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
1.
아멜리아는 침울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샤론과의 일기토에서 패배 후 아멜리아는 되려 샘솟는 투지를 느끼게 되었다.
시우의 입에서 ‘큰 가슴이 최고죠’라는(아멜리아에겐 그렇게 들렸다) 말을 들었을 때 투지는 어느새 객기가 되어 있었고, 평상시 아멜리아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대담한 일을 하게 했다.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은 으슥한 복도로 그를 끌고 가 그의 앞에 무릎 꿇은 것이다.
그리고 샤론이 말했던 그 행위를 해보려고 했다.
여성의 중요한 상징으로 남성기를 문질러주는 행위 말이다.
아멜리아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던 시우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동조해주었다.
누가 올지도 모르는 바깥에서 ‘봉사’하는 행위는 상상 이상으로 아찔하고 배덕적인 감각이었다.
시우도 크게 좋아하는 듯했다.
그의 물건이 굉장히 열심히 움찔거렸으니까.
그러나 정작 아멜리아의 가슴은 시우의 양물을 채 품을 수 없었다.
아멜리아가 낑낑 가슴을 모아서 문지르려고 해도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물론 아멜리아의 가슴이 납작한 편은 아니다.
지극히 마녀 평균이며 한 손에 쏙 담길 정도로 도담한 크기와 훌륭한 물방울 모양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상적인 파이즈리가 가능하게 하려면 최소한 엘로아 정도의 가슴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더욱이 남자가 선 채로 받으려면 더 큰 가슴을 요구한다.
눈물겨운 투쟁에도 그의 물건은 번번이 가슴골에서 벗어나 아멜리아의 턱을 때리기나 할 뿐이었다.
거기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아멜리아는 제대로 사정도 유도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후퇴해 버렸다.
시우에게 제대로 인사도 전하지 못했다.
샤론과의 논쟁에서 참패.
모처럼 위기와 민망함도 무릅쓴 분전이 좌절.
시우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자책감.
이 삼연타는 아멜리아의 멘탈에 지대한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마음의 타격을 입었다고 해서 해야할 일을 미룰 순 없다.
아직 시우의 또 다른 연인 쌍둥이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지나다니는 메이드에게 물었을 때는 분명 샤론과 함께 수업 중이라고 들었는데, 은근히 길치인 아멜리아가 길을 헤매는 바람에 시간을 맞추지 못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멜리아는 분명 기억하고 있다.
아직 시우와 소원했던 시절, 그러니까 그가 모든 마녀를 미워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시절이다.
그때도 쌍둥이는 시우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마차에서 벌거벗은 쌍둥이와 시우를 엿보았을 땐 세 사람의 관계를 반쯤 확신하게 됐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연인 관계까지 발전하다니.
솔직히 시우의 입으로 듣고도 잘 믿기지 않았다.
견습마녀의 근처에 남자가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시우가 두 번에 걸쳐 쌍둥이의 목숨을 구했다지만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까지 허용하다니.
심지어 그 사실을 제머나이 백작이 알고 있단다.
그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튼 자세한 사항은 대화를 나누며 확인하면 될 노릇, 부탁할 것 또한 있고 샤론에게 했듯 사과할 것도 있으니 만나야 한다.
한때 아멜리아 밑에서 배움을 받던 쌍둥이가 이제는 연적이라니.
얄궂은 감상에 젖어있던 아멜리아는 어렵지 않게 쌍둥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언제나 사이좋은 둘은 마법으로 바구니를 동동 띄운 채 시녀들과 함께 복도를 걷고 있었다.
2.
쌍둥이가 인형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챙긴 이유는 직접 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둘이 인형극을 하고 놀던 세월은 꽤 옛날이다.
제머나이 백작은 여전히 쌍둥이를 꼬맹이 취급하지만 어른의 불장난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어엿한 여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쌍둥이가 왜 수백 개나 되는 인형을 나르고 있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제머나이 백작가는 매년 새해가 밝으면 시민을 위해 소소한 자선 활동을 행한다.
귀한 음식이 잔뜩 담긴 바구니를 나눠주고 환자가 있는 집을 들러 위생 관리를 돕거나 치료를 해준다.
아이들에게는 이것저것 다양한 장난감을 제공하고 꽃을 안겨주고, 노상 극장을 개설해 작은 공연도 한다.
게헨나의 시민은 모두 마녀를 위해 봉사하는 성실한 종복들.
그들을 향한 박애와 자선의 정신이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념에 합치하는 것이다.
아무튼 내일 아이들에게 나눠줄 인형을 챙긴 오딜과 오데트는 고즈넉한 복도를 시녀들과의 수다로 가득 채우며 위풍당당 걸었다.
“페챠, 올해는 인형이 유독 많네.”
“작년에는 귀여운 오딜 님의 피앙세 분이 투병 중이셨잖아요. 그래서 자선행사를 못했던만큼 신년엔 두 배로 준비했어요.”
“흐음~ 기특한 발언이야. 페챠, 아부가 아주 능숙해졌는걸?”
“아부라뇨, 오딜 님이 신시우 씨의 정실부인이 되는 건 명약관화, 불문가지, 불언가상인걸요.”
“흐음~ 레나, 네 생각도 그렇다는 거지?”
“그럼요 그럼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씰룩거린 오딜의 옆얼굴에 키득키득 웃는 레나와 페챠.
고된 업무 속 오딜과 함께 수다를 떠는 것이 전속 시녀 페챠와 레나의 낙이었다.
오데트를 둘러싼 마샤와 베라도 마찬가지다.
“마샤, 베라. 올해도 선물을 준비해뒀어요. 기대해도 좋아요.”
“어쩜! 행복해요!”
“이번에도요? 무슨 선물인데요?”
“네? 그건 비밀인데….”
“상냥하고 다정한 오데트 님, 어차피 나중에 볼 건데 미리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음, 그렇다면 뭐…. 마샤는 예쁜 브로치를 준비했고요, 베라는 은제 티 세트요.”
“서, 설마…. 그 필릭스 공예공방의 브로치요?”
“네.”
“꺄아아아! 오데트 님! 저 그거 사려고 월급 모으다 포기했었는데!”
“전에 같이 산책할 때 빤히 보길래….”
“사랑해요 오데트 님!”
“베라는, 베라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메이드 일 거에요. 오데트 님을 모실 수 있어서 너무 기뻐요! 가족들에게 꼭 맛있는 홍차 내려줄 거에요!”
“수, 숨이 막혀요….”
좌우에서 오데트를 꼭느 껴안고 졸라대는 바람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 오데트.
흥분한 카나리아처럼 파닥파닥 어수선하게 굴던 시녀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눈에봐도 지체 높은 손님으로 보이는 금발의 마녀와 마주했기 때문이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시녀들, 그리고 그녀들보다 훨씬 깜짝 놀라는 오딜, 오데트.
예기치 못한 만남이었다.
안 그래도 비대위(단 둘뿐이지만)를 조성해 대책을 마련 중이었는데 도리어 부교수님 쪽에서 다가오다니….
오달과 오데트는 손을 꽉 맞잡았다
아무리 두려운 이;^단수히 맞잡은 자매애 가득한 손은 용기를 불어넣는다.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아멜리아 부교수님.”
“오랜만에 뵈어요, 아멜리아 부교수님.”
천방지축 말괄량이 쌍둥이지만 귀족의 예법엔 통달해 있다.
두 사람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림 같은 인사를 선보였다.
“잠깐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페랴, 레나, 마샤, 베라.”
“인형을 마저 옮겨주세요. 곧 갈게요.”
“네, 오달 님. 오데트 님.”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시녀들이 낑낑거리며 바구니를 옮기고 세 사람은 근처의 응접실로 향했다.
3.
고색창연한 운치가 느껴지는 응접실.
저택의 무수한 방 중에서도 꽤 구석진 곳에 있기에 오랜 기간 손님을 받은 적이 없는 방이다.그럼에도 저택 내 항시 가동되는 방진, 온습도유지, 보존 마법 덕택에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차양 커튼으로 인해 어둑한 방, 촛대 위의 촛불만이 덧없이 일렁이는 긴장감 속에 쌍둥이는 손가락을 비비 꼬았다.
사실 쌍둥이는 아멜리아가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3년 동안 그녀 밑에서 원소마법에 대해 배워왔지만, 딱히 친분이랄 것이 없다.
그녀는 정해진 분량의 수업, 정해진 분량의 과제만을 던져주고 휑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더군다나 과거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모를 에로스의 묘약을 아멜리아에게 먹였고, 그 결과 시우와 관계에 모종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마음의 빚이 있다.
상대하기 껄끄럽다는 것이 가장 적당한 표현이리라.
그러나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현재의 일은 현재의 일이다.
지금 아멜리아는 조수님을 뺏어가려는 강적.
아무리 호랑이 같은 아멜리아 부교수님이라도 순순히 내어줄 쌍둥이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일전 아멜리아는 쌍둥이에게서 귀염등이 버전 조수님을 뺏어가지 않았던가?마음의 빚은 그것으로 청산된 것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향으로 추측이 흐르는 것은 쌍둥이가 아멜리아의 옛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봐 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갑고, 냉정했으며 철혈의 교수였다.
인간 대 인간으로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런 모습을 내비치던 그녀가 허당인 샤론 언니나 자애로운 티페레트 공작님처럼 일부다처를 용인하리라는 생각은 쉽사리 들지 않았다.
오딜과 오데트는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투지를 되잡았다.
“그간 강녕하셨나요?”
“현세에 나가셨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네, 두 사람도 잘 지냈나요?”
상투적으로 주고받는 인사말.
0| 시구에서 쌍둥이의 목소리는 재잘거리는 새처럼 쾌활하게 변해 있었다.
주눅 든 기색이 보일 필요는 없다는 은근한 어필임과 동시에 말투 자체로 전의를 다잡기 위한 의식이었다.
“네/잘지냈어요. 조수님이랑요.”
“맞아요, 잘 지냈어요. 같이 이것저것같이 하기도 하면서요.”
소심하게 조수님과의 관계를 어필해 보이던 쌍둥이는 그 즉시 아멜리아의 미간이 살짝 좁아지는 것을 보았다.솜털이 삐쭉 설정도로 오싹했지만 참는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끝없이 밀릴 뿐이다.
“알고 있어요. 두 사람 모두 시우의 연인이라죠?”
할 말이 많은지 복잡한 기색을 내비치던 아멜리아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멜리아의 표정과 말을 듣는 순간 쌍둥이는 확신을 품었다.
느닷없이 아멜리아가 쌍둥이를 찾은 이유는 조수님의 독점을 선언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따라서 강경하게 빼액 소리를 지르며 대응한다.
“네! 서로 없으면 죽어버리는 사이에요 만약 저희가 없으면 조수님은 시름시름 앓다가 상사병에 죽을 테니까요!”
“맞아요! 매일매일 달콤한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있어요!”
물론, 아멜리아가 쌍둥이를 찾아온 것은 독점 선언이나 시우를 빼앗기 위함이 아니다.
샤론과 마찬가지로 쌍둥이가 시우의 연인이며 그의 곁에서 함께 해주었다면 굴러 온 돌로서 마땅히 사과와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쌍둥이가 보이는 태도는 아무리 봐도 배척.
아멜리아를 시우의 연인으로 절대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단절.
귀엽고 발랄했던 오딜과 오데트의 억척스러운 반응은 패배와 좌절로 마음이 약해져 있던 아멜리아에겐 몹시 쓰라리게 다가왔다.
씨익씨익거리며 입술을 굳게 다문 쌍둥이.
침묵 사이로 흐르는 적의를 마주한 아멜리아는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되잡았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시우와 함께하려고 다짐했다.고작 이 정도의 마찰에 포기할 수는 없다.어떻게든 사과하고 관계를 인정받는다.
“미안해요.”
그건 솔직한 사과에서부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