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63화 (463/917)

1.

타들어 가는 젖은 장작의 메케한 연기를 맡는 것만으로 아늑한 오두막 속 불길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싱그러운 풀냄새가 섞인 흙내음에서 봄날의 소풍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후각은 곧 기억과 가장 밀접한 감각이다.

스승님이 남긴 마지막 편지.

그 유언장은 단순히 활자로 쓰여진 종이가 아니었다.

편지지에 뿌려진 향과 기억의 연결고리를 실체화해 더없이 뚜렷한 기억을 구현해내는 마법.

아멜리아는 자꾸만 희뿌옇게 번지는 시야를 몇 번이나 닦았다.

“아멜리아.”

시야의 모서리부터 흐릿하게 적셨던 눈물을 소매로 훔쳐내자 그토록 그리워했던 스승님이 앉아있다.수수한 꽃으로 장식한 모자를 제외하면 화려하지 않은 마녀복과 이제는 유품이 되어버린 망토.기품이 묻어나오는 자애로운 눈동자와 연한 금발.

아직 어린 시절, 아멜리아가 실컷 놀고 들어오면 점잖은 웃음으로 반겨주었던 그 소파에서.

생전의 모습 그대로.

아멜리아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면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아멜리아를 바라보지 않고 허공을 맴도는 스승님의 눈동자.당장 달려와 안아주지도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주지도 않는 환영.

이건 시간을 되돌려주는 기적 따위가 아니다.

마법을 이용해 아주 잠깐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는 눈속임.

그럼에도 다시는 볼 수 없을 줄로만 알았던 스승님의 모습은 아멜리아에게 작은 기적처럼 다가왔다.

“스승님….”

눈 앞에 보이는 스승님은 아멜리아의 기억 속보다 훨씬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또한 기억 속처럼 자상함만이 가득한 완전무결한 성모의 모습이 아니었다.

부드럽게 머금은 미소 속 살짝 내빼문 혀에서 조금은 개구진 장난기가 엿보이고, 이곳저곳을 방황하는 눈동자는 조금 침착함이 없어보인다.

하긴 그로부터 시간이 참 많이도 지났으니.

아멜리아는 어느덧 스승님보다 많은 세월을 살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네가 이 편지를 읽게 될 때가 언제일지 알 수가 없구나.

너는 은근히 싫은 일에서 도망치려는 구석이 있어서 말이지. 몇 번의 봄이 오고 몇 번의 겨울을 보냈니?”

비로소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스승님은 아멜리아의 이름을 부른지 한참이 되어서야 말을 꺼내었다.

“벌써부터 궁금한 것이 참 많단다.

식사는 잘 챙겨 먹는지, 내가 없이도 잠은 재깍재깍 자는지. 코코아를 너무 자주 마시는 건 아닌지. 소피아와는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지. 마법 공부는 열심

히 하는지….

어머, 지금은 견습마녀가 아니라 어엿한 마녀겠지? 공연한 걱정이었네.

그래도 이해해줬으면 싶어.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자라도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보인다는데…. 이게 엄마의 마음인가 봐.”

미리 써두고 줄줄이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멜리아가 계승의 진실을 알 수 없게 하려고 꾹꾹 눌러두었던 말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풀어내는 스승님은 혼잣말하는 것이 어색한지 스리슬쩍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한테 많이 화났겠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훌쩍 떠나가버렸으니. 너무 멋대로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도 같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고….미안해. 많이 원망하고, 미워했겠지?”

미웠다.

세상 누구보다도 원망스러웠다고.

왜 날 혼자 남겨두고 말았느냐고.

울부짖고, 소리치고, 따지고 화를 내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스승님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 점만큼은 단단히 따져 묻겠다고 다짐했을 터인데….

“밉지 않아요…. 원망하지 않아요….”

이것은 과거에 찍혀진 영상편지일 뿐 스승님이 되돌아온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멜리아는 한 발짝씩 스승님에게 나아간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승님을 끌어안는다.

그 순간.

두 팔이 거짓말처럼 아멜리아의 등을 휘감으며 따스하게 몸을 감쌌다.

놀란 아멜리아가 눈을 치켜뜨자 스승님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래, 지금쯤이면 네가 날 안아주고 있지 않을까. 나도 나름대로 노력해 봤어. 참 멋진 마법이지?”

환상일 것이 분명한 스승님에게서 분명한 체취, 온기, 옷감이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까지도 선연하게 느껴졌다.

아멜리아의 기억 그대로 품에 안겨 잠이 들 때면 느껴지던 손길이 ‘착하지. 착하지.’ 하는 속삭임과 함께 등을 쓸어내었다.

“스승님, 보고… 싶었어요….”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던 아멜리아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혹시 자책하고 있다면 그러지 말아 달라고 말하고 싶구나.

아멜리아, 네가 나에게 얼마나 행복한 선물이었는지 아니?

산딸기 덤불에 찔리면서 예쁜 딸기를 잔뜩 가져다주었지.

내 품에 안겨 천사처럼 잠든 얼굴만 봐도 그날 피로가 전부 가시는 게 어찌나 신기하던지…. 한참이나 쓰다듬다가 날을 꼬브t 새운 적도 있단다.

억지로 숙제를 시킬 때면 잔뜩 토라져서 다람쥐처럼 볼을 부풀리다가도 쿠키 하나에 배시시 웃어버리던 모습은 누구 허락을 받고 그렇게 깜찍한지….

비가 오기만 하면 같이 자자고 고집을 부리던 때도, 생일 케이크를 구워준답시고 오븐에 불을 냈던 때도, 숙제를 벽난로에 던져버리고 시치미 떼던 널 혼내는 순간도 모두 거짓말처럼 행복했어.”

스승님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멜리아. 너는 내게 소중한 기적이었단다. 그래서 말이야.

뻔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없이 떠나게 된 걸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몇번의 기회가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이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아.”

용서했어요.

이제는 정말 미워하지 않아요.

그저 이렇게 안기고 싶었어요.

목 끝까지 차오른 말들은 그저 울음으로 뒤바뀌어 흘러내렸다.

“너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마법 공부만 독촉했던 거….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지 못한 거…. 그것만이 후회가 남네.”

아멜리아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사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그렇듯, 스승님은 아멜리아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것이다.

비록 홀로 남겨진 끝에 마주했던 것은 무채색의 컴컴한 세상이었지만, 스승님께 받았던 나날은 좁은 새장 속의 감금일지가 아니었다.

작고 사소한 한순간 한순간이 괴로움을 버텨낼 수 있게 해주었던 소중한 추억이었다.

“이별의 순간은 짧을 거야. 아마도 많은 말을 남기지는 못할 거란다. 나는 말주변이 없는 편인데다가…. 솔직히 그때가 되면 울지 않기 위해서 꾹 참는 것만으로 버거울 것 같거든.”

떨리는 음색을 가다듬는 스승님.

그 손은 멈추지 않고 등을 보드 담으며 아멜리아의 지난 회한과 눈물 자국을 어루만졌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남겨 놓을게. 들어주겠니?”

뒤늦은 스승님의 전언에 아멜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귓가에 달싹이는 목소리.

“너무 슬퍼 말렴. 겨울 눈에 덮인 동토에도 싹이 피듯이 네 슬픔 위로도 아름다운 꽃이 피게 될 테니까. 네게 받았던 행복의 절반만큼이라도 네가 행복했으면 싶구나.

오두막은 너무 좁았지? 세상은 무척이나 넓단다. 어디로든 돌아다니며 곳곳을 구경해보렴. 보더 타운에서 아르스 마그나 타운, 이름 없는 부지 곳곳까지.네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는 너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줄 거란다. 나는 가본 적이 없지만 현세에도 나가보렴. 이렇게나 아름다운 세상인데 마법만 연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니 그건 너무 재미없잖니?

좋은 친구를 많이 사귀렴. 소피아는 짓궂은 구석이 있지만, 배려심이 깊은 아이야. 너무 미워하지 말고 종종 함께 놀아주려무나. 우정을 소중하게 여기면언젠가 너에게 반드시 보답해 줄 거란다.

잠은 충분히 자렴. 마녀에게 수면이 필요 없다고 해도 머리를 깔끔하게 비울 수 있게 해주거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기거든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눈을 감아봐. 가끔은 눈을 돌려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있는 법이니까.

꾸미기에 소홀하지 마렴. 사람들은 본질이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 있다 하면서 정작 속내를 먼저 들여봐 주지는 않거든. 머리는 정갈하게 빗고, 중요한 자리에 나갈 때는 한껏 화장도 하면서 뽐내어보렴. 그리고….”

그 전까지의 머뭇거림은 사라졌다.

계승의 진실을 숨기기 위해 정작 제때에 맞춰하지 못했던 말을 스승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나갔다.

아멜리아는 말 맺음 하나하나에 고개를 끄덕이고 스승님을 꽉 껴안았다.

“0| 정도면… 됐을까? 혹시 너무 길어서 지루하지는 않았니? 간단하게 끝날 줄 알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나 많이 남았었네.”

쓴웃음이 서린 스승님의 말과 함께 다시 한번 힘차게 끌어안는 두 팔.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무리하게 할 필요 없어. 너는 이미 대단하고 소중한 사람이야, 아멜리아.

그래도 너무 흥청망청 놀다가는 선대 마녀님의 이름에 누가 되니까. 마녀답게, 그리고 귀족답게 살아가렴 그리고….”

기억 속 스승님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그녀의 두 손이 아멜리아의 뺨을 잡았다.

실제로는 보이지 않을 터인데도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전해주겠다는 것처럼 이마가 맞닿았다.

“사랑을 하렴.

눈물 젖은 미소를 띤 눈동자는 ‘당연히 보고 있지?,라고 말하듯이 정확히 아멜리아와 마주 보고 있었다.

“가슴이 행복으로 터질 것 같은, 눈을 감고 그 사람을 떠올리기만 해도 피식 피식 미소가 번지는, 장작불처럼 품이 따뜻해지는…. 그런 사랑을 하렴.

마녀일 수도, 멋진 남자일 수도 있겠구나.

우리 귀여운 아멜리아를 누가 데려갈지 얼굴을 못 보고 가는 게 유일한 한이네.

하지만 네가 고른 사람이라면 분명 멋지고 상냥한 사람일 거야.”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아멜리아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모든 순간이 달콤하기만 한 건 아니겠지. 마음이 앞선 서투름 탓에 때로는 상처받고, 때로는 상처를 입히는 날도 있을 거란다. 어쩌면 이뤄지지 못한 채허무하게 끝나버릴 수도 있어. 더 함께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더욱더, 가슴이 뛰는 사람을 만나거든 있는 힘껏 껴안아주렴.

그 사람이 잘못해서 화가 날 때도 우물쭈물 거리지 말고 힘껏 뺨을 때려준 뒤에 키스해주렴.

후회를 남기지 않을 수 있도록, 적어도 그때 더 사랑할 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무서워도, 두려워도. 무릎을 세우고 나아가렴.”

이마를 맞댄 스승님은 한참이나 있다가 여한이 없다는 듯 후련한 한숨을 쉬었다.그 얼굴에는 조금의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 많이 사랑한단다. 아멜리아, 자랑스러운 나의 딸, 나의 숨, 나의 기적.”

아멜리아를 마지막으로 꼭 껴안은 그녀는 두 팔을 풀어주었다.

이제는 둥지를 떠나 자유롭게 날아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원섭섭한 미소를 지으며.

“네가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널 아끼는 어머니 말리카로부터.”

그녀는 항상 자기소개를 할 때 붙이던 마녀명을 붙이지 않고 편지를 끝맺었다.메리골드의 이름은 아멜리 아가 이어주었으니까.

편지는 끝났다.

앨범 속 추억이 깃든 사진을 들추던 것처럼 생활감 넘치던 오두막의 풍경도 원래로 되돌아왔다.

허전할 정도로 삭막하게 변한 오두막에 남은 유일한 자취는 전부 타고 남은 벽난로의 장작뿐.

그럼에도.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가운 방안에서도, 아멜리아는 뜨거운 온기를 느꼈다.

왜냐하면 이렇게나 따스한 그녀의 응원이, 사랑이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저도 많이 사랑해요. 스승님.”

스승님이 떠날 때 정작하지 못했던 말.

꼭 해야 했던 말을 늦게나마 읊조린 아멜리아는 오두막의 문을 박찼다.

뒤를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스승님이 떠밀어준 손길을 느끼며.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달려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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