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
1.
밤 11시, 야밤의 산책.
시우와 아멜리아의 산책로는 자연스럽게 말쿠트 갤러리로 결정되었다.
아케이드 자체의 길이만 따지자면 400M밖에 되지 않지만, 유리 돔을 벗어나 골목으로 뻗은 상점까지 포함한다면 훨씬 둘러볼 곳이 많아지기에 족히 한 시간은 넉넉히 돌 수 있는 코스이다.
기품 있는 화려함과 정적인 분위기가 어우러진 레노먼드 타운에서 그나마 율동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말쿠트 갤러리.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술집을 제외한 미용실, 극장 따위는 죄다 문을 닫았고, 마법 용품을 취급하는 상점도 몇몇을 제외하면 문을 닫은 상태였다.
마녀가 24시간 활동이 가능하다 해도 점포를 맡은 일반 시민은 그렇지 않다.
다들 문을 걸어 잠그고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마녀가 부업 느낌으로 운영하는 가게 역시 빠르면 오후 2시, 늦어도 6시면 문을 닫는 경우가 태반이고 말이다.
워라밸을 누구보다 잘 챙기는 마녀들이다.
따라서 항상 마녀로 북적이는 갤러리 역시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간혹 마녀 복을 차려입은 마녀가 궁금하다는 듯 두 사람을 힐끗 보기는 했지만, 전과는 달리 직접 말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다.
욕망의 마녀를 패주 시키며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시우와 최근 커다란 사고의 주범인 아멜리아에게 태연하게 말을 걸어올 마녀는 몇 없으리라.
어쨌거나 마녀 사회에서는 위계가 깡패니 말이다.
“갑자기 장을 보겠다는 말씀은 왜 꺼내신 건가요? 급하게 살 물건이 있나요?”
포장된 길가를 따라 일렁이는 가로등을 바라보던 시우는 옆에서 나란히 걷던 아멜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양털 망토에 몸을 꼭꼭 숨긴 채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며 걷는 아멜리아는, 뭐랄까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어색해하는 듯하기도 하고, 민망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아멜리아는 시우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 주었다.
“아니요, 그냥 시우랑 같이 밖에서 걷고 싶었어요.”
짐작했던 대로, 장을 보러 가자는 말은 구실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데이트…하고 싶었어요.”
힐끗 시우를 살핀 아멜리아는 추가로 제 본심을 전했다.
하긴 옛날처럼 서로 겉돌기만 하며 간보던 시절이 아니다.
비록 최근 모종의 사건으로 서먹해졌지만 두 사람에게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유대가 있었다.
그말을 듣자 시우도 비로소 안심되었다.
아직 아멜리아가 어떤 이유로 시우에게 묘한 거리감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관계가 틀어진 것은 아니라는 확인을 한 까닭이다.
별 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분위기 자체는 괜찮았다.
이 틈을 타 그녀의 생각이 무엇인지 묻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그런데 아멜리아 님, 최근에 묘하게 절 피하시던데…. 그때 일이 부끄러워서 그러신 거라면 괜찮아요.”
“읏!”
복도의 일을 직접 언급하는 건 역효과다 싶어 슬쩍 돌려 말해주었다.
이에 대해 아멜리아는 확 눈에 보이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휙! 하고 시우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깍지낀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멜리아는 시우를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우는 그렇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서툰 그녀가 천천히 보조를 맞춰 따라와 주는 것만으로 고마울 뿐.
같은 맥락으로 아멜리아의 급발진 즉, 대뜸 구석진 복도로 끌고 가 파이즈리 시도를 했던 것에 대해서는 귀여우면 귀여웠지 별생각이 없는 것이다.
“노력해주시려는 마음은 아니까요. 마음만으로 감사합니다.”
“네….”
“그러니까 서두르실 필요도 없어요.”
진심이 전달된 것인지 아멜리아의 악력이 느슨해졌다.
그러나 묘하게 경직된 어깨나 시우 쪽에서 은근히 멀어진 시선 처리까지 원상복귀 된 것은 아니다.
굉장히 쭈뼛쭈뼛 걸었고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아멜리아가 이틀간의 필사적인 고뇌와 발상으로 떠올린 이벤트는 지금 이 순간도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두꺼운 망토까지 입으며 준비한 오늘의 이벤트 의상은 다름 아닌 알몸과 향수.
평소에 즐겨 사용하는 산뜻한 플로럴 계열의 향수가 아니다.
스승님이 남겨주신 특별 레시피에 약간의 어레인지를 가미한 ‘유혹의 향수’다.
성감을 자극하는 관능적인 향료를 듬뿍 사용한 덕에 신실한 신부님의 마음조차 뺏어버리는 최고의 효능을 가졌다고 한다.
조금 전 몸에 뿌릴 때도 그 노골적인 향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첫 노트에서부터 진하게 느껴지는 핑크빛 파우더리함은 무용수의 화장대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파운데이션 브러쉬의 부드러움이 코끝을 살살 훑어내는 질감이 마법 효과로 인해 몇 배씩 증폭된 아멜리아 본연의 살 내음과 섞인다.
‘외로워요, 당장 당신에게 안기고 싶어요’라고 애달프게 간원하는듯한 에로틱한 향기는 왜 스승님이 ‘유혹의 향수’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 법했다.
그런 고로 이 보들보들한 양털 망토 아래에 갇혀있는 것은 아멜리아의 새하얀 나신과 유혹의 향수뿐이다.
이는 아멜리아가 유달리 뻣뻣하게 변해버린 이유이기도 했다.
샤론과 대화 중에서 그의 성벽에 대해서는 대충 진단이 끝났다.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몹시 부끄러운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시우가 좋아하는 ‘야외’의 거사를 위해 알몸에 향수만을 뿌리고 망토만 두른 것까지는 좋았다.
언젠가 샤론을 다시 만났을 때 ‘시우가 가장 좋아하는 옷은 알몸이 아니라 향수던데요?’라고 반박할 멘트까지 마련해 두었으며, 그에게 이 야릇한 시도를 공개한 이후에 할 일도 착실히 생각해 두었다.
하지만 막상 알몸에 망토만 두른 채로 길거리를 걷자 하니 심장이 미칠 듯이 뛴다.
망토 아래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의식하게 하고.
보들보들한 양털의 감각이 전신을 간질거릴 때마다 시우에게 애무받았을 때나 느끼던 열감이 되살아난다.
누군가 알아채진 않을지.
사소한 실수로 이 꼬락서니가 다른 이에게 비치진 않을지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경쟁심을 느끼는 샤론 에버그린에게 일말의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많은 각오가 필요한 행위였다.
“시우.”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이벤트를 어느 곳에서 어느 타이밍에 공개하느냐도 문제이다.
생각보다 길거리에 사람이 남아 있었고 타로 타운과는 달리 곳곳에 가로등이 놓인 말쿠트 갤러리는 은밀한 밀회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대로 산책만 하다 집으로 돌아가 버리면 기껏 준비한 이벤트가 무색해진다.
그렇게 발끝만 바라보며 길을 걷던 아멜리아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풍경이 조금 변했다.
“조금 힘드신 것 같아서요.”
갤러리를 관통하는 대로와 골목으로 빠지는 작은 길의 교차점, 일견 사거리처럼 보이는 교차로 모퉁이에 카페.
술과 와인 및 간단한 음식점을 취급하는 분위기 좋은 노상 카페였다.
시우는 피곤해 보이는 아멜리아를 위해 휴식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전에 와봤는데 괜찮더라고요. 좀 쉬다 가죠.”
단정하게 옷을 아멜리아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밤새 영업하는 가게가 몇 안 되기 때문인지 카페 이곳저곳 마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속살을 내비쳐버릴 방어력이 낮은 옷차림이었다.
이 이벤트는 시우에게만 보이고 싶은 거지 다른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그대로 까무러칠 자신이 있었다.
“어…? 시우….”
“어서 오십시오,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를 제지할 새도 없이 예의 바른 여종업원이 시우와 아멜리아를 한적한 테이블로 안내했다.
졸지에 망토 하나만 걸치고 자리에 앉게 된 아멜리아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주위를 힐끗거렸다.
그녀에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이런 공공장소에서 살짝살짝 맨몸을 보이는 것이 남자의 더욱 큰 흥분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깨달았겠지만….
그건 아멜리아에게 진도가 너무 빠르다.
“이거랑, 이거 주세요. 아멜리아 님은 원하시는 거 있으신가요?”
“아, 아무거나요.”
정중한 자세로 주문을 받던 종업원은 아멜리아의 주문에도 익숙한 일이라는 듯 적당히 메뉴를 체크하고 멀어졌다.
“힘드시면 말씀해주시지 그랬어요.”
“힘들었던 거 아닌데….”
“네? 그랬나요? 표정이 너무 좋지 않으셔서….”
“아니에요, 그래도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불행 중 다행인 점.
이 카페가 상당히 어둑하다는 점이다.
더욱이 옆 사람과의 간격도 널찍하게 떨어져 있으니 사고만 없으면 불상사가 일어날 일은 없어 보였다.
야간에는 조리가 간단한 음식 위주로 메뉴가 편성되어 있기에 금방 나왔다.
새끼 양의 간을 베이스로 한 파테를 빵에 얇게 바른 것과 올리브 절임, 그리고 와인 두 잔이다.
바짝바짝 말라가는 입을 와인으로 적시는 아멜리아.
“내일부터 개점인가요?”
“네, 주요 추출 작업은 끝났으니까요. 시우가 도와준 덕분에 금방 끝났어요.”
“한동안 바쁘겠네요.”
처음의 긴장감이 살짝 가라앉고 술도 들어가자 도란도란 대화가 시작됐을 무렵.
-또각또각
인기척과 더불어 굽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대뜸 말을 걸어왔다.
“이게 누구야? 귀염둥이 아니야?”
군청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훤칠한 키에 육감적인 몸매를 드레스로 과시하듯 휘감고 발목이 부러질 듯 높은 힐을 신은 마녀.
페리윙클이었다.
“페리윙클 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야 종종 바람 쐬러 오는 곳인걸.”
아멜리아는 두 번 놀랐다.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으면 하는 자리에 갑자기 난입한 마녀의 존재에 한 번.
아멜리아를 뻔히 보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맞은 편 시우의 뺨에 쪽 키스를 날리는 것에 두 번이다.
게헨나에서도 뺨 키스는 일반적인 인사법이다.
그러나 뺨을 맞대며 입술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닌 직접 입술이 뺨에 닿는 키스는 정말 친근한 사이가 아니면 하지 않는다.
심지어 둘의 성별이 다르다면 말이다.
“그보다 은혜 갚기는 언제 할 거야? 요 녀석, 요녀석아.”
거기에 마치 장난을 치듯 손끝으로 시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화사한 웃음을 짓는 페리윙클의 모습은 두 사람이 굉장히 가까운 관계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고보니 시우에게 들은 적이 있다.
시우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욕망의 마녀와 싸울 때 행운의 마녀로부터 큰 원조를 받았던 것을.
그렇다면 둘은 또 어떤 관계인 걸까?
“아멜리아 님, 이쪽은 여러 가지로 제게 많은 도움을 주셨던 페리윙클 님입니다. 페리윙클 님 이쪽은 제….”
“애인이에요. 이름은 아멜리아 메리골드.”
불쑥 치켜든 불안감에 은근히 힘주어 말해본 아멜리아.
“어머, 데이트 중이셨구나?”
페리윙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그제야 발견했다는 듯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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