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내일 정상 영업입니다
엘로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것에 버금가는 기세로 뛰쳐나간 아멜리아.
시우는 그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차를 내올게요 라니.
방금 우려내 온기가 식지 않은 차 주전자가 여기 있지 않은가?
눈에 빤히 보이는 핑곗거리다.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이 한심하다는 것은 아니다.
한심한 건 도리어 이쪽이다.
대추4 없이 발은 벌려 놓은 주제에 수습할 능력은 제대로 없고, 뚝심 있게 밀고 가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여기까지 일을 키웠겠지.
“내가…. 실수라도 했는가?”
딱딱하게 굳은 시우의 얼굴과 부자연스러운 아멜리아의 퇴실에 덩달아 불안해진 엘로아.한편 엘로아의 머릿속에서는 현재 상황에 대한 조합이 이뤄지고 있었다.
엘로아는 0|.멜리아와 접점이 없다
더군다나 시우에게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샤론보다 듣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우가 아무 이유도 없이 목숨을 걸었을 리는 없다.
거기에 구해진 상대가 ‘마녀’라면 얄궂게도 하나 밖에는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리 사랑하는 제자라지만 엘로아가 결코 그의 ‘좋은 점’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점이 그의 여성 편력이었으니.
시우의 표정만 봐도 얼굴에 당장 쫓아가고 싶다고 뻔히 쓰여 있다.
엘로아는 씁쓸한 웃음을 짓더니 시우의 머리를 꽁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악!”
혹이 나지야 않겠지만, 꽤 감정이 실렸기 때문에 시우는 깜짝 놀라며 머리를 싸맸다.
“무슨 일인지 들어나 봐야겠네.”
“실은….”
“누가 지금이라고 했나? 어서 따라가 달래주게나.”
시우는 놀란 눈으로 엘로아를 보았다.
사실 즉시 아멜리아를 쫓아가지 않은 건 그녀가 ‘쫓아오지 마!’라고 말하는 듯한 완고한 뒷모습을 보이며 뛰쳐나갔기 때문만이 아니다.
못난 제자를 걱정해 버선발로 달려와 준 스승님.
그런 엘로아에게 제대로 된 상황 설명도 없이 자리를 비울 수 없던 까닭이다.
하지만 엘로아는 자세한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시우를 질책하지도, 끌어안고 독점하려 들지도 않았다.
대신 그저 이해해 주었다.
어떤 말도 필요 없을 정도로 뿌리 깊게 시우를 믿고 있는 것이다.
“현세의 정세가 상당히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어 나는 곧장 가봐야 하네. 그대가 무사한 걸 봤으니 된 셈이지.”
“스승님, 힘들게 오셨는데….”
“정 미안;1면 키스라도 진하게 해주면 되겠네만…. 그런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대와는 별로 입을 맞추고 싶지 않군.”엘로아는 시우를 꾹 안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공허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부서져 가던 엘로아를 구해준 시우다.
엘로아 역시 사람인지라 독점욕이 전혀 없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에게서 우선순위를 앗아갈 정도로 못돼먹은 심보는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난 괜찮으니 가보게나. 자세한 설명은 훗날 듣겠네.”
“스승님….”
“그렇게 빤히 봐도 키스해주지 않을 거니 어서.”
시우는 떨리는 눈으로 자애로운 미소가 새겨진 엘로아를 바라보았다.
무엇하나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옛날 옛적 엘로아라면 몰라도 지금의 엘로아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구태여 키스조차 필요 없다 반복해 말한 것도, 지금 시우의 가슴에 끼얹어진 희미한 죄책감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여기서 엘로아에게 키스한다면 시우는 도저히 아멜리아를 떳떳한 마음으로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감사합니다.”
못난 제자의 등을 떠밀어주는 엘로아에게 깊게 고개 숙인 시우는 아멜리아를 찾아 뛰쳐나왔다.
하지만 주방이 딸린 3층에도, 조제실인 2층에도, 접객용 매대가 설치된 1층에도 아멜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아....”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차를 타 오겠다던 아멜리아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바로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 며칠 아멜리아는 다가설 듯 말듯 망설이는 길고양이 같았다.
어느 순간에는 연인처럼 옆에 붙었다가도, 또 뒤돌아보면 멀찍이 떨어져 있기를 반복했다.그녀가 어떤 심정에서 그러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런 아멜리아가 자신이 벌인 일로 인해 황급히 돌아온 시우의 연인을 보고 어떤 낙담을 떠올렸을지.거기에 시우의 잘못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는 길게 늘어놓아야 입 아픈 것이다.
시우는 굴피나무 숲의 오두막으로 방향을 잡았다.아멜리아라면 그곳에서 찾아달라는 듯.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2.
식으 암고 이다변; 것은 &무것도 없다.
시우와 아멜리아가 겉도는 동안 그의 옆에는 많은 연인이 생겼다.시우의 그런 점을 원망할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다.
가장 먼저 주어진 기회는 아멜리아에게 있었다.
그것을 낭비하고 오히려 최악의 길로 이끌어간 것은 결국 아멜리아 메리골드의 자업자득일 뿐 누구도 탓할 수 없다.그의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아멜리아를 보고 웃어주니까, 손을 잡아주니까, 잠잘 때 옆을 지켜주고, 함께 근사한 일을 해주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진실을 직시하길 외면한 채 당장 행복에 젖어있을 뿐.정작 훗날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티페레트 공작이 갑작스레 들이닥쳐 시우를 껴안고, 키스하려는 모습을 보고.아멜리아는 지끈거리는 심장을 느꼈다.
이제야 현실을 제대로 바라본 기분이다.
시우는 아멜리아를 이해해주었고 모든 잘못을 따지지 않은 채 용서해주었다.
상냥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우의 상냥함은 아멜리아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쌍둥이에게도, 샤론이라는 마녀에게도, 티페레트 공작에게도 다르지 않게 분배된다.
그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 이후에는 떠올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신시우에게 아멜리아 메리골드는 ‘몇 번째’일까?
“인정하기 싫어요….”
그렇게도 힘들게 만났는데.
겨우겨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는데.
허자먼 그의 옆에는 이미 아멜리아보다 훨씬 애틋해 보이고, 소중해 보이는, 과거 시우에게 상처 입히지 않았을 여인이 있다.
이미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 늘어놓기엔 못난 투정이라는 것을 안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의 토라짐이라는 것도 안다.
이제와서 질투라니.
그렇게 미안하고 말했으면서 주제도 모르고 뻔뻔하게 질투나 하다니.
그렇기에 하필이면 떠오르고만 시우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은 곧장 자책으로 돌변해 날카롭게 가슴을 후볐다.
그래서 도망쳤다.
또 도망쳤다.
그렇게 S 서기로 해놨으면서.
하지만 아멜리아는 이름 모를 호문쿨루스보다, 이름만 알고 있는 공적보다 지금 이 마음이 더 두려웠다.
“한심해요.”
한심하다.
한심하다.
모든 것이 한심하다.
당당히 맞서는 척해놓고 실은 떠올리기 싫은 생각을 한쪽으로 밀어 넣어버린 안일함이.
단둘이 단란한 생활을 보내는 것에 취해 그가 자신 탓에 겪었던 일도 잊고 키스나 졸라대던 모습이.
결국 진실이 눈앞에 도달했을 무렵엔 기껏 세운 용기도 내팽개치고 다시 오두막으로 줄행랑치는 추태가.
아멜리아는 마법까지 사용해 날아가며 굴피나무 숲의 오두막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곳도 안식처는 되지 못했다.
끈질기게 아멜리아의 발꿈치를 쫓아 함께 들어선 고민은 오도카니 누워 모포를 뒤집어쓴 아멜리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쯤 시우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연인을 만나 쌓아두었던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사태의 장본인인 아멜리아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우가 뒤에서 험담할 리는 없다.
그러나 속 좁은 아멜리아의 과오는 어떻게 포장해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어찌 받아들이는지는 티페레트 공작의 몫이겠지만 아멜리아가 그녀라면 시우를 상처입힌 마녀를 결코 곱게 보지 않을 것이다.
모포를 둘둘 말고 구르다 침대 위에 엎드린 그때.
가슴 아래쪽을 쿡 찌르는 뾰족한 통증이 느껴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아멜리아는 그 정체를 알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멜리아가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스승님의 마지막 편지.
편지를 보자 새삼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이 또다시 떠오른다.
달라지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전혀 변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은 옷자락 안에서조차 증거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장례식이 끝난 이후 기나긴 시간 동안 아멜리아는 그것을 읽지 않은 것은 비단 슬픔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투정 어린 마음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아멜리아는 스승님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존경함과 동시에 한마디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이루어진 선택을 원망했다.
무뎌졌다고 착각이 들 정도의 애증 속에서 아멜리아가 보이는 아주 작은 반항이자 원망.
그럼에도 불쑥 가슴에 머리를 치켜든 오기에 아멜리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또 다른 아멜리아가 ‘이것도 무서워서 아직 펼치지 않은 거니?’라고 비웃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고민하던 아멜리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페이퍼 나이프를 사용할 것도 없었다.
아주 작은 힘만으로도 밀랍 위로 찍힌 봉인은 가볍게 뜯겨 나갔으니 말이다.
아멜리아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세장분량의 편지.
고작 종이 석 장일 텐데 왜 이렇게 무거운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질끈 감았던 아멜리아의 눈을 크게 뜨게 한 것은….너무나도 익숙한 향수의 냄새였다.
먼저 불가리안 장미와 일랑일랑의 향기가 산뜻하고 가볍게 번진다.
화사한 꽃다발의 첫 내음에 정신이 팔릴 무렵 둥글게 응축된 쟈스민 향.
손톱만 한 한 송이만으로 실내에 전체에 향기를 채우는 하얀 꽃이 부스러지는 알갱이처럼 우아한 장미 위로 흩뿌려질 무렵.
수줍게 고개를 내밀며 모든 것을 꽃다발의 포장지처럼 감싸주는 파우더리한 머스크향.그리고 동물 향료를 혼합해 만들어내어 살포시 섞여 있는 스승님의 체취.
오감 중 기억과 가장 강력하게 연동된 감각은 후각이다.
편두에서는1언제이 애1려를☆히 J어 이제는 찾을 수 없게 된 스승님의 체취가 듬뿍 배어 나왔다.마치 스승님의 품에 안겨 잠이 들 때처럼 아멜리아를 상냥하게 껴안는다.
“스승님….
벌써 울면 안 되는데.
벌써 울면 안되는데.
이렇게 되뇌는데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이 오두막에서 스승님과 함께 보냈던 추억과 행복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흉터투성이인 마음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끅끅 울음을 삼키다 내려다본 편지지에는 익숙한 글씨체가 정갈하고 빼곡하게.
꾹꾹 눌려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토록 다시 듣고 싶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랑하는 나의 딸, 아멜리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