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
1.
옛 마녀.
이는 마녀의 도시 게헨나가 생기기 전부터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존재해온 마녀를 칭한다.
마녀의 도시의 창조자, 마녀 사회의 질서를 선도하던 케테르 공작.
게헨나 최대 학파 진리진명 학술회의 수장 에렐림 공작.
예언기관의 관리자이자 수호자인 ‘묵시의 마녀’.
전 세계를 유랑하며 유유자적 살아가는 ‘신록의 마녀’.
자신만의 요람을 만들고 그 안에 틀어박힌 ‘시간의 마녀’.
여전히 물밑에서 활동하며 온갖 혼란을 일으키는 ‘속삭임의 마녀’.
현재는 행방불명이지만 과거 무수한 마녀를 통째로 먹어치운 ‘잠언의 마녀’.
클리포트의 수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되려 공적을 몇이나 죽이고 잠적한 ‘양자리의 마녀’.
본래는 심해의 마녀를 포함한 아홉 마녀를 옛 마녀라고 일컬었으나, 300년 전 케테르에게 숙청당한 현시점에 이르러선 그녀를 제외한 총 여덟이 남은 셈이다.
사실 되짚어보자면 ‘옛 마녀’라는 칭호 자체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따지고 보면 그저 장수했다는 것을 뜻하니까.
그럼에도 이들이 공적에게마저 경외의 대상이 되는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토록 오랜 기간 계승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수한 재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는 것.
실제로 마녀 명조차 파악되지 않은 릴리스를 제외하고 전원 대마녀이며, 규격 외인 케테르만 없었더라면 시대의 패권을 다퉜을만한 강자들이다.
그러나 단순히 강한 뿐이었다면 경탄할지언정 경외를 받지는 않았겠지.
옛 마녀가 두려움을 사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모두 잔혹한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생존한 마녀이기 때문이다.
게헨나가 존재하기 전 추방자라는 개념은 없었다.
공적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이다.
같은 마녀를 해체해 낙인을 취하는 것이 위계상승의 지름길인 이상,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동족상잔은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케테르가 본격적으로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게 된 이후엔 각기 제 영역을 지킬 뿐이나 옛 마녀가 모두 뛰어난 전사이자 작금의 마녀와 전혀 다른 사고방식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중 한 마녀, 세간에는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심해의 마녀에게 도움을 구하러 가는 클레흐 역시 그 부분만은 마음에 걸렸다.
공적을 살인자 혹은 미치광이라 칭한다면, 옛 마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괴물들이다.
비록 ‘맹약’을 매개로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어딘가 꺼림칙한 것이었다.
“언제 오는 거에요?”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남태평양의 지구 상에서 가장 고립된 망망대해이다.
지표면의 70%가 바다라는 것이 와닿지 않는 사람도 이곳에 오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공에 높게 떠있는 상태임에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퍼렇게 일렁이는 해수면뿐.
그럴법도 하다.
심해의 마녀 샬리트 누켈라비가 만남의 장소로 지정한 것은 통칭 도달불능점이라고 불리는 남태평양의 한가운데였으니 말이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무인도만 해도 직선거리로 2,000km가 넘으며, 선박이나 비행기가 지나다니는 항로조차 아니다.
그런 이유로 수명이 다한 인공위성이나 우주 발사체를 궤도에서 낙하시킬 때나 문명의 조각을 느낄 수 있는 벽지 중의 벽지였다.
대마녀인 클레흐조차 여기까지 오는데 애를 먹었으니 말이다.
“약속한 시간은 벌써 지났는데….”
약속 장소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도 꼴 받는데, 예정된 시간이 30분이나 지났음에도 심해의 마녀는 그림자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마녀의 시력에 이렇게 탁 트인 전망이 더해지면 적어도 수십 킬로미터는 관측할 수 있는 걸 고려하면 아마 더욱 오래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힘들게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짜증을 느낀 클레흐의 손에서 원격편지가 구깃구깃 구겼다.
그때 푸른 수면 아래로 어둑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약 45도의 멋진 부상각으로 고래가 솟구치듯 거친 물보라를 일으키는 물체를 본 클레흐는 할 말을 잃었다.
“…….”
고래를 연상시키는 유선형의 동체, 평평한 상부 갑판 뒤쪽 즈음에 지느러미처럼 우뚝 솟아있는 수직방향타와 망루.
뜬금없이 등장한 거대한 쇳덩이의 정체는 잠수함.
클레흐에게도 낯설지 않은 현대 장비였다.
잠수함은 각종 불법적인 밀수를 위해 애용됐으니 말이다.
문제는 사이즈다.
얼핏 보아서도 100m는 넘어 보이는 커다란 크기는 누가 봐도 군용 잠수함이었다.
바다 속에 공방을 구축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것이 잠수함일 줄이야.
상부의 개방된 해치를 따라 선내로 들어선 클레흐는 승조원의 안내를 따라 좁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여기서 승조원이란 당연하게도 사람이 아니다.
어설프게 구소련 시절 군복을 걸치고는 있었지만, 인간과 물고기를 교배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런 끔찍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은 모습이었다.
등을 볼록하게 만들며 이마까지 솟아있는 지느러미, 피부 위를 덮는 짙은 녹색의 비늘.
심해어처럼 툭 튀어나온 눈알은 초점 없이 뿌연 순막에 덮여있고, 물갈퀴로 이어진 손가락과 연신 뻐끔이며 비린내를 풍기는 아가미까지.
신체 각 부위가 당장 쳐죽이고 싶을 정도로 흉측하다.
“이…이…이쪽으로….”
기이한 발성으로 용케도 사람 말을 하는 승조원의 안내를 받으며 클레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확실하다. 이 잠수함은 마녀의 공방으로 개조되어 있다.
배관 각부에 내장처럼 뻗은 정체불명의 촉수가 마력을 공급하고 있었으며, 사방에서 맥동하는 파동은 이 잠수함 자체가 일종의 아티펙트임을 의미했다.
기관부의 통로를 거치자 등장하는 것은 뜻밖에 말끔한 라운지였다.
한 50년 정도 전이었다면 근사한 호텔 라운지에 비견할 수 있겠으나, 애석하게도 유행의 변화를 좇지 못해 고리타분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그런 분위기.
양옆으로는 클레흐를 안내한 승조원과 똑같이 생긴 생선 인간이 가신처럼 나열해 있었으며 중앙에는 오만하게 다리를 꼰 마녀가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짐의 왕국, ‘아쿨라’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명대로 심해만큼이나 짙푸른 눈, 그리고 검은색에 가까운 청발을 지닌 그녀는 양팔을 벌려 환대의 의사를 밝혔다.
생각보다 어려 보이는 용모였다.
허나 방심할 수 없는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키고 대충 인사를 건네려던 때.
“짐의 공방에 크게 감탄한 것이 보이는구나. 지당한 반응이다. 누구라도 이런 압도적인 공방을 목도한다면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니….”
“그도 그렇겠지, 수중 배수량 48,000톤. 전장 172M, 함폭 23M. 실로 잠수중순양함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규모가 아니더냐?”
뭔가 말할 새도 없이 심해의 마녀는 자신의 공방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만한 크기를 가지고도 개조를 거쳐 잠항 심도 5km를 보인다는 둥, 지금도 심도 2km를 향해 나아간다는 둥, 완벽한 내부 편의시설을 구축하고 있다는 둥, 레이더는커녕 고정식 음파탐지기에도 감지되지 않는 은폐 성능을 지녔다는 둥.
심지어 소련이 붕괴할 때 몰래 구매해서 마개조했으며, 10개의 MIRV 핵탄두 탑재한 대륙 간 탄도미사일 20발과 어렵사리 구한 최신형 어뢰가 무장되어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
거의 10분 내내 신이 나게 떠들어대는 샬리트의 모습에 클레흐는 그게 뭔데 씹덕아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았다.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건 쓸 곳 없는 말을 정신없이 늘어놓으며 기선을 제압하려는 고도의 전략일 수도 있다.
가까스로 욕설을 주워 삼킨 클레흐.
“멋져요. 대단해요. 알겠으니까 좀 멈추세요.”
“아직 30분은 더 설명할 게 남았거늘….”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무는 심해의 마녀.
이딴 게 ‘옛마녀’?
아무리 심리전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
클레흐 자신도 유치한 성격이라는 평가를 받곤 하지만 이건 뭐 장난감 자랑하는 애새끼도 아니고….
“본론으로 넘어가죠. 시간도 없으니.”
“본론이라…. 아, 맹약인가 뭔가 하는 거?”
“그래요, 선대 아스모데가 목숨을 걸고 당신을 구해냈죠. 하나의 목숨을 하나의 목숨으로 갚겠다. 누켈라비의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을 지킬 차례에요.”
클레흐는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와 죽여주었으면 하는 남자 마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단숨에 흥미가 없어졌다는 듯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운 채 경위를 전해 들은 샬리트는 잠깐 고민하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러니 그 남자를 죽여주….”
“거절한다.”
“…….”
“그나저나 요즘 세상은 남자도 마녀가 되나?”
클레흐는 그야말로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실 클레흐가 복수해야 하는 상대는 티페레트 공작이었다.
그러나 구태여 청부 대상을 신시우로 옮긴 것은 아무리 ‘맹약’이라도 심해의 마녀가 목숨을 건 격전을 거절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만만한 신시우를 앞에 내세웠던 것.
또한 흉수의 정체를 깨달은 티페레트 공작이 심해의 마녀에게 생사결을 걸게 된다면 그것 역시 계획대로 라는 음흉한 속내도 있었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줄이야.
클레흐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죠? 지금껏 설명한 것처럼 케테르 공작은 움직이지 않아요. 상대는 높게 쳐주어야 대마녀 초입에 들어선 마녀에요. 당신의 마법이라면 은밀하게 죽이는 건 일도 아닐 텐데?”
“분명 짐의 스승이 아스모데에게 은혜를 입고 맹약을 맺은 것은 사실. 허나 짐은 싸움이 싫다. 그리고 스승께서 이르시길 괜히 깝죽거리다가 죽지 말고 가늘고 길게 살라고 하셨다.”
스승?
뜬금없이 튀어나온 그 말에 그제야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문헌에서 기록된 바에 따르면 성숙한 여왕의 품격을 풍긴다는 심해의 마녀가 왜 이리 앳된 모습을 한 것인지.
물론 눈앞의 마녀는 어엿한 성년의 여인이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품게 되는 원숙함과 관록이 없다.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옛 마녀치고 경박하고 촐싹거리는 성격, 최종적으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말투까지.
“당신 이름이 뭐죠?”
“르뤼에 누켈라비. 그대가 짐작하듯 10년 전에 낙인을 물려받았다.”
어렵사리 찾아온 심해의 마녀.
그녀는 진정한 의미로 옛 마녀가 아니었다.
이미 낙인이 계승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심지어 맹약이라는 말을 듣기는 한 것인지 당당하게 협조를 거부한다.
클레흐의 눈에 살기가 맴돈다.
계획은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차선을 택하면 될 일.
르뤼에가 마녀가 된 것은 고작 10년 전으로 물려받은 낙인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기엔 아슬아슬한 시기다.
전투 경험 따위 있을 리가 없다.
여기서 목숨을 빼앗고 낙인을 강탈한 뒤 후일을 도모한다면?
“불경한 발상이로고”
클레흐가 정신을 차렸을 땐 귓전에 섬뜩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굉장한 저음 같이 들리기도 하고, 동시에 가청주파수를 아슬아슬하게 넘긴 고음 같기도 하다.
이형의 생명체가 뺨을 핥듯 심장을 서늘하게 울리는 포효 속 르뤼에는 고고히 말했다.
“짐의 무대에서 드잡이를 벌이겠다고?”
이곳은 잠수함.
지금 이 순간도 바다 깊은 곳으로 잠수 중이다.
아무리 클레흐라고 해도 심해 한가운데서 ‘심해의 마녀’에게 싸움을 걸 정도로 무모하진 않다.
손을 들고 끌어올리려던 마력을 말끔히 털어냄으로써 교전 의사가 없음을 밝힌다.
이것도 저것도 잔뜩 꼬여버린 상황에 이를 가는 클레흐.
“깊은 존경을 품고 고개를 조아려야 마땅한 어전에서 발칙한 송곳니를 드러낸 불경, 목숨으로 치러야 마땅하겠으나. 이번만큼은 눈 감아 주겠노라.”
“거참 더럽게 고맙네요.”
“칼을 들어 손을 더럽히는 것은 여제가 아닌 백정의 소임이니라. 허나 배에 칼을 품은 은인이라 한들 귀히 대하고 맹약을 이행하는 것은 여제의 책무겠지.”
“그 말은…?”
르뤼에의 손바닥 위로 푸르스름한 구슬이 생겨나더니 클레흐에게 날아왔다.
“짐의 어항(魚缸)을 하사하노라. 네가 말했던 악독한 남자 정도는 런치 세트 해치우듯 가볍고 은밀하게 처리할 수 있을 터.”
얼핏보기엔 별다른 특색이 없는 작은 구슬.
그러나 새끼손톱만 한 구술 안에 형용할 수 없이 무겁고 차가운 마력이 응축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이 ‘어항’이야말로 심해의 마녀가 보유한 자성마법의 핵심 예장이니.
“이거라도 고맙네요.”
비록 심해의 마녀에게 직접 도움을 받진 못했으나 비협조적이던 자세를 생각해보자면 나름 최상의 결과물이었다.
“하나 충고해두지.”
술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클레흐에게 르뤼에가 넌지시 말했다.
충고?
당연히 예장을 취급함에 있어 주의사항 같은 것일 줄 알았던 클레흐.
“남녀의 치정은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다 하였다. 순간의 치기에 지배당해 죽이려 드는 건 어리석은 선택일 수 있노라.”
아니나 다를까.
병신같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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