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1.
샤론과아멜리아.
두 사람은 더 이상 홍차를 홀짝이지 않았다.
옆에서 보면 실로 유치한 싸움이지만 두 사람은 진지하다.
각자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해야 상대의 콧대를 확실히 눌러줄 수 있는가, 만이 중대 과제였다.
강력한 연적 샤론 에버그린.
그녀는 아름다웠다.
건강함이 넘쳐 흐르는 짙은 녹발, 그리고 민트빛으로 빛나는 독특한 눈동자,주인 외에는 손길을 용납지 않는 품종묘처럼 도도해 보이는 이목구비,아멜리아와 비교할 수 없는 굴곡진 몸매는 쉽사리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여태 살아오며 본인의 성적 매력에 관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멜리아는 샤론의 도발로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저 가슴은 비대칭 전력이다.
그래도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다.
게다가 단순히 피지컬 차이라는 선천적인 요인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기에는 묘하게 자존심이 상한다.
“샤론 양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어요.”
“어머,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실까요?”
“너무 커다랗기만 해서 좋은 건 아니라는 거죠. 겉으로 드러나는 천박함보다는 정숙한 옷맵시와 라인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죠.
조금만 널널한 옷을 입어도 굼떠 보여서야…. 없느니 못하지 않을까요?”
아멜리아는 소피아의 경우를 떠올리며 조곤조곤한 말씨로 말했다.
소피아 역시 종종 예쁜 드레스를 찾기가 너무 힘들다던가, 조금만 펑퍼짐한 옷을 입어도 살이 쪄 보인다던 가하는 이유를 들어 불평하곤 했던 것이다.
정작 당시엔 ‘이걸 나한테 왜 말하죠?’라고 여기며 성가시기만 했던 투정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다니….
“아하, 확실히 옷을 고를 때 신경이 많이 쓰이긴 해요.”
그러나 ‘무슨 말 하나 보자’라는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보던 샤론은 데미지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상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죠?”
“근데 시우가 제일 좋아하는 옷은 몹시 부끄럽지만…. 알몸이어서요. 별로 신경 써 본 적은 없네요. 걱정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샤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아멜리아의 공격을 흘려내었다.심지어 크로스 카운터까지 날리면서.
“더군다나 시우가 많이 칭찬해줬거든요.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이든 신경 안 써요.”
아멜리아는 정말로 코끝이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벙찐 표정을 지으며 샤론을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밀리기만 할 뿐이다.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스스로의 체면을 깎아내린다고 해도 말이다.
“맞는 말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사랑받는다면 그보다 덧없는 일이 없죠.”
“그렇죠, 그렇죠.”
“정말 중요한 건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얼마나 헌신할 수 있는가가 아닐까요?”
“옳으신 말씀이에요.”
아멜리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저는…. 시우에게 노예라도 되겠다고 말했어요. 바, 밤시중도…. 같은 맥락이었죠.”
침대 위에서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것은 부끄러운 고백이다.
하지만 시우를 위해 자존심도 체면도 내려놓고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명이기도 했다.
“제 몸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다 하라고도…. 말했어요….”
벌겋게 달아오른 채 샤론을 똑바로 바라보며 회심의 일격을 선언하는 아멜리아.
하지만 그 발언 끝에 정작 당황한 것은 샤론이 아닌 아멜리아였다.
샤론은 한 점의 동요도 없이 너무도 태연하게 싱긋 웃었던 것이다.
“그 부분에서는 서로 마음이 맞네요. 저도 시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거든요.
어쩔 땐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기도 하고, 어쩔 땐 누나처럼 보듬어주기도 하고, 어떨 때는 정말 차마 말 못할 낯부끄러운 일까지.
참 저도 주책없네요. 적당히 거절할 줄도 알아야 시우 버릇이 안 나빠질 텐데….”
z…!
아무리 아멜리아가 발돋움했다 한들 샤론은 이미 시우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쌓아온 경험과 플레이의 다양함이 다른 것이다.
샤론은 아연한 표정을 짓는 아멜리아에게 자비 없는 추가타를 이어나갔다.
“어느 날에는 골목에서 눈이 맞는 바람에 밤이슬을 맞으며 애달프게 울었던 적도 있답니다.”
“고… 골목…?”
“아, 생각해보니 시우가 은근히 밖에서 사랑을 나누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일전엔 가게의 탈의실에서도….”
“타, 타, 탈의실에서…?”
“네, 그때는 정말 숨죽이느라 혼났다니까요?”
그제야 아멜리아는 소피아와 주고받았던 문답이 생각났다.
‘침대에서 하는거겠죠?’
‘보통은 그렇지?’
‘보통이 아니면요?’
‘눈이 닿지 않으면 어디서든 하지.’
그때까지만 해도 아멜리아는 소피아의 ‘어디서든’이 실내 공간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욕실, 이를테면 소파, 이를테면 부엌 같은 곳 말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어디서든.
설령 탈의실에서마저도 사랑을 나누는 것이 남녀의 뜨거움인 것이다.
기존의 좁은 틀에서 많이 탈피했다곤 하나 여전히 고지식한 아멜리아는 그런 샤론의 행태를 비난했다.
“..너무 파렴치하네요. 들개나 길고양이도 아니고….”
“아멜리아 님은 거기까지는 시우에게 허락해주지 못하겠다는 거네요?”“그렇다면 거기까지인 거겠죠.”
슬쩍 흘리는 샤론의 눈웃음에 울컥한 아멜리아.
뭐가 거기까지라는 건지.
아멜리아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만 있으면, 그리고 시우가 그걸 진정으로 원하면 응할 것이다.
“저도할수 있어요.”
“방금까지 들개나 길고양이의 파렴치한 행위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 그래도 시우가 원하면 할 거에요.”
“말로는 달이라도 딸수 있죠.”
“정말이에요.”
“그렇다 해도 지금은 제가 조금 더 앞선 모양인데요?”
두 사람은 이후로도 약 10분간 쉴 새 없는 혈전을 이어나갔다.
겉보기엔 점잖아도 실제로는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듯한 난전 끝에 아멜리아는 느꼈다.
처음부터 빈약했던 손 패가 모두 떨어졌다.
먼저 조급함을 드러낸 것은 아멜리아였고 샤론은 모든 공격에 유연하게 대처했다.시종일관 표정 관리에 안간힘을 쓰던 아멜리아와는 다르게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저것이 가면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 하실 말씀이라도?”
...즐거운대화였어요. 샤론 양.”
저 역시요, 아멜리아 님. 저녁에 또 뵙겠네요.”
그래요.”
어차피 만찬에서 다시 만날 예정이고, 무엇보다 더는 감당할 수 없어진 아멜리아가 도망치듯 일어났기에 대화가 끝났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 아멜리아의 얼굴을 흡사 아이가 울음을 참듯 입을 삐죽하게 모으고 있었다.
스코어를 헤아릴 필요도 없는 불계패.
아멜리아는 단 한 번도 샤론을 이기지 못했다.
분함과 서러움이 마음에 줄기줄기 뻗는다.
조금만 방심하면 왈칵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울먹울먹 상태였기에 아멜리아는 이를 꽉 물고 울음을 참았다.이래놓고 어린애처럼 울기까지 하면 그런 꼴사나운 추태가 없다.
비록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을지언정 시우의 연인 중 하나인 샤론 에버그린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보였다.
샤론은 아무렇지 않아보이는 듯했지만 내심 아멜리아처럼 고심했으리라.
아무튼간에 그런 강적에게 도망치기 바쁜 것이 아니라 똑바로 마주 서 싸운 것이다.
아멜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도, 멋진 투쟁이었어요….”
오늘의 패배를 양분 삼아 다음에는 더 멋진 싸움을 하기로 다짐하며.
다음 만날 사람을 찾아 나섰다.
한편 강의실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샤론은 아멜리아가 이미 멀리 떠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과나 위로라도 하려고 했는데.
“아…. 내가 너무 심했나?”
소소한 국지전에서 승전고를 울리기도 전.
샤론은 자신이 어느 정도 과잉대응을 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말괄량이 쌍둥이조차 샤론과 박터지게 싸우는데 하물며 오랜 세월의 경험과 아름다움을 보유한 아멜리아라면 어떻겠는가?
그녀의 첫인상이 너무 인상 깊었던 나머지 머릿속 그녀의 전투력을 드래곤 쯤으로 상정하고 전력으로 임한 것이다.틀림없이 날이 선 독설과 쌀쌀맞은 매도가 올 것이고 거기에 샤론이 안간힘을 써서 저항하는 구도를 그리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여리시네….”
아멜리아는 사소한 말 하나하나에도 무척 신경 썼으며 무엇보다 말을 잘 못했다.
다른 사람 속 긁는 법을 모른다고 해야 하나.
막상 교전이 끝나고 기억나는 것은 전투력이 토끼쯤 되는 아멜리아를 신나게 걷어차던 자신의 사악한 모습뿐이었다.
항상 쌍둥이와 티격태격하다가 애처럼 돼버린 걸까?
솔직히 중간쯤부터는 양민학살의 맛이 꽤 즐거워서 주체를 못했다는 것까지는 부정하지 못하겠다.
“이따사과해야겠다.”
샤론은 씁쓸한 승리를 거머쥔 채 한숨을 쉬었다.
3.
“이게 뭔일이래….”
잠깐 용무가 있다며 먼저 떠난 아멜리아.
그녀를 보내고 저택을 서성이며 쌍둥이라도 만나볼까 하던 시우는 데네브를 만나 걷어차인 정강이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인사를 건넨 데네브가 대뜸 구두코로 발길질을 날리고 떠나간 것이다.
시우 정도로 단련된 영체가 그 정도 타격에 영향을 받을 리 없다.
따라서 아프다 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역시 그때 일인가….”
대충 넘겨짚고 있자니 저 멀리서 방금 헤어졌던 아멜리아가 보인다.
“아멜리아 님.”
“시우…!”
살짝 울상인데다가 코끝이 벌게진 아멜리아는 시우를 보자마자 도도도 달려왔다.어째 꼭 골목에서 삥 뜯기고 온 딸내미가 아빠를 발견한 표정이었다.
시우는 깜짝 놀라 그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멜리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시우의 품에 폭 안겼다.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그새 보고 싶어진 걸까?
흐뭇한 착각 속에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우.
그때 아멜리아가 갑자기 물었다.
“시우, 갑작스럽겠지만….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네, 뭔데요?”
“시우는 그…. 여자 가슴을 좋아하나요?”
“네?”
정말 갑작스러운 질문이긴 하다.
하지만 오늘 새벽 막 정을 통한 아멜리아가 그런 것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살짝 머쓱해하면서도 순순히 답해 주었다.
“좋아합니다.”
그에 대한 아멜리아의 반응은 경악이었다.
표정 변화는 미미했지만 시우는 쉽게 그녀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근데 이게 이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어, 얼마나요?”
“그냥 좋은 거죠. 싫어하는 남자가 있긴 할까요?”
시우는 단순히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느냐에 대한 답을 해준 것뿐이다.
그러나 샤론과의 담론을 거쳐 유달리 가슴을 의식하고 있는 아멜리아에게는 실로 청천벽력 같은 발언이었다.
어찌 됐건 시우가 좋아하는 부분에서 크게 뒤처지는 부분이 생겼음을 의미하니.
“시, 시우….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네, 근데 왜 갑자기이런질문을
“밖에서 야한 짓 하는 거…. 좋아하나요?”
“네…?”
누가 아멜리아에게 이런 바람을 불어넣은 것인지.
또 소피아의 소행인지 헷갈려하던 무렵.
아멜리아가 결연하게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잠깐만 시간 내주세요.”그녀는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는 시우의 손목을 잡아끌고 복도의 구석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