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
1.
케테르가 잠적한 이래로 그 어떤 마녀의 발걸음도 허락하지 않았던 상아탑.
어떤 시대의 건축양식도 따르지 않고 오직 케테르가 창조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어두컴컴한 예배당처럼 보이는 원형의 돌판 위에는 하나의 옥좌 위로, 한 명의 지배자가 앉아있다.
어떤 색에도 물들지 않은 순결한 백발.
그 머릿결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 끝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반쯤 감고 있는 눈꺼풀 사이, 어디를 바라보는지 짐작할 수 없는 눈동자는 찬연한 황금색.
모든 마녀가 경외해 마지않는 케테르 공작.
한 번의 계승도 거치지 않고 홀로 30 위계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해낸 규격 외의 천재.
아비규환이던 마녀 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수호자.
선을 넘은 마녀는 설령 친구라 할지라도 숙청하는 지엄한 심판자.
그러나 릴리스의 눈에 비치는 케테르의 모습은 소문과는 달랐다.
다가오는 죽음을 알고 있으나 달관한,
이룰 수 없는 이상에 절망하고 절망한 끝에 마모되어 버린,
끝없이 반복되는 세월에 흥미를 잃은 지친 고룡.
“가엾은 케테르.”
릴리스는 케테르의 스무 걸음 앞에서 서성이며 비웃듯, 혹은 노래하듯 읊조렸다.
“지금 이 모습이, 날 버리면서까지 네가 원하던 모습이니?”
릴리스는 힐끗 시선을 들어 다시금 넓은 공간을 훑어보았다.
케테르가 앉은 옥좌의 뒤로는 형용할 수 없이 많은 마법진이 기동 중이다.
3차원의 존재는 아무리 꼼꼼히 봐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4차원의 정팔포체가 육신의 보전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릴리스가 스무 걸음 이상 접근할 수 없는 것도 프로텍터 역할을 하는 저 마법진 탓이다.
현존하는 그 어떤 마녀도 따라 할 수 없는 마법이겠으나, 릴리스가 보기엔 우습게만 보였다.
“네가 자랑하던 그 아름다운 마법은 어디 있니? 프렉탈 형태의 마법 말이야.”
본디 그녀의 마법진은 만화경처럼 아름다운 프렉탈 형태를 취했다.
저런 추잡스럽고 모호한 마법 따위, 케테르가 보유했던 경이로운 마법에 비하면 잔재주일 뿐이다.
등 뒤에 빼곡하게 꽂혀있는 호스로 주입되는 수백 종 이상의 포션, 약물 그리고 마약도 마찬가지다.
그 케테르가 언제 저런 약물 따위에 의존했단 말인가?
“좋을 대로 떠벌이고 있군. 아직도 거기 있던겐가?”
“힘들게 들어왔는데.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안 해주잖아? 아쉬워서 나갈 수가 있어야지.”
본디 상아탑은 케테르의 공간 결계로 둘려 있다.
어떤 마녀도 해석할 수 없는, 완전무결의 결계식으로 성벽을 쌓는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유고함을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한평생 바라왔던 질서를 위한 길이었을 테니.
통상적인 방법을 통한다면 아무리 릴리스라도 그 안을 비집고 들어설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멜리아가 부려준 난동은 아주 시기적절했다.
릴리스의 충동하에 그녀가 일으킨 마법은 게헨나를 둘러싼 이면결계에 막대한 부하를 걸었다.
만전의 케테르였더라면 아무런 무리 없이 그것을 복구해냈겠지만….
이젠 아니다.
그녀는 수백 년에 걸쳐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케테르는 즉각적으로 결계를 수정하지 못했고, 릴리스는 찰나의 틈을 타 상아탑 내부로 들어서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러운 상대를 마주할 수 있었다.
“릴리스, 가엾은 건 너다.”
“그래? 오만한 여왕님은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면서도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모양이네.”
릴리스의 빈정거림 뒤 별안간의 흉소가 터졌다.
메마른 웃음소리가 홀 안을 끝없이 매워간다.
믿을 수 없게도 그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케테르.
릴리스의 눈가가 좁아졌다.
“뭐가 우습지?”
“착각하지 말거라. 릴리스, 너는 여의 결점. 닦아내지 못해 말라 비틀어진 과거의 오탁에 불과하다.”
“…….”
“하찮은 간계와 혀 놀림을 스스로 대단하다 여기며 전능감을 느끼는 꼬락서니가 가엾을 뿐. 네겐 아무런 동정도 긍휼함도 느끼지 않느니라.”
-쾅!
그 순간.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넓게 펼쳐진다.
케테르와 릴리스를 가로막던 투명한 장벽이 통째로 출렁일 정도로.
릴리스는 그 투명한 장벽에 이마를 맞댄 채 죽일 듯한 눈으로 케테르를 노려보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너를, 찢어서, 죽이고 싶어.”
“그렇겠지, 허나 그럴 수 없다는 건 네가 더욱 잘 알 것이야.”
릴리스는 숨을 들이쉬며 장벽에서 손을 뗐다.
이미 다방면으로 시도를 해봤지만, 온갖 검증 끝에 얻은 결론은 하나, 지금의 릴리스로선 저 장벽을 뚫을 방도가 없다.
그러나 케테르의 용태는 악화일로를 걷는 중이다.
언젠가 결계조차 제대로 유지 못 할 것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여기 더 있어봐야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케테르,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주워섬겨도 넌 실패자야.”
평정을 되찾은 릴리스는 빙긋 웃으면서 등을 돌렸다.
그렇지 않고서는 입가가 딱딱하게 굳은 것까지는 숨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 앉아서 네가 지키려 했던 것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지켜봐. 그게 나의 복수야.”
멀어지는 릴리스의 등을 케테르의 고아한 음성이 붙잡는다.
“릴리스.”
그녀의 목소리에는 또 다른 종류의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네가 말한 것 중 틀린 것이 있다.”
“…무슨 소리야?”
케테르는 냉소하며, 기뻐하며, 비탄하며 담담히 고했다.
“우리 ‘모두가’ 실패자야.”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멀어지는 릴리스의 등 뒤로.
목을 긁어내는 듯한 자조의 웃음이 그림자처럼 따라 걸었다.
2.
“오늘 공치는 날인가?”
시우가 향수 가게를 다시 찾았을 때.
이번엔 아멜리아가 사라져 있었다.
창고 정리라도 하고 있나 2층과 3층을 훑어보고 나서야 가게 구석에 걸어두었던 그녀의 망토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외출 중인 모양.
“하긴 요즘 통 바쁘니까.”
별 수 없이 매대 위에 쪽지를 남겨두고 제머나이 저택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쌍둥이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서였다.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이는 샤론과 달리, 빡빡한 견습마녀 스케줄을 소화하는 쌍둥이는 시우가 달리 시간을 내지 않는 이상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피어라.”
시우의 몸 주위에 짙푸른 마력이 흐르고.
공간을 뛰어넘어 제머나이 저택의 중정에 도달해 있었다.
어느덧 야심한 밤이다.
관계를 인정받았다고 해도 쌍둥이를 불쑥 찾아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장모님들께 소박을 맞을지도 모른다.
먼저 허락을 구해야겠다고 떠올린 즉시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흐음….”
요새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알비레오도 그렇고 데네브도 그렇고 시우를 만날 때마다 구두 끝으로 정강이를 걷어차 댄다.
처음 봤을 때는 분명 우아한 귀부인들이었는데.
어느새 못난 사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장모님으로 변신완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쿵쿵
굳게 닫힌 정문을 몇 차례 소심하게 두들겼다.
보통 때는 시녀장인 갈리나나 다른 하녀들이 열어주는데 오늘은 살짝 늦어서 그런지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별 수 없이 슬쩍 문을 열어 들어섰다.
센서등처럼 샹들리에의 환한 촛불이 타오르며 나무 심지가 타오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무슨 일이죠?”
타닥이는 소리를 뒤덮듯 청아하지만 약간의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내를 향해 뻗은 2층 테라스에서 길게 이어진 계단에 랜턴을 들고 서 있는 작은 장모님이 보였다.
그 순간 시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릴 뻔했다.
하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편안한 잠옷차림이 작은 장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렸던 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식하는 것을 내비쳤다간 더욱 큰 문제가 된다.
데네브도 그때의 일을 순간의 해프닝으로 취급하는 듯하니 거기에 박자를 맞춰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시우가 필사적으로 시선 처리를 할 무렵, 그녀가 어깨 위로 커다란 케이프를 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난 밤처럼 노출도 높은 의상은 아니었단 말이다.
-타박 타박 타박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데네브.
뒷머리를 전부 번으로 올린 헤어코디였는데 방금까지 침대에 누워있던 듯 이리저리 삐친 머리가 보인다.
표정 역시 잠을 자다 방해받은 것처럼 짜증에 차 있었다.
“죄송합니다. 방해한 것 같네요.”
“바, 방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자고 있었거든요?”
데네브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계단을 마저 내려와 성큼성큼 시우 앞에 다가선 데네브는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고 램프를 붕붕 휘두르며 말했다.
“마녀도 잠 정도는 잘 수 있어요! 저는 규칙적인 수면 습관을 지닌 마녀라고요!”
“그, 네, 뭐….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잠을 방해해서 죄송하다는 말이었는데.
저번처럼 대뜸 정강이를 걷어차이진 않았지만 대신 꼬투리를 잡고 싶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굳이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데네브와 알비레오 입장에서는 시우가 도둑놈도 아닌 날강도 놈으로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당신 그리고 옷차림이 이게 뭐죠? 정갈하게 입고 다니라고 말했잖아요. 제머나이 백작가의 사위를 자처하고 싶다면 그에 마땅한 격식을 차리도록 하세요.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잔소리 폭포.
한동안 열을 내던 데네브는 얼굴에 열이 오른 듯 파닥파닥 손부채 질을 하며 숨을 푸욱 쉬었다.
“그래서 왜 온 거죠?”
“아, 혹시 오딜 님과 오데트 님 깨어계시면 좀 만나뵐 수 있을… 악!”
데네브는 아무말도 없이 시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나마 평소처럼 구두굽이 아닌 슬리퍼라 덜 아팠다는 것이 위안일 것이다.
“이 시간에 쌍둥이 만나서 뭐하게요. 이젠 아예 대놓고…!”
“악! 악! 악! 아닙니다! 데네브 님! 그게 아닙니다! 그냥, 오랫동안 못 뵌 것 같아서…!”
“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제가 마음고생을 얼마나 하는데! 메리골드 양이랑! 아예 살림까지 차려 놓곤! 야밤에 뻔뻔하게 기어들어와서는! 뭐어? 쌍둥이를 좀 보고 싶어?”
하지만 데네브는 집요하게 같은 곳을 걷어차 대면서 시우의 변명을 귀에 담지도 않았다.
감정 가득 실린 장모님 킥을 연신 두들겨 맞은 시우.
그녀의 감정이 풀릴 때까지 얌전히 정강이를 샌드백으로 내주자 제풀에 지쳐 떨어지는 데네브.
“하아… 하아…. 진짜….”
데네브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기며 숨을 몰아쉬었다.
분을 참지 못해 입술을 안으로 꽉 무는 것이 쌍둥이랑 판박이다.
이쯤에서 멈출 줄 알았건만 그녀는 몇 번 더 심호흡하더니 침착하고 낮지만 굉장히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우 군, 잘 들어요.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도 이렇게 늦은 시각에 약혼녀를…. 그러고 보니 약혼도 하지 않았죠?”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네요….”
“으으… 구렛나루 다 뽑아버리고 싶네요.”
화나는 점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니 이제 화를 내기도 지쳐 보였다.
“면목없습니다.”
“암요, 없어야죠.”
“날이 밝았을 때 다시 찾아올게요. 죄송합니다.”
데네브가 화를 내는 것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 중이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려는 그때.
“잠깐.”
데네브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야기나 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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