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
1.
위치포인트.
티페레트 공작이 현세에 발족시킨 호문쿨루스 및 공적 토벌의 전초기지.
최초 설립까지만 해도 전 세계 지부를 통틀어 10개도 채 되지 않았으나 긴 세월을 거쳐 각국 각료들과 협의가 끝난 후에는 곳곳에 들어서며 그 영향력을키워갔다.
이는 마녀와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재계 인사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까닭이다.
먼저 현세의 높으신 분들의 입장.
호문쿨루스나 공적의 만행은 발전한 과학 기술로도 대처할 수 없는 재앙 같은 것이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호문쿨루스가 야기하는 재앙과 공적의 패악질을 막아주는 위치포인트의 역할은 만능 해결사 사무소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각국 정치가들은 위치포인트를 설립 및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혜택과 초법적인 이권을 이양해 주었다.
마녀(주로 추방자)로서도 위치포인트의 존재는 달갑다.
현세는 게헨나와 달리 마녀를 보호할 뚜렷한 법령이 없다.
이는 언제든 공적이나 돌변한 추방자의 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함을 의미한다.
아무리 마녀가 초인적인 존재라고 해도 정보를 공유하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기구는 필요한 법이다.
따라서 위치포인트의 초기 설립 목적은 토벌을 위한 전초기지였으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정보 공유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안전지대, 연구소 등의 복합적인 구실을 해주고 있었다.
일종의 미니 게헨나인 셈이다.
그렇기에 현세의 중립지대라는 암묵적인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공적이 밀집된 동유럽, 아프리카 대륙, 남미 곳곳의 대도시에까지 지부를 설치할 수 있었다.
즉, ‘위치포인트가 공격받는다’라는 건 대사관이 공격당하는 것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수아 지부장은 미간을 찌푸린 채 팩스로 받은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거기엔 굉장히 간결한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다수의 신원미상 공적. 다르에스살람 지부 침공. 아브데스트 지부장 외 8명 사망. 철수를 결정합니다. 지원 불필요.]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지부가 침공당해 큰 피해를 당하고 철수했다.
불과 며칠 전에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지부가 침공당해 무너졌으니 이는 곧 동아프리카 최대 지부 두 곳이 무너졌음을 의미했다.
“케테르 공작은… 정말 움직이지 않는 걸까요….”
여태 마녀 사회의 누름돌 역할을 하고 있던 케테르.
그녀가 더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소문이 떠돌 때까지도 잠잠하던 공적들이 최근 마각을 드러내고 있다.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이 소문이 진실임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공적들은 가장 먼저 눈엣가시이던 위치포인트에 조직적인 타격을 가해왔다.
전체 마녀에 대한 공적의 비율은 5%를 밑돈다.
그러나 그들은 마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광기와 망집의 집합체다.
일부 악질 추방자와 공적들로 이뤄졌던 클리포트가 붕괴할 때에도, 복수귀가 되어 돌아온 티페레트 공작의 칼춤 밑에서 살아남았던 사악의 최정예.동 위계라도 통상적인 마녀와의 전투력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그런 그들이 손을 잡고 단체 행동을 했다.
그 결과 고작 이 주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만에 멕시코시티, 카이로, 리마, 산티아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외 총 12개의 지부가 궤멸되었다.
공적 활동이 활발한 와중에도 어찌저찌 활동을 이어가던 남미 지부 역시 모조리 붕괴하며 사실상 남아메리카 대륙은 무법 지대로 돌변했다.
세계 지하 경제 곳곳에 펼쳐진 공적의 사업장 역시 공격적인 확장과 충돌을 일으켰다.
이 혼돈 탓에 추방자들이 몸을 사리게 되었고, 줄어든 토벌만큼 호문쿨루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재해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 마디로 말해 난세.
절대적인 권력자가 죽으며 우후죽순으로 군소 왕국이 난립하던 시기와 비슷하게, 케테르의 억제력으로 숨어있던 공적이 일제히 반동의 여파를 보여주고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게헨나 내부의 마녀나 외부의 추방자들이 제대로 된 대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장 여러 선진국이 게헨나와 위치포인트에 매해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제공하는 것에 비해 낙후된 제삼 세계나 공적의 복마전이던 남미는 별다른혜택을 제공하지 못해왔다.
즉, 딱히 깨물어도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기에 ‘줄건 주자’라는 심산으로 뒷짐을 진 채 관망한다.
작은 밥상을 지키기 위해 피 맛을 보기 시작한 굶주린 투견과 맞서려는 이는 몇 없는 것이다.
실로 안일한 생각이다.
그나마 사태의 심각성을 체감하는 위치포인트의 지부장들이 엘로아를 필두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토벌하고 있으나 역시 중과부적이었다.
“얄궂군요….”
이제껏 마녀들이 얼마나 대가 없는 혜택을 누려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공적도 모자라 ‘옛 마녀’들이 움직이는 정황까지 포착됐다.
지금은 변두리를 먹어치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공적들이 기세를 실어 주요지부를 공격할 때 제대로된 대처를 할 수는 있을런지.수아 지부장은 벌써 고민거리가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2.
전 연인이자 애증의 파트너던 비앙카 벨릴리.
그녀는 죽었다.
진조의 마녀, 클레흐 아스모데는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배후의 주인을 잃고, 1만여 명에 달하는 조직원을 잃고, 보스까지 잃어버린 알코리자 파밀리아는 완전히 붕괴했다.클레흐가 인수 합병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어렵지 않게 그녀의 남은 자본을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클레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복수할 거에요….”원하는 것은 복수, 오직 복수뿐.
규랑5던 2丁의 숨통ili》’버러지에게 합당한 대가를 받아가는 것.
세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비앙카는 한 남자 마녀와 마지막으로 겨루었다고 한다.
더러는 신시우라는 남자에 의해 사망했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공적 사이에서 그 소문을 곧이 곧대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앙카가 그런 허접한 놈에게 죽었을 리 없어요.”
욕망의 마녀가 누구인가?
22 위계, 긴 삶을 통틀어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는 불패의 사수다.
고작 일 대에 불과한 남자와 일기토를 붙어 패배했다는 것은 고약한 농담이라고 밖에 할수 없다.
‘알려지지 않는 비화가 있다’ 그렇게 판단한 클레흐는 비앙카의 공방을 돌아다녔다.이미 대외적으로 알려진 장소는 다른 마녀에 의해 약탈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유사시 도주로 및 안전가옥을 확보해두는 것은 공적이 갖춰야 할 소양.클레흐는 비앙카의 비밀 공방 위치를 제법 알고 있었다.
3일의 수색 이후, 클레흐는 그럴듯한 정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때 뜨거운 사랑을 주고받았던 추억의 장소는 시큰한 칼날이 되어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한편, 그녀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듯한 공방의 서랍에는 비앙카가 조사했던 자료가 모여있었던 것이다.
비앙카가 남자 마녀를 노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신시우.
현세에도 잠깐 소란을 일으켰던 역사상 유일한 남자 마녀.
게헨나의 노예 출신.
추정 위계 19 남짓.
현재 게헨나에 머물고 있으며 수아 아가사, 엘로아 티페레트, 제머나이 백작로부터 신분 공증을 받음.주변의 우호적인 마녀는 예소드 백작, 키벨레 페리윙클, 샤론 에버그린 등.
그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비롯 그를 게헨나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공작일지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호문쿨루스의 난동을 통한 사전 무력 점검.
위험분자인 티페레트 공작과 그를 떼어놓기 위한 작업.
그 이후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기록이 뚝 끊겨있다.
좋은 정보였다.
A건오경2에 대해 가닥을 잡을 수 있었으니까.
비앙카가 일개 남자 마녀에게 당했을 확률은 전무.
그렇다면 그녀를 토벌한 것은 비앙카의 미끼에 속지 않은 티페레트 공작이다.
“아….”
클레흐는 흉수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아득한 절망을 느꼈다.
그 누가 상대라도,
목숨을 걸고 모든 재산을 처분하는 한이 있더라도 복수를 꾀할 자신이었다.
그러나 티페레트 공작만큼은 예외다.
클레흐는 40년 전 대 마녀급 공적 셋을 복날에 개 패듯 때려잡던 티페레트 공작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클레흐 본인 역시 진조의 마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21 위계의 끝자락에 서 있지만 그 미친 복수귀가 상대라면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복수의 대상이 본인일 필요는 없죠.”
클레흐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 서류를 훑는다.
비앙카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신시우와 티페레트 공작은 굉장히 가까운 관계.
그는 그녀의 제자이며 동시에 연인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제자를 잃고 현세를 전전하던 공작이, 또 한 번 사랑하는 남자를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 역시 훌륭한 복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지만 여기서 문제.
신시우는 게헨나에서만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클레흐의 자성마법은 은밀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헨나에 잠입해 그를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라도 막상 그를 죽이려는 시점이 되면 재빠르게 제지당할 것이 뻔하다.클레흐보다 훨씬 신중하고 철두철미한 비앙카가 구태여 그를 게헨나 밖으로 꾀어냈다는 것이 증거였다.
비앙카와 더불어 그나마 면식이 있는 두 마녀는 클레흐에게 조력을 약속했다.소소한 성의를 보이는 것을 대가로 복수를 돕겠노라고.
그러나 클레흐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구도의 마녀’나 ‘검의 마녀’나, 규간을 쪼기 위해 주위를 맴도는 독수리나 다름없는 년이다.
아주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도리어 등에 칼을 꽂겠지.
클레흐가 떠올린 것은 선대와 맹약을 맺은 ‘심해의 마녀, 샬리트 누켈라비’.
세간에는 케테르 공작에 의해 숙청당했다고 알려진 옛 마녀 중 하나였다.
허나 그녀는 버젓이 바다 깊은 곳 자신의 왕국을 만든 채 살아있다.
약 300년 전 선대 아스모데가 위험을 무릅쓰고 샬리트를 사망한 것으로 위장해준 덕분이다.
케테르가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속세와 단절된 채 살아가길 택한 샬리트의 행보를 보고 눈감아 준 것인지는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심해의 마녀는 아직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누켈라비의 이름을 걸고 선대와 맹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하나의 목숨을, 하나의 목숨으로 갚을 것’이라는 맹약을.
클레흐는 곧장 북극해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