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
1.
강의실에서 곧장 숙소로 돌아온 샤론은 차를 준비하며 뜻밖의 손님을 힐끗힐끗 살펴보았다.이렇게 가까이서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꽤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도 풍겨오는 좋은 향기.
피부가 첫눈보다 하얗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 같다.
결이 좋은 가느다란 금발.
그저 앉아만 있어도 느껴지는 고귀한 분위기는 신화 속의 요정을 연상케 한다.
모든 마녀는 아름답다.
타로 타운의 이름 없는 마녀조차 외관만으로 어지간한 남성을 포로로 사로잡을 수 있다.
이렇듯, 저마다 다른 느낌으로 미색을 뽐내는 마녀 사이에서 살아가다 보면 외모를 평가하는 눈이 굉장히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높아진 눈으로 냉정하게 평가해도 아멜리아는 예쁘다.
진짜 더럽게 예뻤다.
그렇게 힐끗거리던 시선이 무심코 아멜리아의 보석 같은 눈동자와 맞닿자 샤론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기가 팍팍 죽으면서 주눅이 들었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불쑥 맞닥뜨린 연적.
어떤 사람인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여기에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 일말의 동요도 없이 샤론을 덥썩 찾아온 것이 강한 자신감에서 기인한 행동이라는 막연한 추측만이 머리에 떠돌 뿐이었다.
“변변찮은 홍차인 점 양해 부탁드려요.
“아니에요, 불쑥 찾아온 건 저인걸요.”
목소리도 예쁘네.
그래도 가슴은 이쪽의 승리다.
뭔가 서글픈 자기 위안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갈무리한 샤론은 그녀와 마주 앉았다.
“어떤 일로 찾아오셨나요?”
시우와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짐짓 의도를 묻는 샤론.
케케묵은 게헨나의 예법대로 눈을 직접 마주하지 않고 눈을 조용히 내리고 있던 아멜리아는 드디어 시선을 들었다.
“시우…씨의 연인이라고 들었어요. 샤론 에버그린 양.”
즉각 본론.
구론》S골에 흐르는 전운을 느꼈다.
마력과 피가 난무하는 싸움터만이 전쟁이 아니다.
찻잔을 경계로 주고받는 사랑싸움 역시 전쟁의 일환인 것을 쌍둥이는 알려주었다.
“그래요.”샤론은 의연하고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도 일단 겉모습만큼은 기 쎈 언니처럼 생긴 샤론이다.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미안해요.”
‘올 테면 와라! 나는 준비됐다!’를 속으로 백번도 되새김질하며 투지를 돋구던 샤론에겐 되려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아멜리아가 무릎에 손을 얹은 채 정중하게 샤론에게 머리를 조아렸으니 말이다.
“제 부족함으로 시우를 위험에 처하게 하였어요. 절 비난하셔도 변명의 여지조차 없어요.”
사실 샤론은 아멜리아를 썩 좋게 보지 않았다.
그녀가 새로이 등장한 라이벌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어찌 됐건 과거 시우를 괴롭혔던 사람이며 최근에도 그를 위기에 처하게 했다.
전자의 경우 당사자 간 협의가 원만하게 된 이상 샤론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마저 상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뭉근한 적개심이 남아있었고 아멜리아가 혼수상태였던 시우를 회복시키기 위해 고된 시련을 거쳤다는 것이 유일한 참작 사유였다.
“굳이 나서서 할 말은 없네요. 조금 화가 나긴 해도 어찌됐건 시우도 무사하잖아요. 아, 무사는 아니네요.”
약간의 빈정거림이 섞어 차가운 어조로 뱉는 순간 움찔 아멜리아의 어깨가 떨렸다.
너무 막말했나? 싶어 덩달아 움찔한 샤론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는다.
어떤 구실을 붙여도 시우의 왼손이 뜯겨나가게 된 것은 아멜리아의 잘못이다.
심지어 영체의 근간부터 손상된 왼손은 회복도 불가능해져 의수를 달아야 했다.
그것조차도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운이 나빴어도 시우는 아멜리아의 손에 의해 혹은 에렐림 공작의 손에 의해 죽게 되었을 것이다.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래도 화가 난 것과는 별개로 남에게 쓴소리 하는 건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눈을 질끈 감고 홍차를 마시는 샤론.
“미안해요.”
아멜리아에게서 돌아온 답은 처음과 같은 사과의 말이었다.
다만 힘없이 울음기가 가득한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가 차가운 얼음 동상 같은 아멜리아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어요….”“아, 그, 그게 아니라….”
샤론은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커다란 잘못을 한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아멜리아를 보고 크게 당황했다.
혹시 이것도 하나의 교활한 연기가 아닐까?
오히려 당연한 반응을 한 이쪽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쥐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샤론은 자신의 바보 같음을 인정했다.
이건 그냥 미워하고 싶은 이유를 찾는 것뿐이다.
아멜리아가 고깝게 보이지 않기에 적당한 이유를 주워섬겨 그녀를 계속 마음 편히 미워할 수 있는 상대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샤론이 자조하는 사이.
금방이라도 아멜리아의 결연한 목소리가 울음기의 틈새로 떠올랐다.
“그렇기에…. 그와 떨어지고 싶진 않아요. 앞으로 평생을 바쳐서라도 갚아나갈 거에요. 저에겐 의무가 있어요.”“하지만 부채감 때문이 아니에요. 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요.”
아멜리아는 말하고 있었다.
후회하고 있고, 잘못을 반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시우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너무도 사랑하고 있다.
언뜻 유약해 보이면서도 결코 심지가 휘청이지 않는 올곧은 의지가 샤론에게 전달된다.
그렇게 되자 갑자기 모든 상황이 풀린 것처럼 가벼워 보였다.
샤론처럼, 엘로아처럼, 쌍둥이처럼.
아멜리아도 똑같지 않은가?
“그러니까….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잠깐 마음을 추스르듯 심호흡한 아멜리아는 중대한 사실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샤론을 향한 선언이기도 했다.
이만큼 깊은 관계라는,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선언.
“에버그린 양, 저는 시우와 동침했어요.”
“그건 저도요.”
사실 아멜리아가 시우와 잤을 것이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볼 때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시우가 그런다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갑자기 마구마구 질투심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자니 지는 것 같은 승부욕에 한마디를 덧붙였을 뿐.
아니다.
사실 질투 느끼는 거 맞다.
샤론은 속으로 정정하며 솔직하게 아멜리아에게 말을 전했다.
“아, 죄송해요. 뭔가 발끈해서…. 근데 제가 더 먼저 했어요.”
샤론이 뒤늦게 사과를 덧붙였지만 이미 아멜리아의 눈은 동그래져 있었다.
아멜리아가 이 자리에 온 이유.
그것은 그의 연인 중 하나인 샤론과 제대로 된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사회적인 통념 및 도리상 아멜리아가 한 행동은 분명 남의 연인을 가로챈 행위이다.
시우가 이미 일부다처에 가까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해도 분명 그렇다.
물론 그를 독점하거나 빼앗을 생각은 없다.
기존 연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 같이 사이좋게 만나는 것이야말로 아멜리아의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샤론의 입에서 튀어나온 ‘제가 섹스 더 먼저 했는데요?’ 발언.
그건 이곳에 온 목적도 잊고 아멜리아의 마음에 불쑥 오기를 솟게 만들어 주었다.
애초에 꽤 유치한 성격의 아멜리아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고 해도 아멜리아에게 없는 커다란 매력을 보유한 샤론의 도발적인 선언은 일종의 선전포고로 느껴진 것이다.
소리 없이 마주치는 두 사람의 눈동자.
기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샤론에게는 익숙하나, 아멜리아에겐 낯선 꽃들의 전쟁터에 부는 알싸한 바람.
허나 여기엔 룰이 있다.
적수의 상처를 지나치게 헤집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아름다움만을 뽐내는 것.
그 이상 가봐야 난잡한 개싸움만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그건 시우도 바라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규칙을 준수하며 선수를 내민 것은 샤론이었다.
“정말 뜨거운 밤들이었죠…. 돌이켜 보니 밤낮을 가린 적도 없는 것 같네요.”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듯 흐리멍덩해진 샤론의 눈.
“어떻게 매번 그리 뜨겁게 안아주는지.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니까요?”
다시 초점을 찾은 눈이 이제 당신의 차례라는 듯 명확하게 아멜리아를 향했다.
살짝 얼떨떨해하던 아멜리아도 그 의도를 완벽하게 간파한 것 같았다.이번엔 투지를 담은 눈동자가 샤론을 바라봤다.
“저도 뜨겁게 안겼어요. 샤론 양에게 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웠을 거에요.”
“아닐걸요?”
아멜리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항변했다.
“아니지 않아요…!”
“아멜리아 님은 뭘 하셨길래 그렇게 자신만만하세요?”
어느새 서로를 향해 이름을 므t 부르기 시작한 두 사람.
사실 남녀관계를 침대 밖에서 발설하는 것은 정숙한 아멜리아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눈앞의 이 샤론도 시우의 사랑을 받는 연적.아멜리아는 이런 중요한 일에 지고 싶지 않았다.
“야한 잠옷을 입고 밤시중을 들었어요.”
“어머…. 근데 그건 저도 했는데….”
“입으로도 해줬어요…! 시우가 정말 기뻐했어요!”
“그것도 해봤어요. 저는 심지어 가슴으로도 해줬는데…. 아하, 아멜리아 님은 조~오끔 힘드시겠다.”막상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자 샤론은 굉장한 여유를 느꼈다.
원래는 쌍둥이와 옥신각신의 혈전을 펼치는 샤론이었지만 아멜리아는 어쩐지 상대하기 쉽다.
PVP에 미t 입문한 뉴비를 상대하는 느낌이랄까….
애초에 ‘동침’이 논쟁의 주제라면 샤론 쪽이 아멜리아보다 경험도, 내세울 지식도 탁월한 것이다.
“가슴으로…?”
다시 휘둥그레지는 아멜리아의 눈.
그런데 가슴으로 해줬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일까?
해석에 난조를 보이는 아멜리아를 위해 샤론은 친히 양 가슴을 가운데로 모으는 시늉을 하며 점잔을 뺐다.
“아하, 순진한 아멜리아 님에게는 조금 진도가 일렀네요. 이렇게 끼워서…. 어쩜 저도 모르게 경박스러운 말을….”
“그런… 행위가…. 가능할 리가….”
그제야 샤론의 미드라인에 눈이 가는 아멜리아.
소피아보다는 작지만, 아멜리아보다 훨씬 크다.
저 크기라면 시우의 굵은 물건을 충분히 감싸고도 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아멜리아에겐 평생이 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아멜리아도 지극히 평균적인 가슴 크기를 지닌 만큼 힘을 끌어모으면 가능하겠지.
그러나 금수저의 플렉스와 중산층의 영끌 대출 플렉스는 그 격이 다른 법이다.
순식간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된 아멜리아가 조심스레 묻는다.
“시우가…. 그, 그… 그곳을 많이 좋아하나요?”
아멜리아에겐 더없이 중대한 문제였다.
시우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를 아무리 노력해도 해줄 수 없다니.
이 어찌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녀의 표정이 어찌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지 샤론은 저도 모르게 ‘괜찮아요?’라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각오를 굳히며 이어 쐐기를 박는다.
“그럼요, 엄청 좋아해요. 남자는 모성에 약한 거 아시죠? 얼쩔땐 아기처럼 굴면서 부드럽고 안기고, 때론 거칠게 다뤄주는지….”“아멜리아 님도 한번 만져보시겠어요?”
기세가 오른 샤론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쌍둥이의 전의조차 한 번에 꺾어버렸던 샤론의 필살기다.
“아멜리아 님?”
아멜리아는 등골을 저미는 한기에 저도 모르게 내밀려던 손을 붙잡았다.
저걸 만지는 순간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고 들어갈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이 스멀스멀 올라왔기 때문이다.
“시, 싫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제가 너무 실례한 건 아니겠죠?”
“...괜찮아요, 저 역시 무례를 범했는걸요.”
정중한 말씨 속, 칼을 품은 채 일합씩 주고받은 두 사람.
둘 다 초기 목적은 간데없었다.
지금 당장 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할 뿐.
아멜리아의 그늘진 얼굴과 샤론의 득의양양한 얼굴을 보면 현재 스코어는 o대 I두 사람은 이제 막 1라운드를 끝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