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64화 (464/917)

1.

스승님께 인사를 하고 아멜리아를 뒤쫓는 시우.

그런 표정을 짓고 뛰쳐나간 아멜리아가 향할 곳은 손금보듯 뻔했다.

아멜리아의 새장, 굴피나무 숲의 오두막이다.

좌표이동식을 활용한다면 단숨에 오두막까지 향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쿠트 갤러리에서 굴피나무 숲까지는 넓은 평야를 밭 삼아 자라난 억새와 그 사이로 삐뚜름하게 난 오솔길뿐이다.

오히려 마법을 사용하는 게 괜히 엇갈릴 염려도 있고, 무엇보다 정작 아멜리아를 만나도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무척 곤혹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누굴 탓하겠어.”

오딜 오데트, 샤론, 스승님.

어느 한 사름;을 고르라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하나같이 소중한 인연이자 연인이다.네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을지언정 후회를 품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차라리 타카쇼처럼 여심에 능숙했다던가 이것저것 테크닉이 있었다면 훨씬 완만하게 관계를 수습해나가지 않았을까.물론 그 관계가 지금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어도 이 한심스러운 작태를 보아하니 그런 생각이 절로 든다는 말이다.

한숨을 푹푹 쉬며 걷고 있던 그때.

저 멀리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금빛의 실루엣이 보였다.

별빛이 가로등을 대신하는 어스름한 들판.

억새풀 사이를 해치며 달려온다.

처음에는 그저 당황했다.

저 모습은 아멜리아가 분명하다.

다만 시우는 그녀가 저렇게 헐레벌떡 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

혹시 숲 속에 공적이라도 나타났나?

아멜리아가 도망칠 수준의 공적이라면 시우는 상대도 되지 않은 터인데.

그런 엉뚱한 생각에 눈을 치켜뜨고 마법을 쓸까 말까 고민하던 와중에 바람처럼 들판을 가르며 달리던 아멜리아가 스무 걸음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눈가와 볼에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눈물 자국이 그윽했다.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에 떨어지지 않는 입.

하지만 아멜리아의 얼굴 전체에 눈길이 닿는 순간 뭔가 변했음을 느낀다.

엘로아를 본 아멜리아가 도망친 이유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심정을 지니고 있었을지, 왜 도망갔을지도.

그렇기에 울었다고만 생각했다.

슬퍼했다고만 생각했다.

“시우.”

그러나 다르다.

마치 가면처럼 속내를 감추던 완고한 무표정이 무너져있다.

조금만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았던 나약함도 휘청임도 눈물에 쓸려나간 듯 간데없었다.

그 대신 보이는 것은 지상에 내린 별빛보다 찬란한 반짝임과 솔직한 미소.

아멜리아는 천천히 시우에게 다가섰다.

억새를 사부작거리는 바람결에 아멜리아의 탐스러운 금발이 휘날렸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어리둥절해하는 시우를 아멜리아는 꼭 껴안았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한 힘으로 안고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바보 같이 굴어서 미안해요.”

한결 부드럽게 풀려있는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시우도 어깨에 힘을 조금 뺄 수 있었다.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머리에 얹는다.

“바보 같다뇨. 제가 제대로 처신 못한 거죠.”

한참이나 시우를 껴안던 아멜리아는 슬쩍 그를 놓아주더니 그 자리에 멈춰선 채 시우를 올려보았다.

“시우, 부탁이 있어요.”

“뭐든 말씀하세요.”

“뺨을 때려줄래요?”

“… 네?”

무척이나 뜬금없는 부탁이었다.

당연히 ‘뺨을 때리게 해줄래요?’라고 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하긴 전후 관계를 생각해도 그 편이 더 일리 있긴 했다.

그런데 살짝 젖어있는 눈망울로 무척 로맨틱하게 바라보면서 뺨을 때리게 해달라니.

아멜리아는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있다.

“알겠습니다.”

시우는 얼굴을 내밀었다

가까워진 시우의 얼굴에 숨을 들이 삼키다가 고개를 갸우뚱한 아멜리아는 그제야 그가 잘못 이해했음을 깨달았다.

스승님이 남겨주셨던 말 중 하나.

‘가슴이 뛰는 사람을 만나거든 있는 힘껏 안아 주렴’은 방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 다음엔 남겨주셨던 말 둘.

‘잘못; 것이 있거든 힘껏 뺨을 때리고 키스해주렴’이 남았다.

하지만 이 경우 시우는 잘못한 것이 없다.

따라서 아멜리아가 뺨을 맞고 시우가 키스해주는 순서가 남은 것이다.

서로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더욱 뜨겁게 사랑하기 위해서.

아멜리아는 오랫동안 미뤄둔 고민거리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았다.

스승님의 마음에 대해서도, 시우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게 한껏 들뜬 마음과 잔뜩 격앙된 감정, 거기에 미숙한 자기표현력이 더해지니 다소 생뚱맞은 결론이 나온 것이다.

“시우, 아니에요. 시우가 제 뺨을 때려야 해요.”

“네? 제가요?”

“네.”

시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아멜리아를 보았다.다짜고짜 뺨을 때려달라니.

뒷사정을 모르는 시우로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대답까지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못합니다.

“왜죠…?”

이유도 모르고, 아니 설령 이유를 알고 있다고 해도 뺨을 때리라니.

그건 못할 짓이지.

그런 시우에게 아멜리아는 손을 움켜쥐며 다시 한번 간원했다.

“뺨을 때리고 키스해주었으면 해요.”“부탁해도 될까요?”

시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멜리아의 부탁 자체가 떨떠름하다기보다는 도저히 그녀를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 까닭이다.하지만 저렇게까지 간절하게 부탁하는 건 모르는 뒷사정이이 있겠거니 싶다.

“한번이면 되는건가요?”

“네.”

조금도 의지를 꺾을 기색이 없는 아멜리아.

한숨을 쉬고는 손을 들자 아멜리아는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지그시 눈을 감았다.바보 같을 정도로 진지한 표정이라 이게 다 무슨 짓인가 하는 헛웃음이 나왔다.

-탁

“여기요.”

시우는 아멜리아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듯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때렸다기보다는 쓰다듬었다는 표현이 훨씬 가까운 손길에 아멜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왜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셨는지는…. 조금도 모르겠지만 때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갑자기 울먹이는 눈빛으로 변한 아멜리아.

이럴 줄은 몰랐다는 당혹감과 놀라움이 표정 곳곳에 박혀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우는 말랑한 그녀의 뺨을 붙잡고 고개를 기울였다.

때리는 건 정말 내키지도 않고 싫어도 키스만이라면 얼마든지 해주고 싶다.

그런 마음이었다.

2.

모처럼 좋은 분위기였으나 아멜리아와 시우의 향수 타이쿤은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세척과 탈향 과정을 거치고 재가동 준비가 끝난 증류기가 기다리는 공방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추가 배송이 끝난 무수한 다양한 꽃가지와 싱그러운 과실이 창고에 그윽이 쌓여 시우와 아멜리아를 반겨주었다.사실상 동물성 향료를 제외하면 모두 직접 추출할 계획인 듯했다.

“흐... ”= .

시우는 꽃이 섞이지 않게 분류하는 한편 열심히 증류기를 점검 중인 아멜리아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아멜리아는 오두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여느 때처럼 딱히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지만 묘하게 넘치는 활기와 생기.

함께 여행을 갔을 때보다 훨씬 홀가분해 보이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놀라움을 넘겨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따라서 기기 점검을 끝낸 아멜리아가 뽈뽈 다가왔을 때 멋쩍음을 감추며 “곧 새해네요.” 따위의 말을 하게 되었다.

이틀 뒤면 신년이다.

시우에게는 굉장히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식물인간 상태로부터 회복, 현세로 복귀, 샤론과의 만남, 스승님과의 만남, 소치틀의 소동, 타카쇼의 호스트바 아르바이트.예소드 일가와 이렇고 저런 해프닝, 타카쇼 구출기와 비앙카의 토벌, 데네브 제머나이와의 엉뚱한 하룻밤.

아멜리아의 폭주와 저지 그리고 극적인 화해.

이제껏 살아온 다른 일생을 증류기에 넣고 추출해도 이만큼 녹진한 액기스가 나오지는 않을 만큼 밀도 높은 삶이었달까.당연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가까워지자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시우는 계획이 있나요?”

“아직은 없습니다.”

사실 쌍둥이도 샤론도 시우와 새해를 보내고 싶어할 테지만….

그 사실을 방금 눈물을 삼키며 뛰쳐나갔던 아멜리아에게 전하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다.

“정말요?”

“음, 딱히 콕 짚어 정해 놓은 일은 없네요.”

시우의 답을 들은 아멜리아가 뜻밖의 말을 전한다.

“추출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시우는 연인들과 시간을 보내요.”

설마하니 아멜리아가 그런 말을 꺼낼 줄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그것도 조금 전 엘로아를 보고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아멜리아가, 한사코 시우의 연인에 대해 입에 담기를 꺼리던 아멜리아가 먼저 그런 말을 해준 것이다.

“시우의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내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쥐어짜네 허세를 부리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아멜리아는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며 굉장히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덜컥 ‘좋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바보짓이다.그런 마음도 전혀 들지 않고 말이다.

“아멜리아 님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타입이라고 생각한다.그래도 꼭 해주고 싶었다.

너무 수북이 쌓인 탓에 무너져 내리려던 자스민 꽃을 정리한 아멜리아는 시우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알아요, 시우도 제게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아멜리아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라는 감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에 할 말을 잃었다.시우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답했다.

“그러니까 걱정 안 해주셔도 돼요. 저에게는 아멜리아 님과 함께 있는 시간도 중요해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짧은 대화 이후로는 다시 찾아온 노동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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