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 대가 넘는 분량의 마차가 오가고 난 이후.
한적했던 창고에 장미의 홍수가 일었다.
세는 것보다 무게로 재는 것이 빨라 보이는 탐스러운 붉은 장미가 텅 비어있던 공방을 한가득 채운 것이다.
몇 시간에 걸친 배송 끝에 바닥에 깔린 하얀 천 위로 수북이 쌓인 장미.
이마저도 마법이 없었더라면 장미를 들여놓는 데만 삼일은 꼴딱 새어야 했을 것이다.시우는 탐스러운 꽃 한 송이를 들어보았다.
“이거 몇 송이나 되는 건가요?”
“마차 한 대에 이만 송이 정도에요.”
“오백만 송이는 그냥 넘네요….”
장미가 제철도 아닌 이 엄동설한에 무슨 장미 오백만 송이냐 싶겠지만….
된다.
그게 되니까 마녀의 도시 게헨나다.
옛날부터 꽃은 생명력의 응집체로 무수히 많은 연금과 마법실험에 사용되기 때문에 영산의 정원에서 사시사철 재배하기 때문이다.암만 그래도 이 정도 양이면 구릉 하나의 정원은 통째로 뜯어온 게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까지 많이 필요할까요?”
시우는 묵직하게 느껴질 정도로 꽃잎이 꽉 찬 장미를 다시 꽃 더미 속에 던지며 물었다.아무리 봐도 과한 것 같다.
혹시 아멜리아가 계산을 실수해 너무 많이 구매한 건 아닌지 걱정됐다.
사실 대마녀이자 23 위계인 아멜리아가 계산에 약할 리 없겠다만, 과거와 현세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인지 자꾸 챙기게 된달까.
“일만 송이의 장미를 증류법을 통해 추출하면 한 방울의 정유(精油)가 나와요.”
“한 방울이요?”
“네, 1mL 요.”
아멜리아의 향수 가격을 듣고 한시름을 덜었었는데 갑자기 원가 걱정이 되기 시작한 시우였다.
아멜리아가 조향(調香)에 사용하는 재료는 흔히 사용하는 합성 향료가 아닌 천연 원료로부터 추출한 정유였던 것이다.
시우가 놀라는 표정이 재밌었던 걸까? 아니면 아는 사실을 설명해 줄 수 있던 것이 기뻤던 걸까?아멜리아는 앙증맞은 미소를 지으며 시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시우에게도 추출하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재밌을 거에요.”
아멜리아가 시우를 동으로 만든 커다란 증류장치 앞으로 데려갔다.
시우의 키보다 훨씬 커다란 원통 3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각 부분 통은 긴 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속 증류기였다.
모든 재질이 동으로 되어 있었는데 증류기 중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것이 다름 아닌 이 동 증류기란다.
관리가 무척 어렵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쩐지 게헨나에 어울리는 물품은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스팀펑크 세계관에 더욱 어울릴 법한 기기.
아멜리아는 제 키보다 두 배는 커다란 기기 앞에 서더니 밸브를 조이거나 풀며 기기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리고는 구석에 놓인 상자 하나를 염동으로 동동 띄워왔다.
안에는 족히 수십 리터는 들어갈 것 같은 커다란 유리병이 있었다.
“설마 이거 마력수인가요?”
“맞아요.”
당연하지만 마력수도 꽤 고가의 상품이다.
저기 잔뜩 쌓인 상자가 전부 마력수이고 향수 제작을 위해 사용된다면 아멜리아의 향수 한 병이 어마어마한 고가인 것도 납득이 되었다.온갖 비싼 재료를 듬뿍 때려 박아 만든 제품이니 그 정도의 값을 할 수밖에.
“네, 항료를 추출하는 건 냉침법, 침지법, 압착법, 용매추출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저는 증류법을 주로 사용해요.”
그렇게 말한 아멜리아는 첫 번째 탱크에 마력수를 콸콸 부어 넣었다.
당연히 저렇게 큰 탱크가 마력수 한 통으로 전부 차진 않았고 시우가 거들어 총 20통의 마력수를 넣고 나서야 절반 가량이 채워졌다.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통 내부에 여러 마법적 장치가 추가로 있었다.
통상 마력수는 열에 의해 기화하거나 고체화되지 않음에도 증류법이라는 말이 나온 걸 보아 아마 마법진을 새겨넣은 것 같았다.
그 다음은 두 번째 탱크에 장미를 한가득 채워넣는 과정이었다.
시우도 염동은 썩 자신이 생겼다고 여겼지만, 아멜리아에 비할 바는 못되었다.
수만 송이는 족히 될 것 같은 장미가 줄지어 날아들더니 깔끔하게 통 안을 한가득 채웠으니.장미를 가득 채워넣고 덮개를 닫은 아멜리아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먼저 첫 번째 탱크에서 가열을 통해 마력수를 기화해요. 그렇게 뜨거운 스팀으로 변한 마력수가 관을 타고 두 번째 탱크로 연결되죠.”
아멜리아는 ‘ 크’자로 꺾여 있는 관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설명했다.
“그렇게 연결된 수증기가 두번째 탱크에 분사되면서 꽃을 통과해요. 그러면서 수증기가 꽃의 향기를 머금게 되죠.
이때 밸브로 압력을 조절하는데 압력을 높게 설정하면 고온의 수증기가 분사되면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장미향이 남고, 압력을 낮추면 상대적으로 저온의수증기가 분사되면서 발랄하고 화려한 느낌이 살게 돼요.”
“오,뭔가 신기해요.”
“그렇죠? 이렇게 두번째 탱크를 통과하면서 생긴 수증기는 위에 모여 세 번째 탱크로 넘어가게 되는데 냉각관을 거치면서 다시 액체로 변해요.
그렇게 액체로 변한 용액을 오일과 마력수로 다시 분액하면 비로소 향료가 되는 거에요. 분해된 마력수는 다시 첫 번째 탱크로 돌아가는 거고요.”
뭔가 보일러 장치 같기도 하고, 커피머신 같기도 하다.
아멜리아가 벨브를 몇 번 정도 돌려가며 조작하자 벌써 향긋한 꽃내음이 실내에 진동했다.
“오늘은 장미, 내일은 쟈스민에서 에센셜 오일을 추출할 테니….”
“엄청 바쁘겠네요.”
“네, 한동안은요.”
그나마 마력수는 재활용되는 것 같으니 원료 걱정은 조금 덜어도 되는 거겠지.
아무튼 시우는 아멜리아와 함께 증류기의 세팅을 끝내고 장미꽃을 한껏 끓이기 시작했다.
아멜리아의 설명만 얼핏 들었을 때는 사골처럼 푹 우리기만 하면 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아멜리아는 시시각각 계기판의 바늘을 확인하며 밸브를 조이거나 노즐을 통해 여분의 스팀을 빼주는 식으로 섬세하게 온도와 압력을 조절했다.여기서 시우의 역할은 말하자면 컨베이어 벨트였다.
두 번째 탱크에서 추출이 완료된 장미를 빼내고 새로운 꽃을 집어넣는 역할 말이다.
“시우.”
그렇게 정신없이 증류기를 오가던 중 아멜리아가 손짓했다.
가만 가보니 증류기의 마지막 탱크, 외부로 노출된 유리관에 쪼그려 앉은 아멜리아의 모습이 보인다.
“이리와 볼래요?”
수 만 송이의 장미를 쥐어짜네 만들어낸 기름.
냉각 과정을 거치고 또 분액을 거친 끝에 마침내 순수한 결정이 된 정유가 한 방울씩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시우도 아멜리아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작은 병에 쌓여가는 에센셜 오일을 지켜보았다.
“향기가…. 어마어마하네요.”
“그렇죠?”
아멜리아는 기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시우를 바라본다.
아닌 게 아니라 한 방울의 오일이 떨어져 작은 파문을 일으킬 때마다 꽃더미 속에서 헤엄치는 듯 자욱한 향기가 비강에 퍼졌다.
하지만 느긋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까지였다.
이게 아기자기한 향수 공작 시간이었다면 천천히 맺히는 에센셜 오일을 구경하며 나름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장이라고 말해도 큰 이상 없는 대량 생산에 그런 느긋한 여유는 달리 없었다.
잠깐 구경을 끝낸 시우와 아멜리아는 온종일, 과장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작업을 끝낸 뒤에야 1L가 조금 안 되는 에센셜 오일을 추출할 수 있었다.
2.
같은 증류기에서 다른 종류의 에센셜 오일을 추출하기 위해서는 몇 시간 정도 빈 증류기에 마력수만을 넣고 가열하는 리셋 과정이 필요했다.자칫하면 불필요한 향이 섞여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계에도 휴식이 필요하듯 사람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우와 아멜리아는 장미의 에센셜 오일을 추출하기 시작한 지 32시간 만에 처음으로 휴식을 결정했다.
두 사람의 휴식 장소는 말쿠트 갤러리에 소피아가 새로 만들어준 향수 가게.
가뜩이나 발달한 말쿠트 갤러리의 상권 중 ‘이런 곳에도 가계가 있었다고?’ 싶을 정도로 구석진 자리에 놓인 4층짜리 건물이었다.
말이 4층이지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낀 형태인지라 폭이 굉장히 좁았지만 워낙에 건물을 예쁘게 잘 짓는 게헨나의 특성상 아기자기하고 단란한 느낌이 물씬묻어나왔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 분위기는 일변한다.
팬티가 비쳐 보일 정도로 매끈매끈한 대리석 바닥과 자단목으로 짜인 튼튼하고 기품 넘치는 매대.작지만 근사한 샹들리에에 매달려 화려하게 일렁이는 촛대의 향연.
세상에서 가장 작은 궁전이 있다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화사한 실내 풍경에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선반에 놓인 공병이다.
선반에 주루룩 전시된 채 촛불을 반사하는 아리따운 공병은 빈 병만으로도 가치가 빼어나 보였다.
도자기처럼 아름다운 유리세공은 둘째치고 공병을 장식한 귀금속이나 보석 따위가 모조품일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매대 뒤편으로 커튼에 가려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며 2, 3층도 구경할 수 있었다.
1층이 귀부인을 위한 화장품 가게를 연상시킨다면 2, 3층은 어째 풍경이 익숙하다.
아멜리아가 아카데미에 재직하던 시절 그녀의 연구동과 거의 차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 고생을 하면서 짜낸 에센셜 오일이 우유 한 병 정도의 양이었는데 그런 커다란 병부터 조그마한 앰플까지 온갖 향료가 담긴 병이 족히 수천 개는 나열되어 있다.
듣자하니 스승님 이 물려주신 오일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숙소 역할을 맡은 4층에 도달한 시우.
아무래도 나머지 층은 사적인 공간이라 그런지 1층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당장 숙소인 이곳만 해도 바닥과 벽이 목재요 침대, 욕실, 소파가 끝인 단순한 원룸 구조였다.시우는 곧장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하루 동안 고생 많았어요. 고마워요 시우.”
“아닙니다. 아멜리아 님이 더 바쁘셨는걸요.”
사실 시우가 한 일은 반복 노동에 가까웠다.
꽃을 빼고, 채우고, 빼고, 채우고.
가끔 창고에 쌓인 꽃더미로 가서 아래 깔린 장미가 짓눌러지지 않게 뒤집어주는 작업 정도?
마법이 일천하던 시절이라면 때려 죽어도 못할 노동량이지만 지금 와서는 조금 따분한 반복 조립 정도의 힘이 들었다.다만 지나치게 천편일률적인 작업만 수행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마모되는 느낌이랄까.
그에 반면 아멜리아는 정말 열심히 증류기와 증류기 사이를 돌아다니며 계기판을 확인하고, 밸브를 조이거나 풀고 냉각수를 갈아주며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놀라운 것은 그런 아멜리아의 얼굴에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다는 점이다.
하긴 아멜리아는 반복 노동과 참을성이 있어야 하는 일에는 달인이나 다름없다.
그런 꾸준함이 있었으니 10이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홀로 마법을 연구할 수 있었겠지.
“이건 제 일이었잖아요.”
“아멜리아 님의 일이라면 제 일이기도 하죠.”
당연하다 싶어 이야기했음에도 아멜리아는 살짝 놀란 듯, 그리고 기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하루종일 같이 있었는데 제대로 대화도 못하고 있었다.
오죽 바빴어야지.
“빈말이어도 기뻐요.”
제 뺨을 감싸며 솔직하게 ‘기쁘다’라고 표현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어찌나 훅치고 들어오던지 시우는 잠시 말문을 잃고 말았다.머쓱하게 대꾸한다.
“빈말아닙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기뻐해도 되겠네요.”두 사람의 몸에는 장미 향이 할껏 배어 있었다.
후각은 자극에 가장 쉽게 둔감해지는 감각.
장미 향으로 그윽하던 공방을 벗어나 숙소로 자리를 옮기니 비로소 두 사람이 풀풀 꽃향기를 떨치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향기는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친다지.
사랑스러우면서도 농염한 향기로 가득 차는 좁은 방에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
자연스러운 끌림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아멜리아의 시선이 자신의 입술로 향해있음을 깨달은 시우는 요 며칠 한결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를 조금 더 좁혔다.
아멜리아가 발꿈치를 들며 시우의 허리를 휘감고.
묘한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자연스레 입을 맞추려는 그때.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