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3
1.
산책 동안 데네브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이유.
정확히는 ‘안 했다’기보다는 ‘못했다’에 가깝다.
사교 스킬이나 대인능력의 문제와는 별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시간을 되돌려 생각해보자면.
데네브는 잠자리에 앞서 고된 하루를 위로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손님이 찾아왔고 해피 타임을 방해받은 데네브는 불만스레 손님을 맞았다.
그 손님은 아니나 다를까 눈에 한쪽씩 넣어도 아프지 않을 쌍둥이를 홀라당 훔쳐간 도둑놈인 것도 모자라 주위에 고위 마녀란 고위 마녀는 죄다 후리고 다니는 사위, 신시우.
딸아이를 키워 본 어머니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이유로 사위를 향한 데네브의 평가는 최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충분히 부아가 치미는 사정이나 데네브가 시우를 만날 때마다 가을 독사처럼 구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태평하고 얼빠진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그를 보고 있자면 지난날 보였던 추태가 떠오른다.
성숙한 여성으로서 남에게 보였으면 안 되는 추태가.
이제 시간도 제법 지났다.
슬슬 잊힐 만도 한데 매번 새로운 감상이 되살아나는 이유는 데네브가 그날 이후로도 육욕의 잔재에 붙잡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데네브가 침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가 알 리 없음에도 시우의 앞에 서는 순간마다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이 차오르고 만다.
이번에도 다를 것은 없었다.
따라서 시우에게 달려가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며 실컷 정강이를 후려 차 주었다.
쩔쩔 매는 모습을 보니 조금 속이 후련해졌을 무렵.
정신을 차리고 보니 뜬금없이 그에게 산책을 제안하고 있었다.
그래.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그에게 달리 할 말이 남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갈굴만큼 다 갈궜고 속도 시원해졌다.
그런데 왜 굳이 산책을 제안했는가?
그리고 왜 굳이 타로 타운의 별장 근처로 산책하러 나간 것일까?
쌍둥이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주의를 줄 것이다, 괜히 저택 안에서 산책했다가 쌍둥이가 보게 된다면 깰 것이다.
이런저런 변명을 덧붙이긴 했지만, 그것이 자기변명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다만 그 자기변명이 숨기고 싶은 본심이 무엇인지는, 데네브 역시 알지 못했다.
그저 제 행동에 의문과 거기에 덧붙이는 변명, 그러면서도 명확한 이유를 확신하지 못한 채 위화감만을 느끼고 있을 뿐.
“브랜디, 위스키 어느 쪽이 좋아요?”
“브랜디로 부탁합니다.”
아무튼, 일단 별장으로 오기는 왔다.
데네브는 잔에 꼬냑을 따르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테이블에는 가볍게 곁들일 수 있는 큐브 치즈도 내어놓았다.
일전 무단 외박한 쌍둥이가 시우와 함께 있던 장면을 걸리고 처음으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소파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도 이미 성관계를 맺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다시 화가 났다.
목이 바짝 타는지 거의 곧장 꼬냑을 입에 가져다 대는 시우.
데네브는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시우 군,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니에요.”
“예?”
“호스트바에서 일했다면서 이런 것도 모르나요?”
“샴페인이나 열심히 터뜨렸지 꼬냑은 따로 마셔본 적이 없어서요.”
난처한듯이 웃음을 짓는 시우를 보고 데네브는 괜히 더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헤실헤실 웃는 것인지 아무튼 간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데네브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신시우는 제머나이 백작가의 사위.
허술한 예법으로 주위의 비웃음을 산다면 제머나이의 명패에 먹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 보세요. 시각, 후각, 미각 순으로 즐기는 것이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니. 먼저 손으로 잔을 덮어요. 이렇게.”
별안간 시작된 주도 강의.
“체온이 술을 덥히면 훨씬 풍부한 향을 즐길 수 있어요. 그리고 이렇게 천천히 돌려주면서 색, 투명도, 질감을 감상하는 거죠.”
“이렇게 말인가요?”
“맞아요.”
봐도 모르겠지만 일단 가르쳐주니 따라하는 시우.
튤립 형태의 잔 옆면에 벽에 부딪힌 꼬냑이 느릿하게 흘러내렸다.
“그다음엔 향을 즐기는 거죠. 첫 아로마를 느끼고, 한 번 더 잔을 흔들어 준 뒤 공기와 접촉된 두 번째 아로마를 느끼는 거에요.”
“흐음, 이렇게 말인가요?”
“킁킁거리지 말고요.”
“넵.”
데네브의 촉촉한 꽃잎 같은 입술이 잔의 모서리를 머금는다.
살며시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 가는 붉은빛이 강렬한 주홍색 주정.
“마지막으로 키스하듯 혀 전체에 맛을 봐요.”
“오, 한결 좋네요.”
“허례허식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알고 즐기는 것과 모르고 즐기는 것은 천양지차예요. 제대로 가치를 알고, 그에 맞는 격식에 맞춰 즐긴다. 이것이 사치의 기본이죠.
아무리 극상의 미주라도 길거리에 나앉은 술꾼에게 따라준다면 헛되이 낭비되는 것 아니겠어요?”
사실 시우가 쌍둥이의 전초기지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끝없는 잔소리의 무간지옥을 경험할 줄 알았다.
술을 따라줄 때도 사형수에게 건네주는 최후의 술, 아편이 섞인 포도주 이런 것일 줄 알았고 말이다.
하지만 뜻밖에 데네브는 그렇게 펄펄 열을 내지 않았다.
표정은 썩 밝지 않지만서도 의외로 유들유들하게 대해준다.
어쩌면 쌍둥이와 오래도록 관계를 지니지 않았다는 답변이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
“…….”
하지만 꼬냑을 멋지게 마시는 법 특강이 끝나자 다시 귀신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다리를 꼰 장모님도 술을 홀짝이고 잔을 채우고, 잔을 채워주고를 반복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알비레오 쪽이라면 무뚝뚝한 타박이라도 계속 던졌을 텐데….
데네브는 일전의 일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유독 상대가 어려웠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무서울 정도의 페이스로 술잔을 기울이시는 작은 장모님.
어느새 병 하나를 거의 혼자 해치우고 있었다.
꼬냑의 도수가 보통 40도 정도하는 걸 생각해보면 무서울 정도의 속도와 주량이다.
가만히 있으면 절반은 간다는 심정으로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시우도 말릴 수밖에 없는 속도였다.
“백작님, 괜찮으세요? 아니면 무슨 일 있으신가요?”
“뭐가요?”
“페이스가 너무 빠른 것 같아서요.”
“아닌데요? 저 원래 이 정도 먹는데요?”
기이했던 침묵과는 별개로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지금껏 내내 편안한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녀의 얼굴은 벽난로 옆에 너무 바짝 앉았을 때처럼 달아올라 있었고 언제나 아나운서처럼 똑 부러지는 발음도 묘하게 꼬부라져 있었다.
“그날….”
데네브는 말을 잠깐 멈췄다.
잠시간의 망설임 이후 다시 입을 연다.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그날 이후에 어땠나요?”
“어땠…냐니요?”
시우로서는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날’이 무슨 날인지는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지만, 여태껏 불문율처럼 금지된 화제에 붙여두던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낼 줄이야.
“그냥, 어땠냐고요.”
엉겁결에 내뱉고 영문모를 후련함을 느끼는 데네브 자신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왜 이런 주제를 꺼냈는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서 꺼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시우의 말대로 너무 급하게 마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죄송합니다, 어떤 걸 여쭙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결 신중한 태도로 답하는 시우의 답변은 지극히 당연했다.
데네브 자신도 모르는 질문 의도를 그가 알아차릴 리가.
그래서 데네브는 또 답답했다.
자신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시우의 어영부영한 대답이 답답하고,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가 답답하다.
“좋아요, 질문을 바꾸겠어요.”
데네브는 또다시 꿀꺽꿀꺽 꼬냑을 마시고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태연하게 말하려는 듯 온 힘을 다하지만 잔에 묻은 립스틱처럼 수줍음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날은 어땠어요?”
시우는 말문이 턱 막혔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거지? 라는 생각뿐이다.
잠시 눈을 감고 전후 상황을 살폈다.
야심한 밤 일부러 단둘이 산책을 나온 것, 구태여 으슥한 별장에서 술을 나누게 된 것, 이런 주제를 먼저 입에 담은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즉각 합당한 결론을 도출했다.
이건 알비레오 백작이 ‘쌍둥이가 클 때까지 제가 대신….’이라는 맥락으로 했던 테스트와 마찬가지다.
부비트랩을 설치해 놓고 시우가 흔들리는 기색이 보이면 곧장 ‘이럴 줄 알았어! 당신은 추방이에요!’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의 상황이 설명되지 않는다.
알비레오 백작과 쌍둥이 아니랄까 봐 하는 행동이 똑같다.
마음을 굳혔다.
알량한 거짓말, 머뭇거리는 자세, 우물쭈물하는 모습은 필요 없다.
솔직하게 본심을 털어놓으면서도 거목처럼 우직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이것이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시우의 답안이다.
시우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데네브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전 검증 때를 말씀하시는 거 맞으신 가요?”
멈칫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데네브.
“좋았습니다.”
“…….”
데네브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하며 입 모양이 아에이오우 다채롭게 달싹거렸다.
그리고 술잔을 잡은 손이 파르륵 떨린다.
분명 저걸 집어 던질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시우는 술잔이 날아오기 전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데네브 백작님은 아리따우십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데네브 님과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이 좋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말일 겁니다. 하지만….”
아리따워?
좋은 시간이 아니라면 거짓말이었다고?
시우의 말을 듣는 순간 데네브는 심장을 밧줄로 꽉 죄었다 푸는 감각을 느꼈다.
답답하기만 했던 감정이 뻥 해소되는 느낌.
알코올의 열기가 범람한 머리가 한결 시원해지는 느낌.
어째서인지 약간의 자신감이 생기는 느낌.
그런 감정의 파편이 순식간에 심장을 스쳐 지나간 순간 데네브의 입술은 의지를 벗어나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시우 군. 사실…. 지난 검증에 문제가 있어요.”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 네?”
유창하게 말을 이어가던 시우의 얼굴이 단숨에 굳는다.
그리고 한결 진지한 눈빛으로 데네브를 바라본다.
“문제라뇨?”
“지난번 검증에선 분명,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암, 그렇고 말고요. 다름 아닌 제가 직접 검증했으니까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험에 언제나 변수는 존재할 수 있어요. 고작 한 번으로 넘어가기에 시우 군과 쌍둥이가 나누는 행위는 너무 위험해요.”
“…….”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왜 시우를 이런 곳으로 불러냈는지, 데네브는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은 모종의 불안함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분명 알비레오의 참관하에 벌였던 검증은 성공적이었지만, 자신처럼 철두철미한 마녀가 고작 한 번의 결과 값에 만족하는 것은 어불성설.
이제껏 그를 보며 계속 마음이 불편했던 것도, 구태여 그를 타로 타운의 별장으로 끌어들인 것도.
실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에 머뭇거리던 무의식이 중복 검증의 필요성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무조건 그런 것이다!
꽉 막혔던 배관이 뚫린 것처럼 데네브조차 모르던 명쾌한 해답이 콸콸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살짝 들뜬 어조로 열변을 토하는 데네브.
‘그렇다면 오늘 여기서 해봐야겠죠!’라고 말하며 결론을 지으려던 데네브의 목구멍이 턱 막혔다.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던 테이블 사이로 갑자기 동그란 구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지손톱 정도의 지름을 지닌 새파란 구슬.
그 모양과 색은 바다의 눈이라고도 불리는 블루홀을 연상시킨다.
“시우 군?”
“백작님?”
동시에 ‘이건 무슨 마법이죠?’라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의문 어린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반응이 빨랐던 것은 시우 쪽이었다.
그는 즉시 전신을 갑주로 감싸고 반사적으로 구슬을 밖으로 쳐냈다.
더 정확히는 쳐내려 했다.
그러나 시우의 손등이 구슬에 맞닿기 직전.
어두컴컴한 마력의 격류가 시우와 데네브의 몸을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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