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
1.
새해가 밝았다.
루시 예소드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디아나의 침실 문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디아나.”
수확제 이후 디아나의 상태가 이상했다.
천성이 게으른 성격인지라 루시가 애원하다시피 하지 않으면 두문불출하는 사랑스러운 딸.
그나마 최근에 신시우를 가정교사로 들이면서 조금 활달해지나 싶었는데, 그의 발길이 뜸해지자마자 곧장 제 방으로 파고든 것이다.
방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종종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음산한 저주의 읊조림도 들려왔다.
처음엔 시우의 부재가 문제인가 싶어 만남을 주선해보려 했는데 도리어 앙칼진 거부의 반응만이 돌아왔다.
늦은 사춘기를 맞은 딸에 전전긍긍하는 루시.
게헨나에서는 명망 높은 대마녀이며 현세에선 불세출의 사업가인 예소드 백작이라도 루시 앞에선 서툰 딸바보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도 방에만 있을 거니? 자선 행사는 꼭 참여했었잖아.”
제머나이 백작가가 그렇듯, 예소드 백작가도 신년을 맞으면 자선 활동을 위해 보더 타운을 찾는다.
그 취지가 선량한 만큼 만사에 게으른 디아나도 언제나 백작과 함께했었다.
그러나 올해는 앞선 알 수 없는 이유로 제 방에만 머물렀고, 백작은 마지막 설득을 위해 딸을 찾은 것이다.
긴 침묵 앞에서 작은 한숨을 쉰 백작이 말했다.
“그래, 쉬고 싶으면 쉬어야지. 엄마 다녀올게. 우리딸 어서 기운 차렸으면 좋겠네.”
그렇게 백작이 등을 돌리던 때.
딸각 소리와 함께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 건너에는 심하게 우울한 표정을 지은 디아나가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서 있었다.
“디아나….”
“엄마, 말할 게 있어요.”
2.
약 15분경과.
예소드 백작은 붉게 변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딸 디아나가 시우와 예소드 백작의 부끄러운 관계는 물론이오, 그녀가 집필하던 은밀한 취미활동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무리 사랑하는 딸이라도 아니, 오히려 사랑하는 딸이기에 그런 치부가 들춰진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쪽팔림을 루시에게 안겨주었다.
디아나를 애지중지 키워오며 성적인 지식에서 격리하던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도, 이 얼굴이 터질 것 같은 수치심 앞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일 정도로 말이다.
예소드 백작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때.디아나는 주추주춤 일어나 그녀의 어머니를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자신의 고민이 행여 어머니의 자존심을 짓밟지 않을까 고민했었다.
아무리 부모와 자식 관계라도 말하기 어려운 일은 존재하는 법이니.
그러나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굴어도 실은 신시우에 의해 깊은 상처를 입었을 엄마가 되려 방에 틀어박혀 우울해하는 디아나를 걱정해 준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으면 몰라도 안 그래도 마음고생이 심할 어머니가 자신 탓에 더 힘들어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이럴 바엔 다소 충격이 클지라도 솔직한 진실을 고하고 엄마를 위로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엄마는 하나도 잘못 없어요. 나쁜 건 신시우 그 발정 난 마녀 놈 하나뿐이니까요.”“지금까지 엄마 말 안 듣고 모른 척해서 죄송해요. 많이 힘드셨죠?”“저는 엄마가 어떤 사람이라도 사랑해요.”
결국 주홍색 토파즈처럼 빛나는 눈동자에 잔뜩 물기를 머금은 채 루시를 껴안는 디아나.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해묵었던 슬픔이 들이닥치며, 혹은 감동한 탓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감동은 있었다.
하지;예소드 백작은 그보다도 훨씬 치명적인 낯뜨거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디아나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몇 가지가 있다.
“우리 딸…. 고마워.”
“뭘요, 당연히이 정도는 해야죠.”
“그런데…. 사실과 조금 다른 문제가 있구나.”
“네…네?”
디아나는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상상했던 그림은 자신의 아픔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한 어머니를 다정한 딸이 위로해주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올린 어머니에 얼굴에는 고마움의 자취도 분명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큰 부끄러움의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우선…. 시우 씨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하기로 했어….”
“네에귀 아니! 네? 아니, 엄마는 자존심도 없어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발언이었다.
동시에 몹시 엄마에게 화가 나는 발언이었다.
신시우는 모처럼 디아나가 준비해뒀던 수확제 데이트 코스를 거절했다.
심지어 이미 연인이 있는 둥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주워섬기며 말이다.
그런 형편 없는 남자가 다시 어머니에게 관계를 제안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필경 그를 붙잡은 것은 어머니 이리라.
“아니…! 그 사람이 어떤 쓰레긴지 엄마도 알았을 것 아니에요! 근데 그걸 또 계속 만나기로 한다고요?”
“디아나…. 엄마는 애초에 그에게 연인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그도 숨기지 않았고.”
“엑...!”
애초에 불륜 관계였다고?
이것만큼은 디아나가 차마 짐작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무리 어머니가 관능 소설의 저자라고 해도 설마 연인이 있는 남자와 눈이 맞는 관능소설적인 행보를 따라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설마, 그 연인 중에 티페레트 공작님까지 포함되어 있을 줄은 몰랐지만….”
심지어 그 연인 ‘중’ 하나가 티페레트 공작이란다.
디아나는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을 품은 고해성사에 어찌 된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복잡다단한 눈빛으로 입을 뻐끔거리기나 할 뿐.
“그래도, 계속 만날 수 있다니 참 잘됐지 않니?”
가장 어이없는 것은 이 와중에도 어머니의 낯빛에 묘한 화색이 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가장 어처구니가 없어 디아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디아나를 대할 때 푼수기가 있다고는 느끼고 있었지만,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백치라고 불릴 수준일 줄은 몰랐다.
완전 기둥서방에 홀려 집문서까지 가져다 바치는 한심한 여편네 아닌가.
이제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할지, 이 자리에서 따끔하게 어머니를 훈계해야 할지를 고민하던 차.
디아나의 고민을 말끔하게 사라지게 한 발언이 들려왔다.
“시우 씨는 어쩌면 새로운 낙인 계승의 방법론을 제시해 줄지도 모른단다. 디아나랑 엄마랑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는 거지.”
“네…?”
그건 디아나가 아주 오래 품었던 해결되지 않을 고민에 대한 한줄기의 광명이었다.
3.
새해 날이 밝자마자 새벽부터 시작된 자선 행사.
하얀 반석이 깔린 광장에 줄줄이 늘어선 다양한 마녀 가문 소속의 짐마차엔 시민에게 나눠줄 따듯한 옷가지와 이불, 겨우내 식탁을 풍족히 채워 줄 보존식품이 담긴 바구니와 아이들의 장난감 따위가 가득 실려 있었다.
인형을 받기 위해 줄을 선 아이들도, 머릿수건을 동여매고 앞치마를 두른 아낙도, 장작을 한가득 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정들도 모두 활기차게 웃고 있다.
커다란 티 포트에서 나눠주는 홍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광장 한구석에는 가설 공연장이 설치되어 악단들이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다.
모처럼 좋은 일이기도 하겠다.
자선 행사에 참가한 시우.
방금까지 열심히 짐을 나루던 시우는 잠깐 담배를 피우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빠져 나왔다.
아멜리아는 향료 추출을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고, 제머나이 백작들은 집집을 돌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손수 음식 바구니를 옮겨주고 있다.쌍둥이는 곧이어 있을 공연의 리허설을 위해 마차 안에서 열심히 목을 풀고 있었고 말이다.
요새는 항상 누군가와 붙어다녔기에 이렇게 혼자인 시간이 오랜만으로 느껴진다.
그 덕에 느긋한 마음으로 골목길 담벼락에 등을 기대 담배를 물고 시끌벅적한 활기를 엿볼 수 있었다.
사실 대부분이 사노예나 밀수꾼인 보더 타운과는 다르게 타로 타운의 시민은 꽤 높은 생활 수준을 보장받는다.굶어 죽는 이도 없고, 길거리에 나앉아 구걸하는 걸인도, 병들어 죽는 이도 없다.
마녀가 있는 한 크고 작은 범죄에 두려움에 떨 일도 없다.
노예 시절 시우는 그 시민들에게 연민의 눈초리를 던졌다.
마녀에게 봉사한다는 이유로 자유를 박탈당하고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 게헨나에만 갇혀 지내야 하는 운명에서 동질감을 느낀 까닭이다.
하지만 한 점의 고민도 떠오르지 않은 면면들을 보면 그런 걱정들이 공연한 것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들은 나름의 위치에서 저들만의 소박한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비록 과학기술은 현세보다 훨씬 뒤처져 이런저런 문명의 이기를 만끽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번화한 도시 한복판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보다 저들의 표정이 밝아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때 옆에서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아마 자선 행사를 위해서 일 것이다.
단정하지만 활동이 편해 보이는 옷차림.
어깨를 가리는 케이프를 두르고 부츠를 신고 있는 한 견습마녀가 보인다.
색이 희미한 은발과 주홍색 아름다운 눈동자를 지닌, 한때 시우와는 여러모로 복잡한 인연이 있는 디아나 예소드였다.
억!”
수확제 전날 디아나의 만천화우에 당한 이후 그녀를 만난 적이 없다.
따라서 그날 그녀가 보였던 폭주는 아직도 뇌리에 깊숙이 배어있었다.
하지만 곧장 매서운 매도와 함께 날카로운 고함이 날아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디아나는 부츠 끝으로 언 땅을 톡톡 치며 우물쭈물거리고 있었다.
“오, 오랜만에 뵙네요.”
“그렇…네요?”
“몸은 괜찮아요? 그… 최근에 부상….”
“아, 네. 이제 쌩쌩합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어색한 안부를 주고받던 중.
디아나는 별안간 고개를 푹 숙였다.
일전 갑자기 화냈을 때처럼 빠른 태세전환과 사과였다.
“제멋대로 오해해서 미안해요…!”
지금까지 디아나는 짐승과 다름없는 시우의 만행에 그를 저주했다.
그래서 타로 타운에서 벌어진 소동에 그가 휘말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리 디아나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한들, 어머니를 가지고 놀다가 버린 그의 만행은 용서할 수 없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어머니와의 대화로 그 실상과 오해를 낱낱이 알게 되었다.
애초에 양자가 가벼운 관계였다는 점.
더군다나 연인이 있는 시우에게 먼저 추파를 던진 것이 어머니라는 점.
디아나가 계승의 지연이라는 것에 정신이 팔려 멋대로 시우에게 과도한 기대를 졌다는 뒤늦은 자각.
마지막으로 비록 방법은 알 수 없지만, 디아나의 오랜 고민거리를 해결할 열쇠가 그에게 쥐여있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디아나의 횡포는 그로서 불벼락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디아나라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의 심사가 뒤틀린다면 새로운 방법이고 뭐고 사라질 수도 있는 노릇이니.
“저.... 모든진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
“어머니와 시우 씨의 관계와 계승에 관한 것도요.”
“어….”
그 한 마디에 시우는 떠올렸다.
사라져버린 마력 복사.
예소드 백작은 시우와 질내사정할 때 발생하는 낙인의 복사 작용을 활용해 선대가 죽지 않는 계승을 연구하려 했다.
그러나 어제 아멜리아와 섹스에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 문제로 예소드 백작과 대화를 나누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혹시, 지금어머니어디 계시나요?”
“네?”
“중요한 문제인데…. 잠깐 백작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시우는 디아나의 사과를 받아주고는 예소드 백작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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