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59화 (459/917)

1.

새벽같이 일어난 아멜리아와 시우는 호텔 체크아웃 이후 게헨나로 귀환했다.

미리 연락을 받아두었던 소피아가 출입국 사무소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보랏빛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마녀.

아멜리아가 잠시 관리소장을 만나러 가는 동안 소피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시우 관리인…이 아니지?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와서 입에 뱄나 봐.”

“편할 대로 불러주세요.”

“큼큼, 그럼 시우 군. 여행은 어땠어?”

“즐거웠습니다.”

사실 소피아는 시우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의도는 좋았어도 아멜리아의 서툶을 알면서도 방치했고 그 결과 시우에게 큰 피해를 끼쳤으니 말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소피아도 그를 대할 땐 항상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친우를 자처하는 처지에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 있다.

“그래? 어땠는데?”

“아….”

시우가 기억하는 바라면 그녀의 몸매처럼 음탕한 구석이 있는 소피아다.

은근한 눈빛을 던져오는 그녀를 보고 질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엄, 아무 일 없었어요.”

“어휴, 역시 그렇구나.”

짐작했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소피아.

그녀의 질문 의도야 어찌 됐건 시우는 소피아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다른 마녀보다 세상 물정에 밝아 보이기도 하고 당사자보다 솔직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아멜리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지금이 기회였다.

“그보다 아멜리아 님 배상금에 관해서 여쭤볼 게 있는데요. 아멜리아 님은 향수를 팔 예정이시던데….”“안 그래도 준비해뒀어.”

시우가 이 말을 꺼낸 목적은 ‘그걸로 10년 안에 갚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잇기 위해서였는데.

소피아의 대답은 너무 태연했다.

마치 시우가 지닌 의문은 재고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제조 장비, 공방 그리고 가게는 준비해뒀어. 가게는 말쿠트 갤러리의 구석진 곳이긴 한데 크게 문제는 없을 거야. 재료도 주문해뒀고…. 살롱에서 고객도구해놨어.”

소피아는 주섬주섬 서류를 꺼냈다.

척 보기에도 두께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 이게 다 고객명부인가요?”

“응, 정확히는 예약 명부지. 나중에 직접 가게로 찾아갈 거야. 돈 많은 마녀 위주로 넉넉하게 꾸렸어. 지금도 계속 문의가 쇄도하고 있으니까 들어오는 대로정리해서 가게로 보내줄게.”

시우는 살짝 얼떨떨했다.

아멜리아와 시우가 밖에 지낸 기간은 이틀 꽉이 채 못 된다.

그 짧은 사이에 족히 수백 명은 될 것 같은 마녀의 예약을 받아낸 것이다.

“대단하시네요.”

그 수완에 감탄하는 시우에게 소피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명부를 건네주었다.

“네가 모집했어도 이만큼은 모였을걸?”

“그냥 향수인데요?”

아멜리아의 향수가 마녀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실제로 까다롭기 그지없던 플로라 아라베스크도 ‘피로의 향수’를 받자마자 돌변해 시우에게 옷을 지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냥 향수라니. 향수는 패션이야. 마법을 탐구하는 마녀라 해도 대부분 본 모습은 꾸미기 좋아하는 귀족 아가씨들이지. 당장 나만 해도 그렇고. 아멜리아의 향수는 마법적 효과를 떠나서도 향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거든.”

소피아는 마치 제자랑 이라도 하듯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아멜리아는 내가 등 떠밀 때 말고는 거의 향수를 만들지 않았거든. 그 덕에 수요에 비해 공급이 한참한참 모자랐지.그런데 게헨나에서 가장 뛰어난 조향사 메리골드가 향수를 주문 제작으로 만들어준다니. 그 누가 이 기회를 놓치고 싶겠어.”

그런 듯싶기도 하지만 뭔가 알쏭달쏭한 점도 있다.

“빚을 갚으려면 대량으로 물량이 풀어야 한다는데…. 희소성이 떨어지면 가격도 같이 내려가진 않나요?”

으레 한정품이라 불리는 물품이 괜히 웃돈을 얹어 거래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 아멜리아가 가뭄에 콩 나듯 한 병씩 팔아치웠으니 비싼 값에 거래되었을지 몰라도 그게 수백 병 수천 병에 이르게 되면….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모르는 소리야.”

소피아는 아멜리아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시우를 보고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말했잖아 주문제작이라고. 적어도 똑같은 목걸이에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서 마주치는 끔찍한 참사는 일어나지 않아.”

“그건 그렇네요.”

“또 아멜리아의 향수는 보관기관이 수백 년에 달해. 적어도 시간이 흘렀다고 보관 중에 향이 변하지 않지.”

그제야 시우는 아직도 마녀를 인간의 관점으로 이해하려 들었음을 깨달았다.

마녀는 늙지 않는다.

원한다면 수백 년을 살 수도 있다.

한때 반짝 물》이 풀려 일시둬으로 수요와 공급선이 맞춰졌더라도 길게 보면 결국 희소해지리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현세의 명품은 결국 브랜드의 가치가 가격을 결정하지만, 마녀들은 제품 자체를 보거든.”

“예술품 같은 느낌이군요.”

“맞아. 그래서 이 명부의 고객들도 모두 가능한 많은 향수를 구매하길 원해.

아멜리아가 빚을 모두 갚고 나면 한동안 향수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도 섞여 있을 거고. 그러니까…. 몇 달 열심히 하면 다 갚지 않을까?”“잠시만요. 몇 달이요…?”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아무리 파이가 작은 시장이라도 업계 탑을 먹는다면 충분히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사치에 관심 많은 마녀로 넘치는 게헨나에서 ‘조향’의 탑을 찍은 아멜리아가 목돈을 거머쥘 수 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그렇다고 해서 천억대에 달하는 빚을 몇 달 안에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은 도대체,

“아멜리아의 향수가 얼만지 궁금하구나?”

“네, 이렇게 궁금해지는 건 오랜만이네요.”

소피아는 품속에서 무엇인가 꺼내 들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예쁘고 파란 병이었다.

과거 아멜리아의 집무실 책상에 몇 개씩 올려져 있던 기억이 있다.

“이게 아멜리아가 종종 팔던 향수 0.5fl.oz야. 매일 뿌리면 두어 달 정도 쓰는데…. 죄다 경매에 부쳤던 물건이라 정가는 없지만 이 정도면 보통 금화 20파운드 내외로 거래됐어.”

“네?”

“이번에 내가 주문한 공병은 용량이 2.5fl.oz고 더군다나 주문제작이니 재료에 따라 웃돈을 얹는다면 음… 최소 100파운드 이상은 받아도 되지 않을까?”

의외로 게헨나 탈출은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집무실에서 향수를 훔쳐 밀수꾼에게 가져다줬으면 몰래 탈출시켜줬을지도….

“모르긴 해도 아멜리아가 향수 가게를 진작에 차렸으면 플로라 양장점만큼 돈을 긁어모았을걸?”

소피아의 여유로운 짐작과 함께 저 멀리 걸어 다니는 돈복사기 아멜리아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기분 탓이겠지만 금화가 발하는 찬란한 휘광 같은 것이 그녀의 어깨 뒤로 피어있다.

향수 한 병에 8,000만 원이라….

어디선가 샤론이 땅을 치며 억울해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2.

시우는 아멜리아에게 향수 제조를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비단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을 동정해 돕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멜리아가 막대한 배상금을 지게 된 원인에 자신이 깊게 관여하고 있음을 통감했기 때문

이다.

아멜리아는 시우와 더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소피아가 마련해준 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본래는 연구동에 딸린 작은 설비를 이용해 향수를 만들어오던 아멜리아지만 대규모 생산을 위해서는 생산시설이 필수적이다.매입과 건축비, 각종 제조기기의 제작은 모두 소피아가 대신 대금을 처리해주었다.

레노먼드 타운의 말쿠트 갤러리에서 디〈m가량 떨어져 있는 텅 빈 부지에 우뚝 선 공방의 규모를 본 시우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거의 축구장에 버금갈 정도로 넓은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법을 사용했을 것이고, 가건물 수준으로 구조가 단순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건물을 단기간에 세울 줄이야.

공방이라는 건 왠지 소소한 감상이 있는데, 이 건물은 단언컨데 공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그 밖에 감상이라면.

“이건…. 철거될 만하네요.”

“...그렇네요.”

이거 였다.

오직 빨리 짓기 위해서인지 외관이 썩 훌륭하지 않았다.

넓은 들판 위에 택배 물류 센터의 창고를 나무로 지으면 딱 저 모양일 것 같다.

참고로 소피아가 건물을 짓자마자 시청으로부터 철거 권고를 받았다고 한다.

단, 행정상 경고부터 실제 집행까지 3년의 유예기간이 있기에 허술한 게헨나 법을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우선 들어가 봐요.”

“그러죠.”

시우와 아멜리아는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건물에 발을 들이자마자 층을 나눈 것처럼 제법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넓은 건물이 사실상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으로 된 증류장치 스무 세트 정도와 구석에 쌓인 몇 가지 기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 밖에 쌓여 있는 나무 상자도 고작해야 수백 상자 정도다.

주어진 공간의 10분의 1 정도를 간신히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외관을 보고 공장화된 풍경을 예상했던 시우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향수를 여기서 만드는 건가요?”

아멜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기서는 에센셜 오일만 만들 거에요.”

“에센셜 오일…이 뭔가요?”

“향수의 향을 담당하는 향료요. 향수는 고순도 알코올에 여러 종류의 에센셜 오일을 배합해서 만드는 거죠.”

시우는 향수를 만드는데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냐는 의미의 질문이었는데.아멜리아는 다소 근본적인 대답을 하고는 덧붙였다.

“스승님이 남겨주신 것도 있지만, 많이 사용되는 오일은 부족할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아멜리아는 정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시우는 머지않아 ‘어째서 이만큼 넓은 실내공간이 필요한가?’에 대하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계십니까! 주문하신 물건 수령 부탁합니다!”

“주문?”

“장미가 왔나 봐요.”

아멜리아는 입구에 땀을 흘리며 서 있는 인부에게 서명을 해주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문밖을 내다본 시우는 덮개가 씌여진 마차 짐칸에 줄기를 떼어낸 붉은 장미꽃이 한가득 담겨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정도며 양이면 쌍둥이 저트백 정원에 핀 장미를 죄다 꺾어왔다해도 될 만큼 많다.

시우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장미향에 듬뿍 취해있을 무렵 눈에 보였다.

지평선 너머까지 쭉 이어진 수십대 분량의 마차 행렬이 공방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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