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58화 (458/917)

1.

제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모든 순간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업장 곳곳에서 폐장을 알리는 안내방송과 함께 CF송이 흘러나왔다.

열기구를 타고 주변을 조금 돌아다니자마자 10시가 된 것이다.

“결국 아쿠아리움은 못 갔네요.”

“괜찮아요.”

시우와 아멜리아는 다정한 연인처럼 손을 맞잡은 채 인파에 섞여 출구로 걸어나왔다.

차가운 밤 공기에도 사그러들지 않은 백화점 불빛이 두 사람의 등 뒤에서 배웅의 손길을 흔들었다.

입김을 가르며 맞잡은 손을 시우의 코트 주머니로 넣는다.

조금이나마 따뜻했다.

시우는 아멜리아가 전과 다른 의미로 붕 떠있는 것을 알아차린다.

마치 아주 행복한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처럼, 즐거움과 떠들썩함의 여운에 젖어 있는 옆얼굴.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달리 말을 하지도 않은 채 이따금 주머니 속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뿐.

그래서 시우는 아무렇지 않은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지만 구태여 단어를 꼽아 설명하자면 어색함이다.

그녀와 함께한 짧은 여행 내내 느꼈던 감정이긴 하지만 지금은 유독 선연히 느껴진다 해야 할지….원래 데이트라는 것은 하고 나면 사이가 돈독해지는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두 사람은 왔던 길을 거슬러 함께 호텔까지 돌아왔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귀가 따뜻한 실내 온기에 감각을 되찾는다.히터를 틀어놓고 간다는 선택은 정답이었다.

“시우.”

“네, 아멜리아 님.”

코트가 구겨지지 않게 옷걸이에 걸어놓고 있자 아멜리아가 30분 만에 입을 열었다.낯설고 어색한 침묵 속 썩 반가운 것이었다.

“고마워요.”

짧은 감사의 의 미였지만 무거운 말이었다.

얼마나 많은 의미가 그 안에 잠겨있을지 쉽사리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서로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되면 좋겠네요.”

2. 그 말에 자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아멜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조금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아멜리아는 규칙적인 수면 습관이 없는 마녀이다.

본디 영체라는 것이 어지간한 활동으로는 수면을 요구하지 않지만, 육체적, 정신적 혹은 마력적 소모가 일선을 넘어가면 회복을 위해 푹신한 침대와 따뜻한 베개가 있어야 한다.

일종의 정신적 리셋이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살생부를 이행하기 위해 현세를 떠돌 때도 지쳐 쓰러질 정도가 아니면 잠이 들지 않았다.그마저도 푹신한 침대가 아닌 거친 노상이었으며, 게헨나로 돌아와 재판이 끝날 때까지 잠을 잔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시우와 마지막 오해가 풀려나고 좋은 시간을 보내며 긴장이 완전히 풀려나간 까닭일까?

따뜻한 물로 샤워하던 아멜리아는 견습마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진한 피로를 느꼈다.

당장에라도 침대에 몸을 던져 머리를 눕히고 쿨쿨 자고 싶을 만큼.

시우와 함께한 오늘 하루는 너무도 행복했다.

비록 매서운 현세 음식의 맛이 혀를 괴롭게 하고, 예상치도 못했던 놀이기구의 전율에 진이 쏙 빠지기도 했지만 그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고, 마치 연인이라도 된 기분을 한껏 만끽하며 지낸 시간은 행복이라는 말로도 모두 표현하기 힘들었다.

이토록 기쁜데.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한데 울적함과 동시에 서글픔을 느껴진다.

그 이유를 꼽으면 몹시 모순된 말로 들리겠지만,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와 같은 방향으로 걸을 때.

그와 함께 식사할 때.

그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조차 아멜리아는 쌓여가는 무거움을 느꼈다.

부채 감

시우가 아무리 괜찮다고 하더라도 차마 떨쳐낼 수 없는 미안함이다.

그를 숙소에서 내쫓고 허름한 축사와 짚더미에 처박았다.

변변한 식사도 못 하고 딱딱한 빵과 멀건 죽을 먹는 시우에게 선의랍시고 케이크와 담배 따위를 건네주며 거드름을 피웠다.

대뜸 숲에서 사슴을 잡아오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고.

벌거벗은 그를 쌍둥이 앞에 세워 사정을 강요하기도 하고.

아멜리아가 손짓 하나로 끝낼 수 있는 청소를 몇 시간씩 잔업으로 강요하기도 했다.

시우가 아무리 괜찮다고 한들, 아멜리아가 아무리 앞으로 갚아가겠다고 다짐한들.지워지지 않는 과오는 무서울 정도로 선명하게 아멜리아의 귓가에 울린다.

‘그런 네게 행복할 자격이 있니?’라고.

아멜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다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멜리아 메리골드는 행복이 익숙하지 않다.

그에 반면 유리공예처럼 아름다운 행복이 산산이 조각날 때 얼마나 날카롭게 흩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눈앞에 약속된 행복이 있더라도 손을 뻗는 것에 주저하게 된다.

결국 무서울 뿐이다.

낯설고 생소한 감정 불쑥 찾아왔음에 단지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을 깨닫자 자조 어린 한숨이 옅게 감돌았다.

3.

아멜리아가 몸을 씻기 앞서 먼저 샤워를 끝냈던 시우는 뒤숭숭한 기분으로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겉으로는 내일 갈만한 곳을 검색하며 폰을 뒤적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도 집중 못 하는 중이다.

- 쏴아아아아

아멜리아가 몸을 씻는 물소리가 굉장히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이거 원….”

일단 오늘 아침에 이르러 진정으로 화해했다, 라고 여기고 있다.

키스야 일전에도 나눴지만, 결정적으로 아멜리아가 지닌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가라앉아있던 속내를 텄으니.그뿐이랴? 정말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함께 데이트도 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 다음 단계는?’라고 묻는다면 답을 얼버무리고 싶어지는 것이다.확실한 대답을 줄 자신이 없었으니까.

아멜리아와 시우는 과거에도 ‘연인’이었던 적이 없다.

키스한다 + 손을 잡고 데이트한다 + 함께 호텔에서 투숙한다 = ?.

뒤에 이어질 정답이 뻔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상대가 아멜리아여서 뻔하지 않은 난해한 방정식이 된다.

물론, 이렇게 물소리를 들으며 싱숭생숭하다는 것 자체가 기대감의 방증이겠지.남자인 이상 아멜리아의 미모를 보면 누구라도 욕심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시우는 그 기대감을 차마 아멜리아에게 내비칠 수 없었다.

우선 아멜리아말고도 샤론, 쌍둥이, 스승님이 있다. 더군다나 예소드 백작과 약속된 관계도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아멜리아에게 분명히 말하였고 그녀도 큰 대꾸를 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멜리아는 그 이후로 부자연스러울 만큼 시우의 ‘다른 연인’에 대해 입에 올린 적 없었기 때문이다.

“됐다.”

그냥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다른 이들은 어찌저찌 난혼에 가까운 시우의 여성편력을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멜리아도 받아들이길 기대하는 건 그녀에게 크나큰 실례다.

아멜리아와 마음의 보폭을 맞춰가는 것이 그나마 최선책이라고 되새기고 있자니.

-벌컥!

욕실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쓴웃음이 올라왔다.

신경쓰지 말자느니 미련을 버리자느니 해놓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쪽으로 시선이 휙 돌아간 것이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알몸 혹은 가운을 걸친 차림새는 아니었다.

대신 오랜만에 보는 아멜리아의 잠옷차림이었다.

레이스 장식이 듬뿍 들어간 하늘하늘한 원피스형 드레스는 사람보다 인형에게 어울릴 것 같다.그러나 패션의 완성은 결국 외모라고 아멜리아는 그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화해냈다.

문득 그녀가 인터넷 쇼핑몰의 모델로 일한다면 현실을 깨달은 고객들의 환불요청이 빗발치지 않을까, 하는 실 없는 망상이 떠올랐다.

이런 바보 같은 망상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다시 찾아온 어색함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안에서 물기를 말리고 온 듯 뽀송한 머리카락이었지만, 온수의 열기에 달군 두 뺨까지는 숨길 수 없다.

아멜리아는 시우를 힐끗 바라보더니 호텔 전체 조명을 껐다.

이제는 스스로 불도 끌 줄 아는 아멜리아다.

다만 침대맡에 놓인 스탠드는 별도의 스위치가 달렸기 때문에 어둑한 객실을 은은히 밝혀주었다.

아멜리아가 시우의 침대로 다가온다.

새삼 아직 놓지 못한 미련의 증거라는 듯 심장이 뛴다.

아멜리아는 시우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시우의 빈 옆자리에 앉았다.

“안아도… 될까요?”

어스름한 조명 속 아멜리아는 가녀린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겨드랑이 밑을 파고드는 아멜리아의 팔.

커다란 곰 인형처럼 껴안긴 시우의 가슴에 그녀의 뺨이 얹어진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시끄럽진 않을까 우려가 되는 와중에 얇은 옷감 아래 그녀의 몸은 놀랄 만치 부드러웠다.

“내일 게헨나로 돌아가고 싶어요.”

"네? 여행은요?”

“먼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이 있으니까요.”시우로서는 조금 더 그녀에게 현세 구경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당사자가 저렇게 말하는데 어쩌겠는가.예상보다 훨씬 빨리 끝난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응석을 부리듯 시우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이번 여행, 이곳저곳 구경시켜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저도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시우가 보여준 풍경은.”

아멜리아의 목소리에는 잠들기 직전 나른한 기색이 가득했다.

오랜 방황 끝에 안식처를 찾은 새처럼 스벡스백 작게 숨을 쉰다.

시우는 주춤주춤 팔을 뻗어 아멜리아의 둥근 뒤통수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이 정도는 굳이 허락을 받지 않아도 괜찮겠지?

아멜리아는 움찔 몸을 떨더니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춰온다.

“욕심이지만….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뭔가요?”

“게헨나에 돌아가서도…. 종종 이렇게 안아줄 수 있나요?”물론 아멜리아의 ‘안아주세요’는 명백히 다른, 그러니까 굉장히 플라토닉한 의미겠지만 사춘기 남고생의 고민 속에서 전전긍긍하던 시우로서는 무척이나야릇하게 들렸다.

심지어 완전히 노곤하게 이완된 아멜리아의 숨소리와 목소리는 어딘가 요염한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당연히 그러겠습니다.

그 덕에 대답이 늦어졌지만, 아멜리아는 그 딜레이를 눈치채지 못했다.다행이라는 듯 고마워요, 고마워요 시우…. 라고 몇 번이나 반복해 말할 뿐.

그말을 끝으로 아멜리아의 숨은 굉장히 고르게 변했다.

아무리 체격 차가 날지라도 베개보다 푹신하진 않을 텐데.

아멜리아는 천상의 침구라도 되듯 시우의 품에 안기자마자 꿈나라로 떠나버린 것이다.

“아멜리아 님.”

U 99

“아멜리아 님.”

두어번 그녀가 정말 자는지 확인해본 시우는 그제야 푸후 한숨을 쉬었다.

“돌겠네….”

아래를 곤히 잠든 아멜리아의 얼굴이 보인다.

이대로 잘 수는 없다

안 그래: 아5罰누가 붙는 순간 자칫 체취를 맡을까 신중을 기해야 했었다.

잠결에 들이마시면 어떤 이상 현상이 발생할지 더더욱 예측 불가이다.

그래도 이렇게 잘 자고 있는데 방해하는 것도 뭐하고, 떼어놓기도 뭐하고-.

시우는 아멜리아의 머리가 떨어지지 않게 제대로 받쳐 든 채 말똥말똥 천장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긴 부드럽네….”외설적인 의미 없이 어지간한 쿠션보다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안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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