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07화 (507/917)

#507

1.

성당에는 사제와 주교가 머무는 방이 있었다.

비록 나무 침대에 천을 덮어놓은 것이 그만인 조악한 침대이긴 하나 다른 곳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휴식을 위해 몇몇 장소를 물색해 보았지만, 침대랍시고 마련되어 있는 것은 시우가 축사 생활을 할 때나 사용했던 뭉친 짚더미 따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샅샅이 뒤져본다면 한결 좋은 여건을 찾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한가로이 침대나 고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보를 정리해 볼까요?”

“좋아요.”

시우와 데네브는 차례로 어젯밤 사투, 라기보다는 술래잡기를 통해 얻은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나누며 종이에 적어 내려갔다.

“가장 먼저 이 어항에 있는 괴수는 한 마리. 문헌에 있는 기록과 같아요.”

“낮 동안엔 바다에 있다가 밤에만 활동하는 것 같습니다. 그 날치떼와 함께요.”

“저만한 괴물이 이 좁은 곳에서 온종일 날뛴다면 감당이 안 될 테니까요. 다음은 시간. 낮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모르겠지만, 밤은 약 4시간 전후에요.”

“그것밖에 안 된다고요? 체감상 8시간은 지난 것 같았는데….”

“중간부터 숫자를 셌으니 거의 정확해요.”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지그시 감는 데네브는 몹시 피로해 보였다.

하긴 그런 대규모 마법을 사용한 뒤 시우에게 활력의 노래를 불러주었고, 반격에 나선 이후에는 직접 공격에 가담하기도 했다.

육체파인 시우도 아드레날린이 잦아들자 졸음이 몰려오는데 고상한 백작님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니.

확실히 제머나이는 제머나이구나 싶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규모의 주머니 차원을 유지하려면 제약이 걸려요.

이 세계 같은 경우엔 공간의 제한, 주야(晝夜)의 이분을 통한 활동 시간제한, 같은 하루가 되풀이되는 반복성 강제쯤이 되겠네요.

그리고 이 공간을 유지하는 기둥이 있을 텐데…. 이 경우엔 아마도 저 문어 자체겠죠.”

“기둥이라뇨?”

“게헨나로 치면 보더 타운의 ‘문’이죠. 출입을 관장하고 게헨나 전체를 떠받치는 핵심 중추요.”

“음…. 쉽게 말해 문어를 잡아야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시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데네브는 설명을 덧붙였다.

“확실해요. 도망치는 내내 수맥과 지맥을 살폈어요. 지맥과 수맥이 적절히 교차하는 곳을 보면 대충 답이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저는 싸우느라 정신없었는데, 대단하시네요.”

“대단할 것도 없어요. 중간부터는 짐 덩이였는걸요. 아무튼….”

데네브는 씁쓸하게 말했다.

묘하게 활력이 없어 보이는 건 그 때문이었을까?

중간 이후부터는 시우에게 매달려서 도망치는 것이 전부였으니 백작님의 프라이드에 금이 갔을 가능성은 있겠다.

“이곳은 지맥도 수맥도 없어요. 자연 그 상태로 조화를 이루도록 기워낸 게헨나와는 다르게 싹둑 오려내진 불안정한 공간이라는 거에요. 게다가 이렇게 다 때려 부서진 상태에서도 기둥이 무너지지 않았으니…. 답은 하나죠.”

“그건 그렇네요.”

그녀의 말대로 문어가 바다로 돌아갈 무렵엔 도시에 박살 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건물은 물론 지형 자체가 바뀔 정도였으니 말이다.

“혹시 바다 안에 기둥이 있지는 않을까요?”

“만약 있다 해도, 저 괴물을 바다에서 상대하고 싶지는 않네요. 문어 같은 외견이 달리 생긴 건 아닐 테니.”

“그건 동의합니다.”

그나마 날치떼처럼 공중을 헤엄치지 않았기에 이 정도로 도망칠 수 있던 것이다.

저 육중한 동체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바닷속이라면 얼마나 위협적일지 가늠도 가질 않는다.

그렇다면, 이하 배경에 관한 정리.

-낮은 휴식 시간, 밤은 사냥시간. 각기 4시간 전후로 예상됨

-하루가 반복되는 세상이기에 외부 환경의 변화와 변수는 없을 것으로 예상됨

-탈출하기 위해서는 ‘기둥’을 무너뜨려야 하며 선결 과제로 크라켄의 격퇴가 요구됨

이후로도 크라켄의 특징까지 정리해냈다.

-말도 안 되는 체급과 거기서 비롯한 강한 힘과 맷집

-자체적인 항마력과 빠른 재생력

-불행 중 다행으로 특이한 마법이나 아티펙트를 구사하지는 않음

-상대적으로 느리지만 강력한 한 방

이 정도가 되겠지.

시우도 어젯밤 내내 도망만 친 것은 아니다.

갑주와 리본을 두르고 거듭 증폭을 10번도 넘게 사용해가며 다양한 방식으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분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일목요연했다.

“저와는 상성이 최악인 것 같습니다. 하필 붉은가지도 없네요….”

시우는 이제껏 전투에 임할 때 임기응변과 수 싸움 그리고 허를 찌르는 변칙적인 움직임에 의존해왔다.

부족한 힘을 빈틈에 꽂아넣는 것으로 전력 차를 메워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라켄은 난적이었다.

발경을 활용해 그림자의 창과 검으로 베어 가도 거대한 육체와 재생력으로 받아낸다.

리본으로 다리를 붙잡고 힘 싸움을 걸었다가 자칫 돌팔매 끝에 매달린 돌멩이처럼 날아갈 뻔했다.

데네브가 했던 것처럼 마포를 쏴봐도 표피에 둘러싸인 비늘이 충격을 흘려낸다.

그나마 붉은가지가 있었다면 왜곡장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봤을 텐데….

어떤 꼼수와 묘수도 통하지 않는 우직한 피지컬 덩어리.

대인 및 대마녀전에 특화된 시우에게 최악의 상대다.

아직 의수도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한 탓인지 싸움이 끝난 시점부터 왼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데네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역시 이것저것 시도해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요. 고유진동수를 이용해 내부부터 곤죽으로 만들어보려고도 했는데 부피가 너무 커서….”

“문제네요.”

“언니만 있어줬더라면….”

어제 데네브가 사용했던 ‘장송곡’은 단발성 마법이 아니었다.

본래대로라면 데네브의 ‘장송곡’이 알비레오가 세운 ‘메아리 장벽’에 의해 몇 번이고 반복되어 폭격을 가해야 했다.

하지만 알비레오는 지금 이곳에 없고, 그녀가 찾아올 가능성도 제로에 가깝다.

요지는 화력 부족이다.

여기까지 대화가 오가고 데네브는 잠시 휴식을 제안했다.

“시간이 맞을까요?”

“네, 밤과 같은 낮이 주어질 테니 시간은 넉넉할 거에요.”

시우와는 다르게 갖은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데네브다.

원래 뛰어난 화가는 사물을 힐끗만 보아도 전체적인 구도를 파악할 수 있는 법.

그녀의 단언이라면 모자람 없는 근거가 있을 것이다.

2.

잠깐 성당을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청빈을 미덕으로 삼는 것인지 게헨나의 건물처럼 화려함과 장엄함은 없지만 그래도 정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지하 창고에서 포도주를 찾은 데네브는 그것을 챙겼다.

아마도 미사용으로 사용되는 포도주인 모양이다.

시우가 농담으로 “저한테 페르세포네 얘기하지 않으셨나요?” 라고 하자, 어깨를 으쓱하며 “저승이 아닌 게 확인됐잖아요?” 라고 받아치는 데네브.

방 찬장에서 술잔까지 꺼낸 뒤 세팅.

아무래도 오래전 포도주라 그런지 침전물이 많았고 밍밍한데다가 신맛이 강해 좋은 평가를 내리기엔 모호한 술이었다.

그러나 시장이 반찬이듯 극심한 정신적 체력적 소모 이후에 마시는 포도주는 적잖은 위안이 되었다.

건배 이후 마저 끝내지 못했던 술자리가 이어진다.

“시우 군은 기운이 넘치네요. 그렇게 열심히 움직였는데.”

“저야 워낙에 몸을 많이 써서 그렇습니다.”

“그런가요?”

사실 데네브는 그의 활약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가 욕망의 마녀와 대적해 살아온 정황에 대해선 꽤 자세히 들었다

그만큼의 무력과 마법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감상을 자아내는 것이다.

지난 밤 거대한 크라켄에 대적하던 그의 뒷모습은 경이로웠다.

음속을 넘나드는 움직임과 풍차처럼 회전하며 크라켄의 다리를 베어 가던 모습.

수십 가닥의 리본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던 모습까지.

푼수로만 여겼던 사위는 예리하게 단련되어 있었고, 데네브보다도 전투에 익숙해 보였다.

비록 유의미한 타격은 입히지 못했을지라도 데네브는 그의 뒷모습에서 일전 티페레트 공작이 보여주었던 무위의 편린을 느꼈다.

지난 번 데네브가 시우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반격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만약 그가 저항할 마음을 조금이라도 먹었다면 데네브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우는 어떠한 반격도 하지 않은 채 순순히 당해주었다.

또한 어떤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위를 신나게 두들겨 팼다니….

복잡한 심경이 오갈 수밖에 없다.

“오늘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백작님, 혹시 남은 마력은 어느 정도이신가요?”

“…3할 정도요. 너무 대책 없이 소모한 감이 있네요.”

초격에 끝낼 심산으로 통 크게 마력 절반을 소비한 것이지만 마무리 일격을 가하지 못한 시점에서 독이 되었다.

마녀의 마력은 아무 때나 휙휙 충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정제된 마력수를 이용할지라도 마력의 자기화라는 느긋한 작업을 거쳐야 한다.

낮 동안 마력 회복에만 집중한다면 예상되는 시간은 3~4일.

“그렇다면 한동안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마력을 축적하면서 확실한 일격을 가할 방법을 생각해야겠네요.”

“…….”

당연하다는 듯이 계획을 세운 시우.

데네브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

사실 이 난관을 아주 빠르게 헤쳐나가는 방법을 데네브는 알고 있다.

지하 감옥에서 그를 취조할 당시 쌍둥이와의 관계뿐 아니라 그의 마력 충전 효과에 대해서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녀의 질내에 사정함으로써 자기화가 필요 없을 정도로 순수한 마력을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다.

“당분간 제가 주의를 끌겠습니다. 데네브 님은 회피에만 전념해 주세요.”

그렇기에 데네브는 염려하고 있었다.

호색한인 사위라면 이런 상황을 빌미로 ‘후후, 데네브 님. 상황이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네요, 후후.’라고 미소를 지어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랬다면 정말 인간적으로 큰 실망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뜻밖에 그는 그 ‘지름길’에 대해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지름길을 포기한 우회로가 몇 번이고 목숨을 걸고 미끼 역할을 해야 함에도, 일말의 언급도 없이 담담하게 총대를 멘다.

데네브가 모르던 그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하죠.”

“네, 지금 바로 마력 회복에 전념하실 건가요?”

와장창 무너졌던 사위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복구되는 것을 느끼던 데네브.

그녀는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아….”

그녀의 눈에 두려움과 떨림을 애써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한 시우의 왼손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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