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65화 (465/917)

1.자스민, 알랑알랑, 라벤더 민들레, 오렌지꽃, 까막까치밥 열매, 붓꽃, 육두구, 검은 후추, 바닐라, 사루비아 등등.어마어마한 분량의 재료를 추출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원료 추출작업만의 매력이 있다면 몸에 한껏 좋은 향기가 남는다는 것이다.

8시간에 걸친 추출 작업 이후 온갖 향긋한 냄새로 범벅이 된 시우는 향수 가게로 돌아왔다.

혼자서.

사실 추출 작업 자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제 했던 장미에서 정유를 추출하는 것은 한 종류의 꽃을 증기로 푹푹 삶기만 하는 단순 작업이라 마지막에 딱 한 번만 증류기 내부 세척을 해주면 됐다.

그러나 향수에 특히 많이 사용되는 자스민을 제외하고 나머지 꽃과 과실을 이것저것 추출하기 위해서는 빈번한 세척작업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작업 역시 지연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8시간만에 끝내기에는 양이 너무 많기도 했고 말이다.

“무슨일이래….”

하지만 아멜리아는 고집스레 시우의 등을 떠밀어 향수 가게로 돌아가게 했다.나머지는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말과 더불어 말이다.

아멜리아를 돕는 것을 자처한 만큼 조금 힘이 들어도 끝까지 도움이 될 예정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고집을 부려서라도 함께 작업했겠지만 완고함까지 느껴지는 아멜리아의 축객령에 혼자 덩그러니 돌아온 것이었다.

“어차피 혼자와도 할 것도 없는데….”

일할 때는 그나마 스몰톡이라도 했지.여기는 읽을 책 한 권 없다.

아멜리아 혼자 열심히 일하는 동안 손가락이나 빨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되돌아가서 일을 거들자니 한소리 들을 것 같다.기왕 이렇게 된 거 가게나 깨끗하게 청소해놓자고 다짐한 시우는 청소도구를 챙겨 2층으로 향했다.

2.

그 시각 시우를 먼저 귀가시킨 아멜리아.

공방의 문틈으로 시우가 사라지는 것을 본 아멜리아는 즉시 모든 증류기의 최종 점검을 끝내고 소피아의 집으로 달려갔다.

아멜리아는 더는 우물쭈물 거리지 않기로 각오했다.

하지만 의욕만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는 법.

이 분야의 전문가이자 숱하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던 친구에게 조언을 얻고자 한 것이다.

지금은 한 해의 마지막 새벽.

올해가 가기 전에 그에게 꼭 주고 싶은 것이 있었다.

-또또또-1 “I “I

아멜리아가 소피아의 집 문을 두드리고 30초쯤 지나자 고양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멜리아.”

규칙적인 수면 패턴을 지닌 소피아 답게 방금 일어났는지 잠옷 차림, 살짝 놀란 눈으로 뜻밖의 손님을 맞이한 그녀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예전 아멜리아가 소피아의 문고리를 두드릴 때면 항상 시우와의 오해나 틀어짐으로 인해 조언을 받아갔던 것이다.‘이번에도 뭔가 트러블이 생긴 걸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들어가도 될까요?”

하지만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아멜리아를 다시 본 소피아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영문도 모르고 뺨을 얻어맞고 화풀이하던 식으로 찾아오던 그 표정이 아니다.

불안한 마음속에서도 확고한 결심을 다진 아멜리아가 거기 있었다.

그에 안심한 소피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물론이지. 어서 들어와.”

커피향이 진하게 퍼지는 안락한 소피아의 저택.

짐승의 마녀라는 이명에 걸맞게 소피아가 집안에 들여 키우는 고양이만 백 마리가 넘어간다.

게다가 모두 향긋한 냄새가 나는 아멜리아를 좋아했기에 아멜리아는 응접실에 들 때까지 사방 곳곳에서 쏟아지는 고양이의 지나친 환대를 감내해야 했다.

“커피 내줄게. 새벽엔 역시 홍차보다 커피지.”

“고마워요.”

원래 고양이라면 질색팔색을하는 아멜리아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겨를도 없다.

소피아가 아주 잠깐 커피를 내왔을 때 아멜리아는 무릎에 두 마리, 팔걸이에 총 세 마리, 등받이에 두 마리, 발치의 다섯 마리가 매달린 캣타워가 되어 있었다.

저 상태론 대화하기 힘들겠지.

“훠이훠이, 절로 가서 놀렴 애들아.”

소피아가 손을 휘젓자 고양이들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그제야 조금 정돈된 분위기.

“그래서 무슨 일이야?”

“상담요청이에요.”

아멜리아가 찾아온 시점에서 예상된 일임과 더불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일전까진 아멜리아가 조금 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적극적으로 상담에 응해주었다.뿐만 아니라 접점 자체를 만들기 위해 신시우와 아멜리아 양쪽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문제는 악의가 없었다고는 해도 그 유도로 인해 두 사람이 적잖은 피해를 봤다는 것이다.

소피아의 욕심으로 파산 직전까지 갔던 고객이 다시 한 번 컨설팅을 요구하는데 어떻게 쉽게 여길 수 있을까?그것도 그 고객이 가장 친한 친구라면 말이다.

식상하고 안정적인 조언이라도 자칫 삑사리가 날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인지 아멜리아가 선수 쳤다.

“소피아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맞아, 경솔한 조언은 안 하느니 못하다는 깨달음을 얻었거든.”

아멜리아는 면목 없어하는 소피아에게 답했다.

“소피아의 조언은 도움이 되었어요. 제가 인정하지 못했던 것뿐이에요.”

“그래도…. 다른 사람도 있지 않을까?”

“소피아가 해주었으면 해요.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고, 중요한 문제니까요.”

수줍게 늘어놓는 아멜리아의 말에 한 방 얻어맞은 표정을 지은 소피아.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소피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결연한 각오를 품었다.

지금까지 체득한 모든 정보를 동원해서 아멜리아를 돕고, 이번에는 뒷수습까지도 확실하게 하기로.

“그래서 무슨 상담인데?”

하지만 정작 소피아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묻자 어물쩍거리는 것은 아멜리아였다.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이나 입술을 달짝이던 아멜리아의 웅얼거림은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조그맸으니.

“오늘 시우와….”

귀가 무척 좋은 소피아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소피아와 다시 조금 더 크게 말하는 아멜리아.

“오늘 시우와 ……하고 싶어요.”

중간의 공백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아멜리아가 목소리를 확 줄인 까닭에 잇새로 바람이 새어나가는 소리만 들렸지만….평정심은 어디 가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낯빛과 아주 살짝 들리던 ‘스’ 소리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여전히 작았다고 생각했는지 확실하게 단언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시우와 섹…스…하고 싶어요.”

세 번의 반복이 지나서야 소피아는 뇌를 그냥 스쳐 지나가던 아멜리아의 문장을 인식했다.

혹시나 싶었던 키스가 아니라 섹스였다니.

새삼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는 말이 참된 진리임을 되뇌게 한다.

매번 무표정하게 틱틱거리던 아멜리아가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얼굴을 붉힌 채 그런 상담을 해오는 것이다.

그 풋풋함이 감염된 탓일까?

오래전 잊고 지내던 설레임이 괜히 소피아의 머리에까지 꽃바람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진정하자.

소피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소 민망하고도 노골적인 질문이지만 해야 한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네….”

“정말하고 싶어?”

끄덕끄떡 위아래로 흔들리는 아멜리아의 작은 머리.

만지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머리 전체가 벌겋고 뜨거워 보인다.

역시 아멜리아는 남녀 성교의 중대함과 이런 상담이 상당히 낯부끄러운 것임을 모르고 묻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지 물어봐도 돼?”

소피아는 그렇게 자신을 가다듬으며 심호흡했다.

우선 ‘어떻게’를 논하기 전에 ‘왜?’를 논해야 할 때다.

과보호라는 자각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아멜리아가 이런저런 경험 덕분에 달라졌다고 해도 남녀관계에 관한 지식이 갑자기 해박해진 것은 아닐 터.

자칫 왜곡된 인식이나 상황 파악으로 결정한 것은 아닐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멜리아는 거기까지 물어볼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 했는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성실히 응답했다.

“더… 가까워지고 싶으니까요….”

“그가 먼저 요구했어?”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부끄러움도 잠시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다.아멜리아는 또박또박 제 생각을 풀어나갔다.

“무, 물론…. 남녀가 혼인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몸을 섞는 건 문란한…. 미안해요, 소피아 얘기는 아니었어요. 요즘은 세상도 많이 바뀌었다고 하고….”

“아니야, 나는 전혀 신경 안 써. 계속해줄래?”

“소중한 것들을 시우에게 주고 싶어요…. 설령 보답 받지 못하더라도…. 전부 주고 싶어요.”

마법에 관련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주변에 눈독을 들이지 않던 아멜리아다.

특히 남녀관계에 있어서는 철저한 보수주의, 성관계를 하려면 반드시 결혼 이후라며 소피아를 꾸짖던 그녀.

그런 아멜리아가 조건도 체면도 따지지 않고 무작정 베풀어주고 싶어하는 상대라….

솔직히 친한 친구라지만 부럽고 아주 조금은 시샘이 났다.

정작 소피아도 그런 마음이 드는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이상의 확인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좋아,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그…. 잠옷이요. 예전에. 소피아가 별장에 놓아두었던….”

“아, 혹시 베이비돌?”

아멜리아가 시우와 함께 처음 보더타운으로 향하던 날.

소피아는 둘을 위해 별장을 마련해주었을뿐더러 아주 야릇한 베이비돌 잠옷까지 준비해주었다.

아멜리아가 그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려 시우를 유혹해 보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뭐, 아멜리아라면 그런 도구의 도움 없이도 쉽게 유혹해버릴 것 같지만 만전을 기하고 싶어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래, 처음은 늘 불안한 법이지.”

소피아는 웃으면서 아멜리아를 옷장으로 데려갔다.

아멜리아가 어른스러운 속옷을 입게 된 것이 소피아의 부추김이었듯, 사실 언젠가 그녀에게 선물하기 위한 야한 잠옷도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아멜리아가 그날 이후 잠옷 얘기만 나오면 학을 뗐기 때문에 차마 권하지 못했을 뿐이다.

“아….”

아멜리아의 치수에 맞춰진 옷들.

아니, 옷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비장의 컬렉션이 주르륵 공개되는 순간.조금은 진정되어가던 아멜리아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살결은 물론 종류에 따라 가슴, 음부까지 가리지 않는 디자인.

그 자체만 봐서는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저 옷을 입고 시우 앞에 선다는 것은 아멜리아에게 대단히 큰 부끄러움을 안겨준 것이다.

“처, 천박해 보이지는 않을까요?”

“내가 남자라면 좋아 죽을 것 같은데? 이거 입어볼래?”

소피아가 고른 것은 전체가 검고 옷감이 현저히 적은 네글리제였다.

아멜리아가 지금 입는 드레스를 분해하면 대여섯 벌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편 얼어붙은 아멜리아와 다르게 소피아는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침착하려고 했는데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같이 정성껏 골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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