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504화 (504/917)

#504

1.

관용구 중 ‘눈 깜짝할 새’라는 표현이 있다.

문자 그대로 눈꺼풀을 잠깐 닫았다가 뜨는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어떤 표현을 써야 할까?

스승님께 꾸준히 훈련을 받아왔다.

그 안엔 위기를 감지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순간과 공격이 가해지는 순간 눈을 깜빡이지 않는 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체불명의 파란 구슬을 건틀렛으로 쳐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았다는 말이다.

“…….”

하지만 어느새 주변의 풍경이 변검의 가면처럼 순식간에 뒤바뀌어 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안락했던 소파도, 둘 사이에 놓여 있던 술잔도, 호화로운 벽지와 벽난로도 간데없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간도 계절도 다르다.

한밤중이 분명했는데 어느새 대낮이 되어 있고, 뽀얀 입김 대신 후덥지근한 바닷바람이 콧잔등을 훅훅 스쳤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상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황망함에 자꾸 입이 벌어진다.

“여긴 어디지…?”

“시우 군이 한 건가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데네브 백작님이 하신 것도 아니겠네요.”

경계하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항구’라는 표현이 적합한 주위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옛날 옛적의’라는 수식어가 붙겠지.

바다 위에는 제법 커다란 범선이 하얀 돛을 펄럭이며 오가고 그보다 배는 되는 수의 크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선착장 근처에 주르륵 늘어선 노점들에는 각양각색의 장신구와 물건이 전리품처럼 쌓여있는 와중에 짐마차로 길이 번잡스러웠다.

“시우 군, 내 뒤로 서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아시겠어요?”

데네브는 팔을 펼쳐 그를 등 뒤로 보냈다.

미우나 고우나 사위라는 것이다.

한껏 마력을 끌어올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요, 전혀요. 그런데 너무 이상하잖아요? 위험할지도 몰라요.”

확실히 이상하다.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갑자기 이런 생뚱맞은 곳으로 이동한 것은 둘째치고, 범선이 드나드는 규모의 항구라면 적어도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바빠야 한다.

하지만 이 선착장에 떠도는 것은 기이할 정도로 거북한 적막뿐.

한 터럭의 인기척은커녕 간혹 들리는 파도소리를 제외하면 완벽한 무음 지대다.

“사람이 하나도 없네요.”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동물도 없어요.”

데네브는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마차와 길거리에 놓인 상자에 아무렇게나 쌓인 생선을 차례로 가리켰다.

그녀의 말마따나 마차에 마땅히 매여있어야 할 말 대신 마구와 말똥만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또 저렇게 방치해 놓은 생선에 흔히 보여야 할 날벌레 한 마리 없다.

모든 생명체 자체가 갑자기 증발해버린 모양새였다.

“…….”

“…….”

하지만 약 5분간 숨죽인 채  사주경계를 해도 이변은 없었다.

갑자기 호문쿨루스가 나타나는 일도, ‘함정에 빠졌구나!’ 라며 호방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나는 마녀도 없었다.

기분 나쁜 긴장감과 적막 속에서 등줄기를 따라 떨어지는 땀방울만이 선명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동하면서 주위를 살피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방심하는 찰나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개활지에요. 차라리 몸을 숨기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

데네브는 아무 말도 없이 5분 정도 더 주위를 살피더니 헝클어진 앞머리를 정리하며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이대로 있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 둘러보죠.”

“네.”

“시우 군은 어떻게 매번 이상한 일에 휘말리나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2.

짐작대로 이곳은 게헨나가 아니었다.

게헨나 토박이 데네브의 증언이니 틀릴 리는 없을 것이다.

전체적인 형태를 먼저 살펴보자면 항구에 걸쳐 생긴 도시는 선착장을 따라 반달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호 부분에는 바다와 선착장이 있고 호 외곽을 따라 둥글게 쌓인 성채, 그 안으로 가면 도시가 있는 구조다.

굳건하게 쌓인 석조 성채가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 민 것처럼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묘한 마법에 걸린 것 같네요.”

“과거로 돌아온 걸까요?”

“그런 건 아닐 거에요. 하지만 그 당시의 도시인 건 틀림이 없어 보이네요.”

장소는 보다시피 항구에 인접한 항구도시.

주변 생활상이나 범선의 구조 등을 토대로 한 데네브의 추측으로는 중세 중기로 보인다고 한다.

두 사람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로 항구에서 도시로 난 가도를 따라 걸었다.

선착장 근처부터 가도를 따라 드문드문 들어선 가게를 지나 병사 하나 서 있지 않은 검문소를 지나자 비로소 성벽에 가려져 있던 도시가 보였다.

“좁네요.”

“작기도 하고요.”

느긋하게 감상이나 할 때는 아닌가 싶으면서도 도시를 바라본 시우와 데네브의 첫 감상이었다.

선착장의 모양새를 보고 막연히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타로 타운이 중세 서민의 생활을 판타지답게 구현해냈다면, 이 도시는 거기서 ‘판타지’라는 단어를 쏙 벗겨 내 리얼한 민낯을 드러낸 느낌이다.

마차가 지나다녀야 하는 대로는 그나마 정비가 되어 있다.

허나 그 주변은 말똥투성이의 검은 진흙 진창으로 양옆에 들어선 노점 때문에 마차 한 대만 지나가도 사람들이 서 있기 어려울 만큼 좁았다.

건물은 또 어떤가?

타로 타운처럼 튼튼하게 쌓아올린 2층, 3층 석조 건물이 아니라 토대와 1층만 석조로 지어놓고 2층부터는 나무로 올린 어딘가 허술한 건물들, 이마저도 꽤 훌륭한 편에 속했다.

“그래도 시대상을 고려했을 때 번듯한 석조 성벽이 있는 것부터 규모 있는 도시에요.”

덧붙여지는 데네브의 해설과 함께 확신했다.

‘중세는 암흑기’라는 말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 주변 풍광만 본다면 중세는 암흑기가 맞다.

귀족 작위와 금은보화를 준다 해도 이런 시대에서는 못살 것 같다.

검문소의 좁은 길을 거치자 거쳐 좁은 골목길을 둔 채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과 버섯처럼 여기저기 난립한 노점이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얼핏보기에 ‘멸망한 세계’라는 단어가 떠오를 법도 하다.

사람은커녕 시궁창의 도시 쥐 한마리 역시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인기척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도시는 생활력이 넘쳤다.

말을 매어둘 수 있는 여관도, 문이 열려 안이 훤히 보이는 선술집도.

조금 들어가다 보면 갖은 피혁, 밀, 수산물 따위를 늘어놓고 파는 광장의 상설시장도 보인다.

현대인의 관점에선 부족할 지라도 이 안에서 살아가기에 부족하지 않은 인프라가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

타로 타운 중앙 광장의 3분의 1 정도 크기의 광장까지 훑어보았을 무렵엔 시우도 데네브도 어느 정도 경계를 늦추고 있었다.

뜬금없는 사고에 휘말려도 같은 장면이 반복되다 보면 다소 긴장감이 느슨해지는 것이다.

이후에 광장을 기점으로 도시를 얼추 둘러보았다.

어느 곳이건 똑같았다.

날벌레 하나 없는 고요한 정적, 이렇게 해가 내리쬐는데도 어두침침하게 보이는 멈춰버린 도시.

결정적으로 시우의 금안에 비치는 어떤 곳도 아무런 마법 작용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없네요.”

시우는 아마도 빵집으로 보이는 가게 처마에 주렁주렁 매달린 빵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말했다.

번데기처럼 매달린 빵 표면에는 몇 번이고 덧칠한 듯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우 군, 먹을 생각 말아요. 페르세포네 이야기는 들어 보셨죠?”

“…여기 저승인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모르잖아요.”

“먹을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딱히 맛있어 보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거나 주워 먹을 정도로 무사태평한 성격은 아니다.

데네브는 어깨에 둘러멨던 망토를 벗어 허리에 둘렀다.

지금까지 꽤 더웠을 텐데 비로소 그녀도 긴장을 내려놓은 모습이다.

“백작님, 그러고 보니 저쪽 골목은 아직 둘러보지 못했습니다.”

“별로 다를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가보죠.”

이 시대의 골목이란 길이라는 표현을 붙이기 미안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사방에 무분별하게 나뒹구는 부서진 상자는 물론 조잡하게 파인 배수로로 흙탕물이 흐른다.

버려진 생선의 내장 따위가 흙탕물에 잠겼다가 떠오르길 반복하는 것이 유달리 신경쓰인다.

“어?”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한 냄새를 참으며 꿋꿋이 나아가던 시우와 데네브는 동시에 우뚝 멈춰 섰다.

뭔가 나타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골목의 끝자락에 다다른다 싶자마자 처음 이곳에 오게 되었을 때처럼 부지불식 간에 눈앞의 풍경이 일변했다.

이 도시의 건물 중 가장 훌륭한 위용을 자랑하는 성당이었다.

단단한 하얀 벽돌로 쌓은 데다가 건물 외벽에 하얀 회반죽을 발라낸 예배당은 저 혼자 건축 예산을 네다섯 배 사용한 듯한 모습이었기에 기억에 남는다.

분명 골목길 끝으로 향했을 터인 두 사람은 어느덧 성당 앞 분수대와 마주해 있었다.

“…….”

기겁하는 시우와 달리 데네브는 뭔가 짐작이 가는 것이 있다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따라와 보세요.”

방금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데네브.

그 뒤를 따르자 이어진 것은 좀 전 경험의 추체험이었다.

화려한 분수대가 놓인 성당은 간데없고 다시 음침하고 퀴퀴한 뒷골목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떻게 하신 건가요?”

“제가 뭘 한 게 아니에요. 이 공간 자체의 특성이에요.”

데네브는 침착한 말씨로 말을 이었다.

“짐작했겠지만 이 골목과 예배당은 광장을 기점으로 반대방향에 놓여있어요. 도시 중앙의 광장을 기준으로 동쪽이 예배당, 서쪽이 이 골목길인 셈이죠.”

“그런가요?”

“요컨대 이 공간은 종이 한 장을 구 형태로 말아 넣은 구조에요. 우리가 종이 끝으로 향했기 때문에 반대편으로 나오게 된 거죠. 아마 도시 북쪽으로 쭉 나가다 보면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항구 쪽으로 나오게 되겠죠.”

얼핏 듣기론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지구가 둥글지만 세상이 평평해 보이는 것은 그만큼 지구가 거대하기 때문이다.

겨우 이 정도의 좁은 공간이 구 형태를 취하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굴곡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 도시에는 그런 특이점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역시 마법으로 분리된 공간이라는 거겠지.

“그러니까, 게헨나처럼 대규모 결계에 분리된 주머니 공간이라는 의미 시죠?”

“그보다 훨씬 규모도 작지만 일단을 그렇죠. 놀랍네요, 이 정도의 공간 마법을 구사하는 마녀가 케테르 이외에도 있었다니. 아무튼 탈출할 방법을 모색해야겠어요.”

“짚이시는 게 있나요?”

“아니요, 하지만 출구가 없는 주머니 공간은 없어요.”

취기도 잊은 데네브가 다부진 모습을 보였을 때.

-댕! 댕! 댕! 댕!

도시 전체를 굽어보는 교회의 종탑에서 커다란 종소리가 카랑카랑 울려 퍼졌다.

데네브와 시우는 숨을 죽인 채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종탑을 바라보았다.

다른 때였으면 장엄한 울림에 잠시나마 감탄사를 내뱉었겠지만, 불현듯 찾아온 이변은 불길함의 서막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해가 저물고 있어요.”

데네브의 말대로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하늘이 어두컴컴하게 물든다.

대신 밤을 맞이하듯 거리 곳곳에서 횃대가 피어오르고 굳게 닫힌 건물 틈으로 은은한 빛줄기가 흘렀다.

정신없이 울리던 종의 마지막 울림이 귓전을 맴돌았을 때 도시는 이미 한밤중이 되어있었다.

“…….”

살짝 거칠게 숨을 쉬며 주위를 살피던 데네브와 시우.

귀를 먹먹하게 만들던 종소리 탓인지 재차 찾아온 침묵이 무겁게 느껴진다.

-퍼드득 퍼득 퍼드드득

그 뒤를 이어 들려오는 소리.

방향은 선착장이 있는 바다 쪽.

수만마리의 여행비둘기가 동시에 날개를 퍼덕이는 듯한 소리가 도시를 채우기 시작한다.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시우는 즉각 골목길의 벽을 박차고 지붕 위에 올랐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넓게 이어진 수평선, 을 빼곡하게 채우는 검은 형체.

언뜻 날치를 닮은 듯한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들이 셀 수도 없이 도시를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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