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
1.
새해 자선 행사가 끝난 지 이틀이 지났다.
아멜리아와 시우는 한창 에센셜 오일 추출에 열심이었다.
어느 정도로 열심이냐 하면 48 시간 내내 한숨도 쉬지 않고 추출작업을 계속할 정도였다.
물론 그만큼 일감이 많긴 하다.
갈수록 추출해야 할 원료는 다양해졌고, 그건 곧 아멜리아가 증류기 앞을 떠나지 못한 채 밸브로 압력과 온도를 조절해야 함을 의미했다.
실제로 아멜리아는 커다란 창고가 세 번 비워지고, 다시 네 번 차오를 때까지 쉴 새 없이 계기판을 기웃거렸다.
수면이나 식사는커녕 잠깐 허리를 펴고 스트레칭 정도의 휴식시간도 가지지 않았다.
빡빡한 작업 일정 속에 아멜리아를 내버려두고 쉴 수 없었던 시우도 동참했지만 ‘굳이 이렇게 숨 가쁘게 할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차피 주로 사용되는 에센셜 오일의 추출과 확보는 끝났고 이끼류처럼 마이너한 원료만 남았을 뿐이다.
나중에 부족해지면 느긋이 작업해도 차질이 없는 것이다.
첫 하루는 이 바쁜 일정이 할 일을 미루기 싫어하는 아멜리아의 성정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도 높은 노동 행군이 삼일 차로 접어들었을 때는 시우도 슬슬 감이 왔다.
이건 일종의 핑계였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이렇게 바빠서 시우랑 말할 시간이 부족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멜리아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으며, 반대로 시우의 말에 성의껏 대응하지도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제 시우가 모쏠도 아니고 남녀의 관계가 한 번의 섹스만으로 끈끈해진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지닌 것은 아니다.
다만 그날을 기점으로 훨씬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 정도는 했다.
이후로 꽁냥거리는 필로우 토크도 하고 분위기도 좋지 않았던가?
하지만 잠깐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저녁 식사 자리부터 아멜리아의 분위기가 묘하다.
뭐랄까.
묘하게 이쪽을 피하는 느낌?
그렇다고 아예 회피하는 기색은 아닌 것이 말을 걸면 여태껏 잔뜩 의식하고 있었다는 양 즉각 대답한다.
짚이는 것이 없는 건 아니다.
제머나이 저택에 들렀을 당시.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뜸 복도로 시우를 끌고 가 파이즈리를 시도했던 아멜리아의 모습.
그녀의 가슴은 깜짝 놀랄 만큼 흐트러짐 없는 미형이며 사이즈도 마녀 평균 정도다.
하지만 선 자세로 파이즈리를 원활히 수행할 정도는 아니었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실패한 아멜리아는 호다닥 도망가버렸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 민망하게 남은 나머지 데면데면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아멜리아 님.
드디어 창고에 가득 찼던 각종 원료를 텅텅 비우고, 증류기도 내부 세척을 위해 휴지에 들어갔다.
이제 세척이 완료되는 8시간 동안은 강제 휴식인 셈이다.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아멜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힐끗.
시우가 있는 쪽에 신경을 기울였던 것처럼 곧장 고개를 돌리는 아멜리아.
“제가 뭐 잘못한 게 있을까요?”
“아니요.”
“아니면... 뭔가 문제라도 생기셨어요?”
“그것도 아니에요.”
아멜리아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거짓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없거나 사실과 조금 다르면 시선을 은근히 내리까는 습관이 있으니까.
그리고는 곧장 다시 살필 필요도 없는 계기판으로 발길을 돌리려 한다.
예전이라면 멍청하게 보냈을지 몰라도 이제 그런 식으로 행동하다간 이 알쏭달쏭한 대치가 훨씬 길어진다는 것을 안다.시우는 아멜리아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면 안 될까요? 고칠 게 있으면 고칠게요.”
가느다란 손목에서는 그녀의 맥박이 여실히 느껴진다.
“제가실수했어요?”
“시우가 문제인 게 아니에요. 정말로….”
계속계속 치솟는 아멜리아의 심박수와 겨우 손목과 손의 맨살이 맞닿은 정도로 벌게지는 얼굴.
동시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아멜리아.
갑자기 아멜리아가 더 귀여워 보인다.
그녀의 단아했던 얼굴이 아름답게 일그러지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멜리아가 마감을 앞둔 작가처럼 미친 듯이 일을 하는 동안 스킨십을 권유하지 않았다.당연히 마력 복사 작용에 대한 검증은 말을 꺼내지도 못했고 말이다.
시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이건 혹시 ‘시우와 하고 싶은데 솔직하게는 말 못하겠어요!’ 같은 상황이 아닐까?
그날은 아멜리아가 용기를 쥐어짜네 시우에게 전력투구하다 실패했으니, 어쩌면 이번엔 시우가 먼저 권해주길 은근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남자가 이럴 땐 박력 있게 나가야 하는 거다.
시우는 아무 말 없이 아멜리아의 턱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었다.
손이 그다지 큰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조막만 한 얼굴을 받치고 있으니 굉장히 커 보인다.
당황한 듯 살짝 벌어진 입술, 그 틈으로 보이는 선홍빛 혀.
놀란 사슴 같은 청순한 눈망울과 취한 것처럼 달아오른 얼굴.
“움
고개를 앞으로 내밀자 아멜리아도 입술을 슬쩍 모았다.
길고 숱이 많은 금빛 속눈썹이 나비처럼 내려앉는다.
시우는 자신이 고른 선택지가 정답임을 느끼며 자화자찬했다.이제 조금 더 아멜리아에 대해 잘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쪽쪽쪽 가볍게 입술이 부딪치고.
이제 본격적인 키스 타임이 시작되겠거니 싶을 때 별안간 아멜리아가 멀어졌다.
시우의 소매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손도 어느샌가 옷자락을 놓고 있다.
뽀뽀까지는 좋지만 혀를 섞고 싶진 않아요, 라고 말하는 듯한 완곡한 움직임.
아닌가?
헛다리 짚은 건가?
당황하는 시우에게 아멜리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시우, 오늘 같이…. 장 보러 가지 않을래요?”
“지금요?”
“네.”
당황할 틈도 없이 함께 장보기 제안이었다.
이런 걸 보면 시우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도 저도 알 수 없다.
“가게로 돌아가서 가볍게 씻고 옷만 갈아입고 올게요. 시우는 마무리 정리만 부탁할게요. 가게 앞에서 20분 뒤에 다시 만나요.”“네,일단 뭐… 알겠습니다.”
마무리 정리라니.
아멜리아가 전부 해뒀기에 딱히 할 것도 없었다.
시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멜리아가 떠난 공방 문을 바라보았다.
“뭐지?”
혹시 뭐든지 하겠다는 아멜리아의 말에 정말로 뭐든지 시켜버려서 이런 역효과가 나온 건 아닐까?아니면 새삼 돌이켜보니 부끄러운 걸까?
“그러고보니 지금 벌써 10시가 훌쩍 넘었는데?”
타로 타운의 상설시장은 7시만 돼도 파하므로 레노먼드 타운의 몇몇 가게를 제외하면 영업하지 않을 시간이다.이 늦은 시간에 또 무슨 장을 보겠다는 건지.
시우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창고형 공방을 깔끔하게 정리해 나갔다.
2.
아멜리아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뜨거운 물로 몸 곳곳을 씻어냈다.
본래 마법으로 샤워를 대체하던 아멜리아지만 따뜻한 온수가 심신의 안정에 도움을 된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곧잘 욕실을 찾곤 했다.
“하아....”
샤론, 그리고 쌍둥이.
아멜리아는 며칠 전 그녀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였고, 결과만을 놓고 말하자면 패배했다.
샤론도, 오딜도, 오데트도 각기 다른 강력한 무장과 인연으로 시우와 묶여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시우의 독특한 성향까지 알게 되었다.
밖에서 하거나, 혹은 통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을 사용하거나, 커다란 가슴을 활용하거나, 약간 괴롭힘을 즐기는 등등.
아멜리아의 서툰 노력으로는 따라올 수도 없을 정도로 경험치 차이가 벌어져 있던 것이다.
티페레트 공작은 또 어떤 쇼킹한 경험으로 놀라게 해줄지 걱정이 될 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던 어른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요 이틀.
그 정도 이유로 시우가 미워지거나, 파이즈리를 실패한 일이 부끄러워 대화를 회피한 것은 아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후자 쪽은 아직도 얼굴이 후끈거리긴 해도 그를 피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학자로서의 지식이 있을지는 몰라도 여성으로서의 지식은 충분치 않은 아멜리아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며 마주한 고밀도의 음란한 지식은 이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혼동을 주었던 것이다.
기존 아멜리아의 가치관과는 너무나도 상충하는 정보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이틀에 걸쳐 각오를 끝냈다.
어차피 그에게 남김없이 바치기로 다짐한 몸이다.
시우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에 대해 나름의 발상을 끝냈다.
“좋아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발상과 각오가 끝났다 한들, 막상 시행의 때가 오자 정신없이 가슴이 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경멸하진 않을까요…?”
과연 이걸 해도 될까?
아무리 시우가 변태 같은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봐도 대담하기 짝이 없는 계획을 되짚을 때마다 위와 같은 걱정이 들었다.
그 여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인 아멜리아는 수건으로 몸을 닦고 향수를 뿌렸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단정하게 머리를 빗은 뒤 미리 준비해두었던 옷을 입는다.
이미 시간이 지체됐다.
가게 1층에 달린 도어벨이 울리는 소리도 들렸다.
계획을 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옷을 걸쳐입고 시우가 기다리고 있을 1층으로 내려가는 아멜리아.
오래된 나무계단이 삐걱일 때마다 괜스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까? 하는 망설임.
그것을 가슴에 꾹꾹 눌러담은 아멜리아는 시우와 마주했다.
“아멜리아 님, 생각해보니까 지금 시각이면 열어 있는 가게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괜찮아요, 산책이라도 좋아요.”
시우가 건넨 손을 잡고 계단에서 깡충 내려온 아멜리아.그의 시선이 몸 곳곳을 훑는다.
“따뜻하게 입으셨네요. 추우셨어요?”
“아니요.”
“부드러워 보이네요.”
“네, 부드러워요.”
영체는 그다지 추위나 더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겨울 추운 날씨라도 으슬으슬한 정도가 전부이며 마법으로 가볍게 대처도 가능하다.
그러니 시우가 저렇게 묻는 것은 아멜리아가 처음 보는 망토를 입었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스승님이 물려주신 망토를 둘렀던 아멜리아가 새하얗고 두꺼운 양털 망토를 두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약속이라도 한 듯 손을 잡은 두 사람.
“어디로 모실까요?”
“갤러리를 둘러보고 싶어요.”
그렇게 아멜리아가 야심 차게 준비한 계획을 위해 야밤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