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
1.
샤론으로서는 조금 심통을 부렸을 뿐이다.
시우랑 같이 놀고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그가 아멜리아만 계속 신경 쓰느라 샤론은 물론 쌍둥이조차 잘 만나러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멜리아의 사정은 시우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다.
그녀가 어떤 상처를 안고 있었고, 어떤 이유로 둘이 갈라지게 되었었는지, 또 어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났는지도.
하지만 이해하고는 있어도 마음속 한 구석으로 아멜리아가 조금 미운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 샤론은 아멜리아가 만들어낸 재난에 휘말려 시우가 죽기 직전까지 갔던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사지일 게 뻔한 장소로 그가 기어기 걸어 들어 갈 때.
그런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얄팍한 원소 강화밖에 없었을 때.
시간을 맞추지 못해 에렐림 공작의 심판이 하늘을 수놓을 때.
결국 왼쪽 팔을 영영 잃은 채 돌아왔을 때.
샤론은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을 느꼈다.
시우가 여태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아멜리아가 케테르 공작의 살생부를 이행해 준 덕분이지만, 그때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던 충격은 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유독 쌍둥이와 엘로아 때보다 마찰이 잦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고려해도.
해서는 안 될 경솔한 말이었다.
“죄송해요….”
샤론은 솔직하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입술을 달짝여 뭔가 더 미사여구를 덧붙일까 생각했으나 관두었다.
이유를 붙이건 무엇을 하건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변명밖에 더 될까 싶었던 까닭이다.
“…괜찮아요. 저도 조금 흥분했네요.”
한편 아멜리아는 머리를 두들겨 맞은 충격이었다.
샤론의 말이 발칙하기 짝이 없는 모함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시우는 열성적으로 아멜리아를 돕는다.
에센셜 오일을 추출하는 일이나 가게 일을 돕는 일은 물론 대부분의 시간을 아멜리아를 위해 할애한다.
그건 필연적으로 다른 연인들에게서 시우를 뺏어감을 의미했다.
하지만 시우는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 근간에는 아멜리아를 향한 조심스러운 배려가 깔려 있다.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는 듯한 손길.
미혹이 스며든다.
적어도 아멜리아가 아는 한 시우는 상냥하다.
호구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남을 위해 손해를 보는 타입이다.
그렇다면 그의 본심과 행동에 간격이 있는 게 아닐까?
사실은 다른 연인과도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자신을 돌보느라 묶여있는 것이 아닐까?
부정할 수 없었다.
아멜리아는 그런 사실을 두루뭉술하게 외면하며 그를 독차지 해왔다는 것을.
샤론이 찾아와 불만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일전 아멜리아였더라면 멘탈이 와장창 박살 났을 법한 일이지만 시우와 함께한 시간은 허튼 시간이 아니었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은 아멜리아는 곧장 실언에 대해 사과한 뒤 전전긍긍하는 샤론을 보며 그녀의 말에 악의가 없었다는 사실까지 파악했다.
충분히 가질 법한 반발이다.
아멜리아가 반대의 상황이었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
“…….”
-삐걱 삐걱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던 찰나.
타이밍이 좋게 시우가 낡은 나무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말씀하신 오일 전부 가져왔습니다.”
“고마워요. 여기 놔 주세요.”
잠깐의 소강상태 이후 아멜리아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심란한 마음도 여전하고 시우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지만, 지금은 일을 해야할 시간이다.
샤론은 연적 이전에 고객이고 아멜리아는 주어진 책임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복잡한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룬다.
아멜리아는 시우가 건네준 에센셜 오일들을 촤르륵 조향 선반 위에 펼쳐 놓았다.
향수를 제조하는 조향은 종종 작곡에 비유되곤 한다.
수많은 향료를 조합해 노트와 어코드를 만들어내는 섬세하고 예술적인 작업.
아멜리아는 고순도 알코올을 비커에 따른 뒤 하나씩 에센셜 오일을 골라냈다.
향수의 ‘노트’가 일반적으로 3단 피라미드 구성을 취하듯 아멜리아의 향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장 먼저 향을 처음 뿌린 뒤 10분 내외로 느낄 수 있는 첫 향, 탑 노트.
가볍고 휘발성 강한 탑노트가 사라지면 풍부하게 찾아오는 향수의 심장, 미들 노트.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린 이후 충분한 시간이 지났을 때 체취와 섞인 잔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피날레가, 베이스 노트이다.
조향에 있어 첫 번째 단계는 이 베이스노트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테마의 골격을 잡는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축하듯 가장 밑의 단계부터 향을 쌓아간다고 표현하면 좋을 것이다.
이 순간부터는 샤론도, 시우도 딱히 할 일이 없다.
아멜리아가 샤론을 보고 떠올린 테마는 청순과 관능의 조화로운 화합, 성장.
바닐라와 아이리스, 레진을 기조로 몇 가지 에센셜 오일을 섞었다.
머릿속으로 그려두었던 향기의 뼈 대가 잡히며 윤곽을 드러낸다.
두 번째 작업.
이렇게 만들어진 향수의 골조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다.
이때 사용되는 에센셜 오일을 모디파이어라고 하는데 베이스노트라는 스케치 위에 색을 칠하는 과정이다.
아멜리아의 초이스는 일랑일랑, 장미, 쟈스민, 계피, 라임, 베르가못, 수선화 등등 수십 가지의 향료.
그녀가 자그마한 향료 병을 들어 톡톡 비커 안에 떨어뜨릴 때마다 황홀한 향기가 파문과 함께 진동한다.
거칠고 투박해 제대로 모양을 드러내지 않은 향을 조각하듯 깎아내고 때로는 덧붙이는 과정은 샤론조차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중할 정도였다.
그녀의 손끝이 작게 방울을 떨어뜨릴 때마다 향의 폭과 두께, 매력이 휙휙 뒤바뀌었으니 말이다.
세번째 작업.
향수의 서곡인 탑노트를 가하는 작업.
동시에 베이스노트 - 미들노트 간의 원활한 조화를 조율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향료 한 종류를 넣느냐 마느냐, 한 방울을 더 추가하느냐 덜어내느냐.
이미 많은 향료가 섞인 만큼 한 방울의 잘못된 선택이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
아주 사소한 차이만으로 향수의 향이 뒤바뀌기에 세심함과 섬세함을 요한다.
따라서 보통은 조향표를 작성해가며 시행착오를 거치기 마련이나, 아멜리아에게는 불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녀는 오직 직감과 예술적 영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실수 없이 순식간에 모든 향료의 배합을 끝냈다.
“후우….”
아멜리아는 숨을 내뱉으며 완성된 향수에 가볍게 마력을 가했다.
본래 앞선 세 단계 이후 오래도록 향이 지속하도록 하는 보향제 첨가, 숙성을 통한 향의 조화, 불필요한 향의 탈취 작업을 거쳐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멜리아는 일련의 과정을 마법으로 단축한다.
이로서 수백 년이 지나도 향이 변치 않는 마법 향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됐어요. 부가적인 마법 효과로는 활력의 증진이 첨가되었어요. 시향해 보세요.”
현란한 아멜리아의 손길에 감탄하고 있던 샤론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는 사과할 타이밍을 놓쳐 어물쩍거리는 샤론의 손목을 잡아끌고 가볍게 향수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마법을 통해 전체 노트를 살펴볼 수 있게 향의 진행을 가속할 거에요.”
“…네.”
애써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멜리아의 태도에 어쩐지 심란한 샤론.
그러나 눈을 감고 향을 들이마시는 순간 잡념을 떨치고 환상이 펼쳐진다.
장소는 과수원.
때는 늦여름과 가을의 경계.
노을진 동산 위로 드리운 묵직한 가지에 손을 뻗은 소녀, 샤론의 손에는 방금 수확한 듯 싱그러운 녹색 사과가 들려있다.
입을 벌려 조심스레 사과를 베어 물자마자 사과는 어느덧 오렌지로 변해있었다.
그저 상큼하다기보다는 진득하다.
한입 베어 문 오렌지의 과즙이 턱을 타고 가슴골로 파고들어 순진한 소녀의 살 내음에 파묻힌 느낌.
풋풋했던 과실의 향기는 어느덧 살짝의 관능을 머금은 파우더리한 바닐라 향으로 변해왔다.
머리를 독하게 마비시키는 그런 바닐라 향이 아니다.
살짝 올려낸 휘핑크림처럼 혀끝에 닿는 것만으로 살포시 녹아내리는 듯한 푹신함.
첫키스의 달콤함처럼 부드럽게 샤론의 전신을 휘감은 바닐라 향은 다시금 옅게 희석한 캐러멜 시럽처럼 변해 전신에서 녹아내렸다.
아무것도 몰랐던 풋풋한 샤론이 싱그러운 사랑에 눈을 뜨고, 꿈속을 거니는 듯한 첫 키스를 거쳐 한 남자의 여인이 되기까지.
그 달콤함에 젖어들기까지의 서사가 모두 녹아들어 있었다.
“향수의 이름은 ‘Jusqu'à ce qu'une fille devienne une femme’으로 붙였어요.”
그 뜻은 한 소녀가 한 여인이 될 때까지.
고작 향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표현할 수 있다니.
샤론은 전율에 가까운 감동을 느끼며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쓸었다.
방금까지 아멜리아와 투닥거렸던 것도, 그녀에게 모진 말을 내뱉고 만 것도 잠깐이지만 모두 잊어버리게 됐다.
샤론은 예술가를 바라보는 감탄을 담아 솔직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엄청엄청, 맘에 들어요. 어떻게 이런 향수가 있을 수 있죠?”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시우는 향수를 공병에 옮겨 담고 상자에 곱게 포장해주었다.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병을 정리하는 아멜리아와 그런 그녀를 보며 머뭇거리는 샤론.
일단 말실수한 것에 대해 사과도 하고 싶고, 여러모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좀처럼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다.
그때 결재판을 든 시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샤론.”
“으, 응?”
“근데 너…. 괜찮아?”
행여 샤론의 자존심이 상할까 아멜리아에게 들리지 않게 뉘앙스만을 내비친 시우.
아마 금전적인 문제로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첫 만남 때도 그렇고 샤론은 시우 앞에서 궁상맞은 모습만 보여왔으니 그럴 법도 하지.
가난이 지긋지긋하긴 해도 비굴한 것이나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쌍둥이의 수업을 맡게 된 이후로는 제법 돈도 쌓았다.
“물론이지, 나 이제 빚도 다 갚았고 취직도 했는데 뭘.”
“그래? 그럼 여기 서명해 주면 돼.”
가슴을 쭉 펴며 시우를 안심시킨 샤론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결재판에 꽂힌 청구서를 보았다.
그리고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2.5 fl.oz의 향수 한 병.
우선 앞서 취향 검증을 위해 사용되던 시향용 향수 비용이 당연하다는 듯 샤론의 앞으로 청구되어있다.
기본 조제비용에, 특별 원료 비용이 추가 거기에 맞춤 조향 서비스 비용까지 추가.
엄청 예쁜 공병 값 추가, 별도로 부여된 마법 효과 비용 추가.
거기에 부가가치세 8.5%가 모두 더해진 금액은.
“그, 금화 122.2 파운드…?”
그녀의 특제 향수가 비싸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충 금화 10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샤론이다.
물론 샤론에게 금화 10개도 향수 한병을 위해 투자하기에 적은 비용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멜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과 별개로 시우를 위해 해준 것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었고, 그런 그녀가 자신처럼 빚에 허덕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따라서 큰 도움은 못되더라도 기꺼이 향수를 팔아주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구서에 적힌 금액은 한 화로 1억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샤론이 인생에서 처음으로 야심차게 맞춰입은 드레스를 5벌은 더 살 수 있는 돈이다.
예상 예산의 12배를 훌쩍 뛰어넘은 충격적인 비용에 눈을 부릅뜨고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게 어딨어!
혹시 아까의 실수에 대해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가?
하지만 아멜리아는 샤론 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조향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고, 결제판을 건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시우다.
현세 접선소의 밀수꾼들처럼 바가지를 씌울 일은 없다는 것.
샤론은 오딜과 오데트를 가르치며 제머나이 백작가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수업료는 기존 빚의 탕감으로 퉁쳐졌기에 품위 유지 비용과 연구 보조비 정도만이 샤론의 주머니로 들어온다.
그 두가지 지원금만으로도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마법을 연구하는 것만으로 온갖 보석을 펑펑 써야하는 샤론에겐 상당히 빠듯한 예산이었다.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가계부.
이 지출은 적어도 몇 달은 연구에 차질이 생길만큼 뼈 아픈 것이었다.
진상 고객도 아니고 이제 와서 환불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깎아달라고 말하기에도 자존심이 상한다.
샤론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쥐고 울먹이는 표정으로 시우를 보았다.
“호, 혹시 할부 되나요…?”
결국 12개월 할부로 결제.
대충 인사를 나눈 뒤 향수가 든 상자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나서는 샤론의 어깨는 몹시 무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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