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우 한 번 더.
시우 한 번 더 타볼게요.
시우 뭔가 알 것 같아요.
시우 마지막으로….
회전목마라는 게 그렇게 재밌는 놀이기구는 아닐 것이다.
연인들에게는 낭만적인 이벤트용, 어린아이들에게는 동심 주유소, 엄마 아빠에게는 자식들과 가볍게 탈 수 있는 무난한 어트랙션일텐데.아멜리아는 이 회전목마가 퍽 마음에 든 것 같았다.
탑승시간이 끝날 때마다 쪼르륵 시우와 함께 대기줄의 마지막으로 돌아갔으니 말이다.
그렇게 내리 다섯 번 회전목마를 타는 기염을 토한 아멜리아.
처음엔 쭈뼛쭈뼛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던 그녀는 마지막 탑승쯤에는 승마라도 하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우아한 기품을 뽐내며 코스를 완주했다.그리고는 드레스 자락을 톡톡 털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양 자뭇 의연하게 시우 옆에 섰다.
“별 거 없네요.”
털어 내듯 무심한 말투였다
흥분해;발갛게 상기된 볼이나 아직 빛이 남아있는 눈동자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속아 넘어… 갔을 리가 있나.수상할 정도로 좋아해서 신기할 정도다.
“현세 사람들이 스릴을 즐기는 이유도 알 것 같아요.”
“옛날부터 인기 있는 놀이기구이긴 합니다.”
“다른 것도 극복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만만해진 아멜리아는 주먹을 불끈 쥔 채 선언했다.
놀이기구를 극복하면서까지 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한데 귀여우니 넘어가자.
“좋습니다. 그럼 다른 곳도 가 볼까요? 에스코트할게요.”
아멜리아는 시우가 건넨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춤을 청하는 신사에게 응하는 레이디처럼 살포시 손을 얹는 아멜리아.
“부탁할게요.”
다정하게 손을 잡고 놀이동산을 누비기 시작한 두 사람.
그렇게 아멜리아와 시우의 천방지축 놀이기구 정복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머지않아 깨닫게 된다.
회전목마 따위는 아주 기초 중의 기초에 불가했다는 것을.
잠시후.
“괘, 괜찮으세요?”
호기롭게 모든 놀이기구를 정복하고자 나선 아멜리아.
그녀는 창백하게 변한 얼굴로 넋이 나간 채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두 번째 스텝으로 택한 어트랙션이 좀 전부터 실내를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니던 롤러코스터였기 때문이다.
뭔가 쎄함을 느낀 시우가 몇 차례 만류했음에도 굳이 굳이 줄을 서 탑승한 아멜리아는 그 방만함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탁 트여 있는 공터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실내의 좁은 공간을 아슬아슬하게 누빈다는 점은 이 롤러코스터가 굳건한 인기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이
겠지만...
0;멜리아의 심장에는 지극한 악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되었겠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탑승했던 아멜리아가 다시 땅을 밟았을 무렵, 어찌나 지쳐 보이는지 그녀의 주변만 무채색으로 보일 지경이다.근처 자판기에서 탄산수를 뽑아온 시우가 뚜껑을 따 건네주자 겨우겨우 받아마셨다.
그 정도로 무서웠나?
솔직히 시우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사지를 몇 번이나 누벼왔던 경험 탓인지 아니면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능력 탓인지 자전거를 타는 정도의 감회를 느꼈을 뿐이다.아멜리아도 일단 마녀이고 전투 경험도 있으니 괜찮겠구나 싶어서 말리다 말았던 건데.
“많이 힘드셨나요?”
시우가 다가가자마자 무조건반사 반응을 보이듯 시우의 팔과 소매를 붙잡는 아멜리아.꼭 천둥 치는 날 어미 품을 파고드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다.
“서, 설마…. 거기서 돌 줄은 몰랐어요…. 돌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쇳덩이잖아요? 위험하잖아요?”
아그 부분이구나.
시우는 알아차렸다.
롤러코스터의 꽃 360도 회전구간.
다만 이 기구는 실내에 위치한다는 장점을 살려 한가지 조미료가 더해진다.
360도를 회전하는 레일의 중앙을 관통하는 다리 겸 통로가 있는 것이다.
그 부분에서만큼은 시우도 찔끔했던 만큼 아멜리아가 학을 떼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아무튼 롤러코스트 vs 아멜리아의 대결은 아멜리아의 참패로 끝났고, 저런 상태의 그녀를 계속 끌고 다니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어 제안했다.진이 빠진 모양새고 아멜리아는 애초에 쌍둥이처럼 무한동력을 지닌 활달한 타입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멜리아는 벌떡 일어서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직 할 수 있어요.”
“또 타시게요?”
“아니요!”
일단 격한 부정.
다행히 롤러코스터에 계속 도전한다는 돈키호테의 심정은 아닌 것 같았다.
쭈뼛쭈뼛 다가온 아멜리아는 시우의 손을 잡았다.
“더 돌아다니고 싶어요….”
그렇게 말한 아멜리아는 아주 조그맣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우랑’을 덧붙였다.
2.
뜨거운 맛을 본 아멜리아는 어트랙션 쪽은 얼씬도 않고 쳐다보지도 않은 채 놀이동산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솜 같아요 ”
“그래서 이름도 솜사탕이에요.”
“음…. 맛은 설탕 같아요.”
“설탕만 써서 만들거든요.”
“신기한데…. 손이 끈적거려요.”
“그게 단점이죠.”
솜사탕이라는 (아멜리아 입장에서)혁신적인 디저트를 맛보여 주었다.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딱히 맛있지도 않고 심지어 아멜리아의 말처럼 손이 끈적끈적하게 변하는데도.
이상하게 놀이동산이나 동물원 등지에서 커플들이 들고 다니던 이유가 있었다.
시우도 홀리듯 사버렸으니 말이다.
이게 문화적 세뇌라는 걸까?
“이건….”
“스티커 사진기에요. 찍고 나서 즉석에서 수정할 수도 있고 꾸밀 수도 있어요.”
“시우 눈이 커졌어요.”
“흠…. 보정이 좀 과하게 들어가긴 하네요.”
스티커 사진기에 들어가 함께 커플 투샷을 찍기도 했다.
사실 태어나서 처음 찍어보는 건데 어찌나 보정이 많이 들어가는지 안 그래도 커다란 아멜리아의 눈이 거의 인형처럼 보일 지경이 되었다.
“이런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거 아닌가요?”
“저기 보세요, 다들 하고 다니잖아요.”
“그래도….”
“에이, 그러지 마시고. 어울릴 테니까 한 번 써보세요.”
“오늘만이에요….”
곳곳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조악한 플라스틱 머리띠를 사기도 했다.
참고로 시우는 위에 곰 인형이 얹어진 것, 아멜리아는 하트 두 개가 귀처럼 뻗어있는 것.
처음에는 부끄러워하며 사양하던 아멜리아도 시우의 채근에 이기지 못해 어색하게 머리띠를 착용했다.
조금은 아쉬운 순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걸 먼저 사고 스티커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평상시라면 절대로 이런 것을 쓰지 않을 것 같은 아멜리아에게 굉장히 잘 어울렸는데 말이다.
그렇게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폐장시간이 가까워졌다.
시우는 손을 가리켜 불빛을 휘감은 채 천장을 돌아다니는 놀이기구를 가리켰다.
“아멜리아 님, 저거 한 번 어떠세요?”
머리에는 머리띠, 손으로는 시우의 손을 꼭 잡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던 아멜리아.그녀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저, 이제 현세 사람들의 스릴을 탐구하는 건…. 그만하고 싶어요.”
아마 롤러코스터는 놀이기구에 대해 꽤 커다란 트라우마를 선사해 준 모양이다.
그걸 이해하고 있는 만큼 시우가 아멜리아와 함께 타려 하는 어트랙션은 스피드와 스릴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무서운 건 아니니까요.”
“...정말요?”
이미 잡은 손을 더 세게 꾹 잡으며 물어오는 아멜리아.
마치 부모를 신뢰하는 어린아이 같다.
실제로 아멜리아의 여린 심정은 어린 소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이죠.”
“그럼 탈래요.”
“기대하셔도 좋을겁니다.”
그렇게 정해진 마지막 코스는 돔 천장에 두둥실 떠다니던 열기구였다.
말이 열기구지 강철와이어로 천장의 트랙과 열기구 모형을 연결한, 말하자면 케이블카나 다름없다.수평대관람차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이 넓은 놀이동산의 실내를 한눈에, 여유롭게 내려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놀이기구였다.
대기하는 사람이 없어 단둘이 탑승하게 된 시우와 아멜리아.
잠깐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기중기가 열기구를 잡아끈다.
놀이기구 특유의 진동과 떨림에 움츠러드는 그녀의 어깨를 시우는 자연스럽게 감싸 안아 주었다.
“아….”
바닥에서 벗어나 높다란 허공에 열기구가 매달렸을 때.
이제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것이라 자부하던 아멜리아도 얕게 경탄을 내뱉고 말았다.
시우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높은 곳에서 야경을 보면 더 예쁜 것처럼 놀이동산을 위에서 봐도 예쁠 것으로 생각해서 탔을 뿐.이 정도로 볼만하리 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해가 완전히 저문 놀이동산은 마치 계절을 바꾸듯 곳곳의 조명을 피워올리며 화려함을 뽐냈다.
롤러코스터 레일을 따라 점등된 몽환적인 네온사인.
아멜리아가 가장 즐거워했던 회전목마는 정말 보석으로 만든 오르골이 된 것처럼 반짝였고, 아직 철거되지 않고 남아있는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전구가형형색색으로 빛났다.
뻥 뚫린 중앙 공간으로 비쳐 보이는 아이스링크와 즐거운 듯 내부를 노니는 사람들.
이 놀이동산의 테마는 판타지 세계다.
실제 판타지 세계 게헨나의 실거주자였던 아멜리아에게 이 테밍은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맞은 편 벽을 장식한 절벽도 스티로폼에 스프레이를 칠한 물건일 뿐이고, 뾰족지붕을 세운 성채나 집 따위도 조금만 자세히 들여보면 어색함이 그윽하게
묻어 나온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모든 풍경을 마음에 새기겠다는 것처럼 숨을 죽인 채 아래를 내려보았다.
꿈을 꾸는 듯 반짝이는 그녀의 옆 모습에 불빛이 반사됐다.
점점 강하게 시우의 손을 쥐며 지금 이 순간을 죽는 그날까지 기억하겠노라 말하듯.
아무 말 없이 한참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