법 전개에 익숙해지는 것.
즉, 같은 마력을 갖고도 더욱 효율적인 방법으로 화력을 뽑아내는 것이 유일한 활로.
그걸 위해서는 시행착오가 필요했으며 충전을 위한 시우와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그 배덕적인 행위를 앞으로 몇차례나 더 해야할지 데네브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꿈틀거리는 데네브의 눈썹.
자리에서 일어난 데네브는 시우가 기다리고 있는 옆방의 문을 두들겼다.
“네, 데네브 님.”
곧장 들려오는 대답.
데네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제처럼…. 준비해주세요.”
2.
저녁 식사 이후 제머나이 백작가의 공부방.
쌍둥이는 오늘도 샤론이 내준 과제 폭탄을 끌어안고 씨름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두툼한 마도서가 펼쳐진 채 베를린 장벽처럼 오딜과 오데트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그때, 컨닝방지용 책 한쪽으로 조막만 한 오데트의 얼굴이 쏙 나타났다.
“언니언니.”
“왜 오데트, 안 알려줄 거야. 네 힘으로 해. 이것도 내기였던 거 기억 안나?”
두 팔로 쓱 과제를 가리며 여동생의 컨닝을 방지하는 오딜.
하지만 지금 오데트가 관심을 두는 것은 발랄한 글씨체로 쓰인 오딜의 레포트가 아니었다.
“아이참, 그게 아니라 들어봐 언니.”
“뭔데?”
“요즘 스승님…. 조금 이상하지 않아?”
“응?”
갑자기 말을 걸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여지없는 잡담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오딜은 숙제를 덮어 놓고 둘 사이에 놓인 책을 치웠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시도 빠짐없이 함께했던 여동생이다.
살짝 들뜬 듯한 오데트의 목소리만 들어도 과제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내용이 전개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말 그대로야.”
쌍둥이의 스승님은 둘이지만 작은 스승님이 아니라 스승님이라고 칭할 땐 알비레오를 의미한다.
“그니까 뭔데!”
답답해하며 테이블을 덜컹거리는 오딜.
중대한 비밀을 꺼내놓듯 조심스레 말하는 오데트.
“스승님이 사춘기가 온 것 같아.”
“…뭐?”
오딜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춘기? 갑자기?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더 정확히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다는 말이야.”
“뭐????”
큰 스승님 쪽이건, 작은 스승님 쪽이건 하나같이 성적인 행위에 눈길조차 주지 않던 정통파 마녀이다.
그런 스승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허무맹랑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그렇기에 더욱 관심이 가는 대화 주제다.
“그게 무슨 말이야?”
“들어 봐. 언니는 요즘 이상한 점 하나도 못 느꼈어?”
도리어 답답하다는 듯이 구는 오데트의 태도에 오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 식사 때도 저녁 식사 때도 스승님을 뵀지만, 평소와 다를 건 딱히 없었다.
오딜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마녀의 표본.
멋지고 존경스러운 스승님이었다.
하지만 오데트의 촉은 날카로운 편이다.
예전 오데트 몰래 조수님과 데이트할 때마다 칼같이 눈치채지 않았던가?
잠깐 고민하던 오딜은 오데트의 손목을 잡고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실은 일주일쯤 전에 갑자기 여쭤볼 것이 생겨서 큰 스승님의 방을 찾았었거든?”
“너 혼자?”
“응, 근데 그때 이상한 소리를 들었어.”
“이상한 소리?”
“언니, 이 말을 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어. 스승님의 위신이 걸린 문제거든….”
무서운 이야기를 할 때처럼 낮은 톤으로 목소리를 깔고 말을 이어가는 오데트.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머뭇거린다.
“오데트,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빨리 좀 말해!”
“…소리를 들었어.”
“소리?”
“야한 소리.”
오딜의 눈이 띠용 커졌다.
설마설마….
“혹시 섹…스?”
“아니야, 언니. 그런 격렬한 소리는 아니었어.”
만약 그랬더라면 살이 부딪치는 음란한 소리나 도저히 죽이지 못하는 신음, 혹은 거친 숨소리가 들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데트가 들었던 것은.
“신음을 참는 소리? 아니다. 흥분했을 때 나는 콧소리 있잖아.”
“네 말은…. 스승님이 자기 위로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응, 아마 그런 것 같아.”
오데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오딜은 생각에 잠겼다.
저택이 넓긴 해도 스승님들과 쌍둥이는 함께 사는 가족이다.
쌍둥이의 일탈 행각이 스승님들의 레이더에 포착됐던 것처럼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자상하고 고아한 스승님이 자위를 하고 있었다는 건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요즘에 잘 보면 가끔 멍하니 계시기도 하고,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비우시는 일도 있잖아. 가끔 한숨도 푹푹 쉬시고.”
“그건 볼 일이 있다고 가시는 거잖아. 스승님은 항상 사업으로 바쁘시고.”
“아냐 언니, 그건 뭔가 달라. 그냥 고민할 때랑은 뭔가 다른 뭔가야.”
“흐음….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오딜은 무심코 지나쳤던 징조와 오데트의 증언이 배합되자 합리적인 추론이 시작된다.
확실히 요즘 큰 스승님은 차를 마시다가도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식사 중에도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리.
“오데트, 우리 스승님도 그럴 수 있어. 게다가 성적인 행위가 나쁜 건 아니잖아. 도리어 사랑스럽고 소중한 거지. 견습마녀인 우리도 조수님과 어른의 계단을 밟았는걸.”
“그건 그렇지….”
“스승님도 그럴 때가 온 거야. 우리는 티 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해해 드리면 되는 거지.”
단순히 남녀관계를 놓고 보자면 스승님보다 훨씬 조숙한 오딜이다.
스승님의 뜻밖의 모습을 보고 실망감을 느꼈을, 혹은 놀랐을 여동생을 다정하게 다독여주었다.
마치 아들의 첫 자위 사실을 알게 된 엄마아빠의 회의처럼 되어 버렸다.
하지만 오딜의 위로에도 오데트는 영 속 시원한 표정이 아니었다.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니, 상대가 누구일 것 같아?”
“오데트, 자위한다고 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비약이야.”
“그래도 백 년 넘게 안 그러셨던 스승님이 갑자기 바뀌셨다면 상대가 있지 않을까?”
별안간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
“…….”
공교롭게도 둘은 머릿속으로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 설마.”
“에이, 그 정도는 아니겠지.”
오딜과 오데트는 마주 본 채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있나.”
“맞아맞아, 언니.”
3.
그 시각 저녁 식사를 끝내고 마법 연구를 준비하던 알비레오는 침대에 드러누운 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은 기분 좋은데 심적으로는 괴로운 기묘한 상황이다.
알고 싶지 않았다.
남녀의 육체적 관계가 가져오는 열락 따위, 사위의 물건이 어떤 느낌인지 따위.
전혀, 조금도, 털끝만큼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잠깐의 애무 이후 굵고 뜨거운 물건이 체내를 파고드는 것이 느껴진다.
“으으으…..”
오늘 아침 먹고 하더니 이제는 저녁 먹고 하는 걸까?
아주 왕성하기도 하다.
게다가 첫 경험은 이미 치렀다며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듯 고통은 간데없고 간드러진 쾌락만이 뱃속을 꽉 채운다.
“데네브으읏…!”
백번 눈감아 양보해 한 번은 실수라 쳐도 두 번부터는 더이상 실수가 아니게 된다.
심지어 낙인의 공명을 바탕으로 데네브의 위치를 역추적하려고 했으나 아주 철저하게 막고 있는 것인지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데네브와 시우의 합의하에 막장 드라마에서도 욕 한 바가지 먹을 개 족보가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실시간으로!
그 때문에 아멜리아가 가게 문도 닫은 채 시우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알비레오는 그녀에게 한마디도 해줄 수 없었다.
이딴 걸 도대체 어떻게 말하라는 것인가?
다시 돌아온 시우가 알비레오 앞에 무릎 꿇고 ‘장모님! 작은 장모님도 제게 주십쇼!’라고 외치는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득해진다.
“으아악! 짜증 나! 짜증나! 흐아아앙!”
곧장 이어진 사정과 강제 배송되는 오르가즘에 또다시 속옷을 적시면서.
알비레오는 짜증에 의한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기묘한 괴성을 내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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