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
1.
‘문’을 통해 현세의 물품을 들여오는 물류의 허브 보더 타운의 선착장엔 낮도 밤도 없다.
마녀는 막대한 사치품을 소비한다.
그 총량이 게헨나 자체의 내수생산량을 아득히 초과하는 이상 부족한 부분만큼 현세에서 들여오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방에서는 노예들을 향해 휘둘러지는 채찍질 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오고, 배에서 내려진 화물들은 쉴 새 없이 짐마차에 실려 게헨나 각지로 뻗어나간다.
대부분의 화물은 노예에 의해 운송되지만 몇몇 상품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마녀가 직접 주문한 호화로운 상품엔 취급에 주의를 요하는 귀중품이 많았고 당연히 분실이나 파손에 대한 책임도 무거웠다.
그런 특송품은 밀수꾼들이 별도로 취급하기 마련이다.
“어이! 조심히 다뤄!”
“빌어먹을 더럽게 무겁잖아.”
밀수꾼 둘이 낑낑거리며 옮기는 이 상자처럼 말이다.
여자 하나가 웅크리면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의 나무 박스 위에는 취급주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한참동안 게걸음으로 밀어라 당겨라 상자를 옮기던 밀수꾼들은 거친 숨을 취며 조심스레 상자를 내려놓았다.
“헉헉, 시발, 오늘 옮긴 것 중에 제일 무겁네.”
“뭐가 들었는지는 알아?”
“고상하신 마녀님이 퍽이나 적어놓겠다.”
“퉤, 이것만 마저 끝내고 맥주 한 잔 걸치자고.”
“좋지.”
걸걸한 목소리로 잡담을 주고 받은 밀수꾼은 근처 아무 상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선착장에 들여놓았으니 이제 곧 배정된 마차가 오게 될 텐데 그 마차에 짐을 싣는 것까지가 그들의 역할이다.
“이건 어디로 가는거야?”
“기다려 봐.”
상자를 톡톡 차며 묻는 밀수꾼의 말에 다른 밀수꾼이 청바지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들었다.
오늘 처리해야 할 ‘특송품’들의 목록이 적힌 수첩이다.
“어디보자 어디보자….”
위에서 아래로 주르륵 리스트를 훑는 밀수꾼.
옆에서 담배를 꼬나물던 밀수꾼이 고개를 들이밀며 묻는다.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문제 있어?”
“뭐야, 이건 리스트에 없는 품목인데?”
위 아래로 몇 번을 훑어도 방금까지 열심히 옮기던 상자의 일련번호는 없었다.
담배를 문 쪽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됐어, 선장이 꼬불쳐 둔 거를 우리가 잘못 빼온 거겠지. 욕 얻어먹기 전에 다시 돌려다 놓자.”
현세와 보더타운을 오가며 물품을 들여오는 밀수꾼이 항상 양심적으로 일하지는 않는다.
이따금 이렇게 목록에도 없는 물품을 몰래 들여와 직접 사용하거나 뒷꽁무니로 팔아 차익을 남기거나 하는 것이다.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적발된다고 해도 관례상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쾅!
담배를 물고 있던 밀수꾼이 상자를 걷어 찼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되자 상자를 향한 발길질도 한결 과격해졌다.
“빌어먹을 돼지 새끼. 적당히 남겨먹을 것이지 얼마나 많이 해처먹으면 이렇게 무겁냐.”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냐. 네가 저쪽 들어.”
두 밀수꾼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필이면 제일 힘들여 옮긴 상자가 돌려 놓아야 하는 상품이었다니.
-빠직!
마른 장작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뚜껑이 폭발하듯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비명을 지를새도 없이 두 밀수꾼의 얼굴을 움켜쥐는 작은 손.
“덩치는 산만한 새끼들이 내가 뭐가 무겁다고 지랄들이에요.”
“으브…으브브….”
“억…어억…억….”
상자를 열고 나온 것은 피처럼 붉은 머리와 눈동자를 지닌 흡혈귀의 마녀, 클레흐 아스모데.
“너희는 오늘 아무것도 못 본거에요. 숙취에 절어서 기억이 끊길 거에요. 아시겠어요?”
“으어..어…아…알겠습니다….”
“정확히 다음 출항 때 내가 들어갈만한 근사한 상자를 준비해요. 리스트에도 추가하고. 저 박쥐 좆만한 상자말고 좀 쾌적한 걸로.”
“억…어억…억, 알겠,습니다.”
그녀는 어금니를 아드득 문채 두 남자의 머리를 내팽겨쳤다.
클레흐의 두 배는 넘어가는 밀수꾼들은 짐더미처럼 창고에 너부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클레흐는 머리에 묻은 톱밥과 어깨에 묻은 상자 조각을 툭툭 털어냈다.
마음 같아서는 죽여버리고 싶지만 훗날을 생각해야 한다.
괜히 필요 없는 사람을 죽였다가 꼬리가 잡히면 돌아가는 일이 꼬이게 될 뿐더러 탈출 수단도 마련할 수 없다.
따라서 그녀의 전매특허 중 하나인 최면으로 기억을 지워버린 뒤 던져버리는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
추가로 여지껏 그녀를 이송해준 박스까지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박살내 버렸다.
증거 인멸이라기보단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2주간 치를 떨게 만든 아주 좆같은 상자였기 때문이다.
추방자들, 때로는 공적들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게헨나에 밀입국하곤 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공간을 넘나드는 특성을 지닌 호문쿨루스를 통해 백도어를 만들거나 위장 시민증으로 통과하거나 밀수품에 섞여 들어오는 식으로 말이다.
참고로 클레흐의 방식은 아무리 간절한 마녀라도 기피하는 방법이다.
물론 접근성은 가장 좋다.
그냥 적당한 밀수선을 찾고 화물에 끼어들기만 하면 되니까.
그러나 재수가 없어 항로가 꼬인다면 최장 몇달 동안 캄캄한 상자 안에 꼼짝 없이 갇혀 있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더욱이 콧대 높은 마녀들이 짐짝처럼 상자 안에 들어가는 것을 달갑게 여길리도 없다.
반대로 말하자면 클레흐는 그런 자질구레한 문제를 신경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내몰려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애증의 연인, 비앙카를 뺏어간 티페레트 공작에게 같은 아픔을 안겨주는 것.
그녀에겐 그것만이 목적이었다.
단, 아무리 상대가 허접하다고 해도 게헨나 내에서 난동을 부렸다간 순식간에 제압당할 것이다.
온갖 수법으로 은밀한 행동이 가능한 비앙카조차 구태여 사냥감을 게헨나 밖으로 끌어냈다는 점이 추측에 확신을 더한다.
그걸 위한 어항이다.
클레흐는 손에 쥔 작은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계획을 정리했다.
따로 정리랄 것도 따로 없다.
아주 심플하다.
스텝 원, 신시우를 찾는다.
스텝 투, 어항을 투척해 그를 먹이로 준 뒤 가능한 빠른 속도로 도망친다.
기왕이면 상대가 갈갈이 찢겨 죽는 모습을 보는 것도 훌륭한 복수의 일환이겠으나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더군다나 암살에 있어 심해의 마녀의 예장만을 사용함으로서, 티페레트 공작의 분노를 그 머리텅텅 빈 잠수함성애자년에게 돌릴 수 있다.
분노한 티페레트 공작이 심해의 마녀에게 싸움을 걸다 죽어준다면 가장 베스트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시간을 벌어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책.
최초 비앙카를 잃었을 시기에 비해 클레흐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흘러넘쳐라, 선혈(鮮血)이여.”
영창과 함께 클레흐의 전신에서 핏방울이 솟는다.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흡혈귀의 전신답게 그녀의 마법은 전설 속 흡혈귀의 기이한 사술을 닮아있다.
혈액을 매개로 솟아난 수백마리의 사역마가 박쥐의 형태를 취한 채 어둑한 밤하늘로 일제히 퍼져나갔다.
2.
작은 장모님과의 갑작스런 밀회.
옷 위에 대충 근사한 망토를 걸쳐 입은 데네브는 별안간 산책을 제안했다.
으레 망토라 하면 편의성과 심미성을 교환한 의류라 여기기 십상이나, 그것이 제머나이 백작이 어깨 위로 걸쳐진다면 경우가 달라진다.
재질은 페르시아 새끼양에게서 얻는 아스트라칸 모피.
외간 남자의 눈길이 닿지 않도록 몸매를 살며시 가려주는 정숙한 맵시.
누가봐도 대충 걸쳐입었을 뿐이지만 어지간한 여자들이 한껏 꾸며도 따라할 수 없는 자태는 분위기 파악도 못한 채 감탄사를 삼키게 했다.
“백작님.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말해요.”
데네브는 산책을 제안했다.
말이 제안이지 사실은 명령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 없다.
다만 의문인 점은 저택의 산책로로 삼을 만한 훌륭한 정원을 놔두고 굳이 타로 타운까지 나서게 됐냐는 부분이다.
이 시간에 타로 타운을 향해봐야 문이 닫힌 가게과 잠자리의 든 시민들 뿐일텐데 말이다.
“그래서…. 굳이 타로 타운이어야할 이유가 있나요?”
“불만이라도 있어요?”
“아닙니다. 있을 리가요.”
슬쩍 물어보았으나 즉각 쏟아지는 쌍심지가 뽀족하게 솟은 눈과 버금갈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
워낙에 캥기는 것이 많은 시우로서는 깨갱 꼬리를 마는 수밖에 없었다.
또 이상한 점 한 가지.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시우를 불러낸 데네브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산책하는 내내 갈굼을 당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별다른 말도 없이 타박타박 걸을 뿐이었다.
시우는 시종처럼 그 옆을 졸졸 따라다녔고 말이다.
“…쌍둥이가 깨어 있을 수 있어요. 저택을 거닐다 당신 모습이라도 발견한다면 쪼르르 달려올게 뻔하니까요.”
“아하, 그런 이유가.”
“그리고 타로 타운에 와 본 것도 오랜만이거든요.”
“그렇군요.”
여전히 명쾌한 답변이라 여기기는 어려웠지만 굳이 태클을 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데네브는 분수대 곁을 지날 무렵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쌍둥이와는, 그 뒤로도 관계 했나요?”
슬며시 기세가 죽은 목소리, 멋쩍어하는 기색에서 단숨에 데네브가 ‘어떤 기점’을 말하는지 알아차렸다.
“아니요, 그 뒤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장모님과의 검증을 끝낸 뒤 수확제.
스승님과 샤론과는 시간을 보냈으나 애석하게도 순번이 뒷번호였던 쌍둥이와는 달리 시간을 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몸을 겹칠 뻔했던 순간 데네브에게 적발되어 무산으로 돌아갔으니 꽤 오랫동안 성행위를 하지 않은 셈이다.
그 말을 들은 데네브가 다시 조용해지고.
문득 고개를 들어 말했다.
“산책은 충분한 것 같네요.”
“아, 돌아가는 건가요?”
“아니요,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어요.”
“술?”
“근처에 별장이 있거든요. 시우 군도 알겠지만.”
“그, 그렇죠….”
그 별장에서 쌍둥이와 밀회를 갖다가 걸렸더랬지.
속이 더욱 쓰라렸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갈굴 셈인가?
“저도… 따라가야 하나요?”
“물론이죠, 걷는 동안 당신에게 할 잔소리를 차곡차곡 정리해뒀으니 거기서 혼나도록 하세요.”
작은 장모님의 강압에 죄많은 사위는 도살장에 끌려들어가는 소처럼 순순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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