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1.
코하브 백작에 이어 에렐림 공작을 만났던 시우는 즉각 타로 타운으로 향했다.
이유를 더 설명할 필요 없이 예빈을 만나 몸 상태를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있을만한 장소는 알고 있다.
일전 이틀 동안 그녀와 뜨거운 나날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광장 구석, 상권이 그다지 좋지 못한 곳에 서 있는 2층 석조주택.
예빈은 시민권을 얻자마자 타로 타운의 시민을 위한 무상 진료소를 개업했다.
레노먼드 타운이 벨 에포크 시대에 대한 환상을 몽땅 집어넣어 재현해냈다면, 그녀의 진료소는 굉장히 타로 타운스러운 건물이다.
겉으로 보기에 유달리 화려한 부분도 없고, 대신 군데군데에서 느낄 수 있는 세월에 흔적이 진하게 묻어나온다.
하지만 진료소 앞에 도착한 시우는 그 시도가 허사로 돌아갔음을 직감했다.
노크를 해봤지만, 문이 굳게 잠겨있다.
그리 늦은 시각이 아님에도 예빈이 머무르는 2층도 진료소인 1층도 캄캄했다.
너무 늦게 온 걸까?
아니면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긴 걸까?
옆에서 가판을 정리하던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예빈 스미르나 님 안 계시나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데도 팔뚝에 근육을 불룩거리며 과일 상자를 정리하던 노인은 시우의 질문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답했다.
“예빈 스미르나…. 아, 성녀님 말이오?”
“성녀님이요?”
“암, 성녀님이지. 아무런 돈도 받지 않고 우리 같은 민초들을 살펴주시지 않소? 그래서 다들 그렇게 부른다오. 새우처럼 굽어가던 내 허리도 성녀님이 고쳐주셨지.”
노인은 웃음을 띠며 허리를 두들겼다.
하긴, 시우가 생각하기에도 예빈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겉으로는 마법 연구를 겸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자질구레한 병을 치료해주는 것이 마법 연구에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턱을 꼿꼿이 세우고 선민의식에 잠긴 마녀만 보던 시민으로서는 그녀의 성녀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긴 했다.
“어디 가셨는지는 아시나요?”
“글쎄, 약재를 구하러 출장을 다녀오겠다는 말씀은 하셨소. 그런데 그것도 벌써 두 달이 넘었지.”
“두 달이나요?”
당장 급한 일은 아니지만서도 이거 엇갈려도 단단히 엇갈린 모양이다.
“정 급한 일이라면 돌아오실 때 내가 말씀을 전해 놓겠소.”
“감사합니다. 신시우가 찾았었다고 말씀 부탁할게요.”
2.
“하… 분하다….”
시우가 공치는 동안 향수를 만들고 집에 돌아온 샤론은 갑작스럽고 막대한 지출에 끙끙거렸다.
이 향수가 정가라는 건 시우의 반응으로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믿을 수 없었다.
향수 2.5 fl.oz를 조금 더 친숙한 ml 단위로 치환하면 고작 75mL다.
“요구르트 정량이 65mL니까…. 좀 더 많은 건데….”
그런데 가격이 122.2파운드란다.
할부라고 해도 12달 동안 매일 금화 10개씩 고정지출이 생긴 셈이다.
제머나이 저택으로부터 품위 지원 유지비 명목으로 지원받는 금화가 매 분기 12개, 연구비 명목으로 지원받는 금화가 매달 12개로 도합 한 달 15개다.
많다면 많은 돈이다.
더군다나 월세나 공방 대여비 식비는 제머나이 저택에서 일체 지원해준다.
그러나 샤론의 마법 특성상 매 연구마다 막대한 지출이 발생하기에 언제나 빠듯한 예산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던 것이다.
그나마 시우의 도움으로 할부이자는 내지 않게 되었다지만 샤론에게는 뼈 아픈 지출이었다.
“어쩐지 요즘 운수가 좋더라니….”
시우가 잠깐 위기에 처했던 것을 제외하면 드디어 인생에 봄날이 오나 싶었다.
불완전계승을 극복하게 된 이후 샤론의 마법 연구는 순풍에 돛단 듯 날아다녔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17 위계까지 떨어져 기본기를 다시 정립한 것이 큰 도움이 됐던 듯했다.
“으으…. 부업이라도 알아봐야 하나…?”
암만 연구 상황이 좋다 해도 예산 안이 망가져 버려서야….
이번 달 말에 구매하려고 했던 페리도트(peridot) 세트는 당연히 포기해야 할 것 같고, 동시 진행하던 연구 5개 중 2개는 일시 동결해야 할 처지에 처했다.
샤론은 풀썩 고개를 떨구며 안이 훤히 비춰 보이는 크리스탈 향수병을 들었다.
뚜껑을 열어 아주아주 조금을 손목에 떨어뜨리고 향기를 맡는다.
“스으읍….”
그 순간 행복한 꿈속을 거닐 듯 평화로워지는 마음.
이 향수를 맡으면 시우의 품에 처음 안겼을 때처럼 가슴이 뛰며 설렌다.
물론 지금 언제봐도 설레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아득히 미화된 과거의 기억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설렌다는 의미다.
현실의 돈 걱정도, 이런저런 치정 싸움의 스트레스도 잠깐 잊게 되는 편안한 향기.
“하아…. 어떻게 이런 걸 만들지?”
샤론은 느슨해진 입꼬리를 느끼며 소파에 몸을 뉘었다.
따로 부과된 마법 효과는 약간의 활력을 증진해주는 정도.
나머지는 순수히 아름다운 향기에서 기인한 효과라는 뜻이다.
그렇게 샤론은 벤츠 마크가 박힌 핸들을 어루만지며 쓰라린 시름을 잊는 카푸어처럼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똑똑똑
“응?”
들려오는 노크소리.
샤론의 마음도 덩달아 뛰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태껏 이런 야심한 시각에 찾아오던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자던 엘로아 공작님 혹은 시우였기 때문이다.
공작님은 현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장 중이시니 그럼 노크 소리의 주인공은 시우 아니겠는가?
샤론은 스프링처럼 튕겨 나가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점검했다.
시우랑 못한지도 너무 오래돼 간다.
“…그렇다면 오늘 밤은 함께 침대에서!”
옷감이 얇아 적당히 야릇해 보이는 나이트가운 준비 오케이.
머리도 딱히 흐트러짐 없고 고운 것이 오케이.
더군다나 아멜리아에게 선물 받은 비장의 향수까지 있으니 모처럼 색다르게 첫관계의 설렘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
“금방 갈게~”
후다닥 점검을 끝내고 바람을 타고 달리듯 방문을 열었으나.
금방 우뚝 굳었다.
“엑….”
“늦은 밤에 미안해요. 잠깐 시간 될까요? 길진 않을 거에요.”
문앞에서 샤론을 기다리던 사람이 아멜리아였기 때문이다.
2.
사실 향수가 전달해준 쇼크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샤론은 아멜리아에게 사과할 것이 있었다.
욱한 심정이었다고는 해도 그녀에게 상처입힐 만한 말을 해버렸고 정작 원래 목적이던 사과 역시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손수 우려낸 홍차를 앞에 두고 마주앉은 두 사람 중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샤론이었다.
“저기…. 여러모로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함부로 말했던 것 같아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어요.”
“겉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이에요. 아멜리아 님이 아니었으면 전 시우를 만나지도 못했을 텐데….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잘못된 일이었어요.”
샤론은 거듭 고개 숙였다.
한편, 아멜리아는 이미 샤론의 말을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가게를 닫고 그녀를 따로 찾아온 이유는 사과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샤론 양, 말할 것이 있어요.”
“…네?”
아멜리아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두툼한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샤론 양이 그런 심정을 갖는 건 이해해요. 실제로 시우와 오랜 시간동안 있는 사실이니까요. 힘들게 만난 만큼이나 더욱 오래 함께 있고 싶었어요.”
“…이해해요.”
“이 책은 시우의 몸을 치료하는 대가로 받은 살생부에요. 케테르 공작에게 받았죠.”
아멜리아는 복잡한 시선으로 책표지를 쓰다듬었다.
아직 살생부는 전부 이행되지 않았다.
절반이 아멜리아가 약속을 지키길 기다리고 있다.
“벌금이 마련되는 대로 현세로 살생부를 마무리 지을 예정이에요. 시우를 동행시키지 않을 거에요. 그러니 남은 기간만이라도…. 시우와 조금 더 함께 있게 해주세요.”
“도움은…. 필요 없으실까요?”
“저의 일이니까요.”
그 말에서는 고고한 각오가 느껴졌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우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말이다.
“한 번 살펴봐도 될까요?”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샤론은 조심스럽게 살생부를 넘겨받았다.
무겁고 두툼하다.
심지어 그 신비주의 마녀 케테르 공작의 살생부라니.
앞으로 위험을 무릅쓰게 될 아멜리아를 향한 걱정도 걱정이나, 호기심이 들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어떤 마녀, 어떤 호문쿨루스가 존재할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샤론이 책장을 펼쳤을 때.
자연스럽게 고개가 갸웃 기울 수밖에 없었다.
“아멜리아 님.”
“네.”
“이 책이 정말 살생부 맞나요?”
“네?”
샤론은 살생부를, 아니 살생부라고 불러도 정말 맞는 건지 싶은 의문의 책을 아멜리아에게 펼쳐 보였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데요?”
샤론이 펼쳐 든 살생부는 아무리 넘겨봐도 백지뿐이었다.
책을 돌려받은 아멜리아가 팔락팔락 거칠게 책장을 넘겨 보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아도 존재하는 것은 새 것처럼 하얀 공백.
“왜… 왜?”
아멜리아는 당혹스러웠다.
시우와 재회하고 난 뒤 살생부를 펼쳐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종이의 질감, 두툼한 커버까지.
꽤 오랜 시간 한 몸처럼 지냈던 책을 다른 것과 착각할 리 없다.
제 소임은 여기까지였다는 듯, 혹은 완전히 고장 난 것처럼 단 한 글자도 적혀있지 않았다.
아멜리아도 눈치챘던 사실이지만 이 살생부는 예사로운 책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언서에 가까웠다.
호문쿨루스와 공적의 위치가 항상 같은 곳일 리 없음에도 정확하게 위치를 점지해주었으니 말이다.
그런 책이 별안간 백지로 변한 것은 어떤 경우이며 어떤 것을 뜻하는지.
어쩌면 그것이 불길한 의미가 아닌지.
초조한 심정과 함께 아멜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샤론 양, 미안해요. 잠시 가볼 곳이 있어요.”
“네, 네?”
아멜리아는 샤론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고 자리를 박찼다.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우와 관련된 것이다.
케테르 공작을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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