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93화 (493/917)

#493

1.

고위 마녀들의 사교모임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예소드 백작의 레바나 대욕장이나 가정 초대회 등에서 친목을 이루기도 하지만,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첫 번째 붉은 지붕 살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풀네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다들 ‘붉은 지붕 살롱’ 더 짧게는 ‘살롱’등으로 줄여 부르는 붉은 대저택에서는 마녀 간의 친목 교류가 아주 활발하게 일어난다.

각종 마법 용품이나 사치품의 경매도 이곳에서 진행되며 그게 아니더라도 항상 두자릿수는 되는 마녀가 모여 유유자적 머문다.

혹자는 마법에 관한 논의와 토론을 자유롭게 나누기도 하고, 혹자는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민속놀이 위치보드를 즐기기도 하며, 혹자는 그냥 소파에 느긋하게 누워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시기도 하는….

한 마디로 게헨나 내 시간 많고 부유한 마녀들의 친목 커뮤니티라고 볼 수 있겠다.

“로즈 글래스요? 요즘 인기가 그렇게 자자하다죠? 저도 회원권을 신청했네요. 접객 능력이 괜찮더라고요.”

“어머? 아무리 그래도 호스트바라니. 마녀가 드나들기엔 조?금 격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호호호.”

“그렇게 보이셨나요? 남총을 구한다고 그리스로 출장가셨던 마녀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오호호호.”

“어머나 말씀도 참 강아지 음경처럼하시네요. 그때는 사업차 방문한 거라니까요?”

“아, 그랬었죠?”

이런 교양있는 대화부터.

“그나저나 아도나이 백작이 주선하는 다음 경매는 언제쯤일까요?”

“요즘은 현세가 아주 혼란스러워서 밀수꾼들이 밀수에 차질을 빚는다 들었어요.”

“저기요, 그 소문은 들으셨나요?”

이런 게헨나 내부의 시시콜콜한 소문들까지 도란도란 흐른다.

그러나 점잖은 웃음소리와 향긋한 분 내음, 화사한 미소와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에 속지 말지어다.

아리따운 여자들이 같은 공간에 잔뜩 모여있게 된다면, 그곳엔 필연적으로 경쟁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곧 전장이다.

얼마나 섬세하게 아름다움을 갈고 닦았는가?

얼마나 세련된 장신구를 둘렀는가?

얼마나 본인에게 걸맞은 꾸밈새인가?

얼마나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우아한 품위를 선보이는가?

모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실시간으로 평가한다.

여기 모인 귀부인은 그 살벌한 점수표가 걸린 전장에 기꺼이 발을 내밂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재증명한다.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누워 술잔을 기울이는 마녀도, 부채로 입을 가리며 담소를 나누는 마녀들도.

실은 전력을 다해 자신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흐음~ 덥다.”

가령 아까부터 소파에 누워있는 푸른 머리의 마녀.

기지개를 켜는 시늉을 하며 자연스럽게 손목을 노출, 더 정확히는 손목에 끼워진 아름다운 팔찌를 노출한다.

거대한 블루 다이아몬드와 은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팔찌는 얼마 전 현세의 한 장인이 한정품으로 내놓은 ‘드메르 신드롬’.

치열한 입찰 경쟁 끝에 무기명의 입찰자에 의해 낙찰되었었는데 저 푸른 머리의 드메르 남작이 영광스러운 주인공이었던 모양이다.

슬쩍 내비친 팔찌를 포착한 몇몇 마녀가 어슬렁어슬렁 주위에 몰려들었다.

“남작 님! 그거 이번에 경매에 나왔던 팔찌죠? 누가 가져가셨나 했는데 드메르 남작님이셨구나.”

“이렇게 아리따운 팔찌가 제 이름이랑 똑같다니 운명을 느껴버렸다니까요. 홀린 듯이 사버렸지 뭐에요?”

“한 번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얼마든지요.”

“아쉽네요. 저도 마지막까지 경매에 따라붙었는데 아쉽게 놓쳤어요. 축하해요 남작님.”

“정말요? 미안해서 어떡해요.”

질투를 꾹꾹 눌러담은 탄식과 부러움의 눈빛.

드메르는 콧대가 한 뼘은 더 올라간 채 자연스럽게 자신의 부와 미적 안목을 과시하던 중 문득 알비레오 백작을 발견했다.

게헨나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인데다가 백작 가문 출신인 제머나이는 살롱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다.

이따금 살롱을 찾는 그녀는 그때마다 처음 보는 장신구와 아리따운 옷을 걸치고 나타나 살롱의 주인공으로 강림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알비레오 백작님, 오랜만에 찾으셨네요?”

드메르는 기꺼이 알비레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지금 알비레오 백작의 옷차림은 수수한 검은 드레스.

평상시에는 한 마리 흑조처럼 우아하게 좌중을 제압하는 백작이지만 오늘 처음 차고 나온 이 팔찌라면 충분히 해볼 만 하다는 판단 탓이었다.

“네, 그간 잘 지내셨나요, 드메르 남작? 정말 아름답게 꾸미셨네요.”

“웬걸요. 평상시보다 조금 더 신경을 쓴 정도죠.”

알비레오는 싱긋 웃음을 지으며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펼쳐 보인다.

드메르는 이미 팔찌를 선보였기 때문에 이제 알비레오가 보여주어야 할 턴이다.

그러나 그녀는 고상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아무것도 선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아선 겸허하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자세.

그리고 많은 마녀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 제머나이 백작에게 승리를 거머쥔 드메르가 회심의 미소를 숨기기 직전.

반전이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서 좋은 향기 안 나나요?”

“그러고 보니…?”

“장미향? 아니, 이 향기는….”

알비레오와 데메르 남작 사이에 모여있던 마녀들이 코를 킁킁댔다.

어디선가 살랑살랑 좋은 향기가 풍겨온다.

자극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선연한 심상이 떠오를 정도로 뚜렷하게 각인되는 향.

인간이 마음을 울리는 예술품을 보았을 때 일말의 신성함과 경건함을 느끼듯.

감수성이 풍부한 마녀들은 자연스럽게 그 향기에 아연해졌다.

“이 향은…. 자신이 아름다움을 알고 있기에 뽐내지 않는 한 송이의 장미 같은 향….”

“제라늄과 장미가 한가득 핀 정원을 거닐고 있는 느낌인 것 같아요…. 허리를 숙여서 그 중 가장 우아하게 피어난 장미의 여왕에게 입맞춤하는 느낌….”

“아름다워요! 자욱한 로즈 오또 속에 그저 아름답기만 한것이 아니라는 듯 코끝을 가시처럼 찌르는 이 스파이시함은! 오, 이런 향수가 존재할 수 있다니….”

겉보기에는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온 알비레오.

그러나 향수란 비록 보이지 않을지라도 패션의 한가지인 법이다.

아멜리아가 선물해 준 ‘한 송이의 장미’는 여실히 그 효과를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백작님, 설마 메리골드의 향수인가요? 선대의 향수도 시향해 보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높은 안목이에요.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운이 좋게도 개인적으로 선물 받을 수 있었답니다.”

“고가품이라지만 워낙에 비싸서 고민했는데…. 한번 들러봐야겠어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난 드메르 남작이 구깃구깃 주먹을 쥐는 동안 알비레오 근처로 점점 많은 마녀들이 몰려들었다.

2.

그런 고로 아멜리아의 향수 공방은 개점 사흘 내내 마녀로 북적였다.

소문을 듣고 미리 주문 예약을 해두었던 마녀부터 향수의 뛰어난 향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뒤 뒤늦게나마 예약을 하려고 찾아온 마녀 등등으로 말이다.

말쿠트 갤러리 구석진 곳의 조막만 한 가게는 그렇게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었기에 결국 예약 절차는 소피아가 모두 맡아주게 되었다.

아멜리아는 1층 매대에 앉아 고객의 니즈를 파악한 뒤 에센셜 오일을 고순도 알코올에 섞어 향수로 만들었다.

시우는 벨보이 겸 조수 역할을 도맡게 되었다.

찾아 온 마녀를 맞이하고 1층에 준비되지 않은 향료와 공병을 2, 3층 창고에서 꺼내오는 역할이다.

이렇게만 들으면 시우는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르간처럼 층층이 나뉘어 가능한 많은 향료를 배치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조향선반이지만 그래 봐야 1층에 놔둘 수 있는 향료는 수백 종이 전부였다.

한편 아멜리아는 수천, 수만 종류에 달하는 다양한 향료를 각자의 개성에 맞춰 사용했다.

같은 꽃에서 에센셜 오일을 추출했더라도 생산지, 품종 심지어 생산 연도에 따라 향기가 달라지기에 아멜리아의 주문에 따라 열심히 라벨을 살펴 챙겨오길 반복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에센셜 오일을 가져오랴, 되돌려 놓으랴를 반복하다 보니 SCV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후우.”

아멜리아가 한 고객당 들이는 시간은 약 한 시간.

예약 손님 간에는 조금의 텀이 있었기에 방금 한 마녀를 내보낸 지금이 한숨 돌릴 수 있는 타이밍이다.

방금 향수를 팔고 받은 금화의 개수를 헤아려 금고에 넣어두었다.

매대 안쪽의 작은 금고에는 벌써 눈이 번쩍거릴 정도의 금화가 쌓여 있었다.

어차피 빚 갚느라 빠져나가야 하는 돈이지만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뿌듯해진다.

“신시우 조수, 힘든가요? 들어가서 쉬겠다면 특별히 허락할게요.”

“아닙니다. 어떻게 저 혼자 쉬겠어요.”

“제 호의를 거절하는 건가요?”

고저 없는 목소리와 그만큼 아무런 변화가 없는 무표정.

아멜리아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둘의 사이가 굉장히 사무적이거나, 혹은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아카데미에서 상황극을 하며 관계를 맺고 난 이후로 아멜리아가 그런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니 별수 없다.

당연하지만 악감정에서 기인한 태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아멜리아 나름의 유머에 가까웠다.

저렇게 은근히 고압적인 태도와 딱딱한 말투로 굴다가도 조금의 틈만 생기면 슬며시 애교를 부리는데 그게 또 심장에 몹시 해롭다.

특히 할 일을 끝내고 단둘이 남는 밤이 되기만 하면, 낮이밤져의 완벽한 표본을 보여준달까.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갭임은 분명하다.

“오늘 일이 끝나면 무례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해주겠어요.”

아무튼 이런 부류의 농담을 자연스레 주고받게 될 정도로 아멜리아의 거리가 허물어졌음을 느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고 직접 물어본 적도 없지만, 아주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절대로 갚아나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던 마음의 빚을 제 나름의 방식으로 조금씩 떨쳐낸 것인지도 모른다.

시우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아멜리아 스스로 용서할 수 없던 과오를 말이다.

“뭘 그렇게 빤히 보는 거죠? 설마 싫다는 건가요?”

“저야 좋죠. 근데 어제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펑펑 우셨으면서 오늘은 자신 있으세요?”

“흥, 각오하기나 하세요.”

그것은 몹시도 시우로서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 중이다.

어떤 행동을 하건 시우의 눈치를 보며 자신을 굽히기만 하던 아멜리아가 비로소 같은 눈높이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쪽이 한 쪽에게 부채감을 갖고 매달리거나 눈치 보는 관계.

누군가는 그걸 좋아할지 몰라도 시우는 싫었다.

그런 건 건강한 연인 사이라고 말할 수 없다.

농담을 주고받던 시우는 매대로 슬쩍 상체를 기울였다.

커튼도 쳐놨고 갑자기 손님만 들어오지 않는다면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조수! 누, 누가 보면 어쩌려고.”

“부끄러우신가요?”

“누가 부끄럽다는 거죠?”

“누가 봐도 부끄럽다는 표정 짓는 아멜리아 님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부딪치려는 순간.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타이밍 나쁜 손님이 등장했다.

거기에 무슨 악감정이 있는지 문이 부서질 듯 열린다.

“미안, 너무 빨리 왔네.”

짙은 녹빛의 머리칼 상쾌한 민트색의 눈동자.

평상시 편하게 차려입는 옷차림이 아니라 한껏 꾸며 입은 샤론이었다.

놀란 토끼 눈이 된 아멜리아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는 샤론.

둘 사이의 묘한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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