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풋풋한 키스 이후 자연스럽게 떨어진 두 사람.
아니, 자연스럽다고 말하긴 어렵다.
아멜리아가 갑자기 깜짝 놀라며 시우를 밀치다시피 몸을 빼냈으니 말이다.
“미, 미안해요….”
제 행동에 놀라기라도 한듯 손을 바라보고 시우를 바라보고 정신이 없는 아멜리아.
그녀의 하얀 얼굴은 벌겋게 변해 있었고, 제자리에 가만 서 있지 못하고 좌우에서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휘청였다.꼭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제가 뭔가 실수했나요?”
“아니요 절대요! 좋았어요! 좋았는데….”
시우가 걱정스레 묻자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고개를 동시에 흔드는 아멜리아.
저 이상으로 확실한 부정을 표현하는 제스쳐는 없을 거 같으면서도, 그녀가 저렇게 큰 몸짓을 사용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신선했다.
아멜리아는 뭔가 시우에게 설명하려다 포기했는지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푹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보는 아멜리아의 정수리.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더없이 얇고 화사한 금발 사이로 뾰족하게 솟은 귀가 벌겋게 익어 있다.
하긴 기억 속 아멜리아는 성적인 지식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별개로 굉장히 정숙한 행동을 유지해왔다.
과거로 돌아가 관리인 시절 시우에게 ‘너 미래에 아멜리아랑 키스한다?’라고 말해도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급작스러운 진도는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화해를 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라면 말이다.
“뭔가 분위기를 좀 탄 것 같네요….”
“시우 잘못이 아니에요. 저야말로 갑자기 밀쳐서 미안해요.”
두 사람은 마주 본 채 공손히 고개 숙여 서로에게 사과했다.
고개를 들자 아멜리아는 제 머리를 연신 손가락으로 빗으며 어색함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꽤 여성편력이 쌓였다고 자조하는 편인데.
막 첫 키스를 끝낸 것처럼 풋풋한 아멜리아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머쓱해졌다.
“큼…. 그럼, 아침이나 때울까요?”
“좋아요…!”
분위기 전환이라도 할 겸 간단하게 운을 떼자 아멜리아도 퍼득 달려들었다.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말씀 주세요. 여기 호텔 레스토랑이 맛있다네요.”아멜리아는 거의 지체도 없이 답했다.
“김치찜.”
“네?”
아멜리아는 게헨나 토박이고 게헨나 자체가 지극히 서양 식단을 갖추고 있는바 당연히 서구적인 음식이 나올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김치찜이라니.
“시우의 고향음식이잖아요.”
“아.”
꽤 멀게 느껴지는 2차 소년기 중, 별 생각 없이 아멜리아에게 부탁한 적이 있었지.
함께 장을 보며 재료를 사 왔고 아멜리아가 주방에서 분발해 주었지만 결과물은 썩 좋지 못했다.
시우도 숨긴답시고 꾸역꾸역 먹었다는 것을 아멜리아가 눈치챘던 것일지도 모른다.
“좋네요.
그때의 일을 아직도 기억해주는 아멜리아가 고마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2.
근처 맛있기로 소문난 김치찜 집을 검색해 도보로 이동하는 중 나름대로 열심히 아멜리아에게 현세에 관해 알려주었다.
시우도 마녀의 도시라는 터무니 없는 곳에 끌려가 온갖 신기한 것을 봐왔지만, 아멜리아는 시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문화충격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게. 게헨나 전반의 분위기는 ‘과거’의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을 닮은 아카데미가 있건, 판타지 게임의 마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시장이 있건 어쨌거나 간접적으로 접해볼 기회라도 있던 것이다.
하지만 현세는 어떠한가?
아멜리아 입장에서 이곳은 완벽한 미래다.
어제 불안해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 더욱 세심하게 설명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저기는 국회의사당이라고 하는데요. 못 생겼죠? 그런데 저래 봬도 중심 관청이에요. 한국은 게헨나와는 다르게 삼권 분립이라고 행정, 입법, 사법이 분리되어 돌아가거든요.”
“…네.”
시우는 강변에 우뚝 서 야경을 망치던 건축학도의 반면교사가 될법한 건물을 소개했다.여의도를 투어 하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아, 그리고 저건 버스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자동차처럼 화석 연료를 사용해요. 내연기관을 활용한 마차인 거죠. 근데 크기가 더 크고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지정된 코스를 돌면서 시민의 통행을 도와요. 물론 운임을 내야하고요.”
“…네.”
그렇게 아멜리아의 눈높이에 맞춰 그럴듯한 예시를 들어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했는데.
“아멜리아 님.”
“…네.”
뭔가 아멜리아의 상태가 좋지 않다.
대답하긴 하는데 넋이 반쯤 나간듯한 목소리.
아까까지는 그저 정신이 팔려서 그런 줄로 알았다.
시우도 학술회에서 저명한 수학자의 지평을 넓히는 새로운 논문을 들으면 비슷한 상태가 되곤 했으니까.
하지만아니다.
명백히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멜리아 님.
“…네.”
맹해진 아멜리아란 꽤 진귀한 상품이다.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아멜리아 님, 종종 홍차를 코로도 드시나요?”
“아니요.”
“아, 듣고 계셨네요.”
가벼운 농담을 던져보았지만, 아멜리아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는거죠?’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우를 올려볼 뿐이었다.나름 농담조로 수습해보려고 했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멜리아가 활짝 웃는 모습은 몇 번 본 기억이 없다.
언제나 가면 같은 무표정이 베이스랄까.
미소를 지을 때도 입꼬리가 살짝 미동하는 것 외에는 영 표정변화가 없으니….
이쯤 되면 로맨스 만화처럼 아멜리아를 웃게 하자 같은 걸 목표로 삼아도 괜찮을 정도다.
“시우는 홍차를 코로 먹나요?”
“그렇진 않고…. 아멜리아 님이 한눈파시는 것 같아서 장난을 좀….”
“장난…?”
“기분상하셨으면 죄송해요.”
“아니에요. 기분 나쁠 일도 아닌걸요.”
이후 다시 목적지로 걷는 아멜리아와 시우.
사실 아멜리아가 한눈팔고 있다는 시우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의 난데없는 말이 정신을 일깨우기 전까지 아멜리아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만개한 장미꽃밭에 휘몰아치는 허리케인이었다.
키스의 여운이 남아있는 까닭이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혀끝에 뜨겁고 말캉한 감촉이, 허리를 휘감던 그의 두툼한 손이 느껴진다.
허리에 수천 개의 풍선이 달려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지던 현세의 거리조차 꿈속을 거니는 것처럼 몽환적이고 질서정연하게 깔린 단단한 벽돌마저 말랑말랑하게 느껴지는 이 기분.자칫 방심하면 리듬을 타며 경박하게 걸을 만큼 기쁘다.
“도착했습니다.
이 김치찜 집은 블로그에서 찾은 것으로 80년 전통을 자랑한다고 한다.
최근 건물 리모델링을 끝내 꽤 깔끔한 구조였다.
아무리 박영의 부적이 사용자 주위의 인상과 이미지를 흐릿하게 해준다지만 오르골처럼 완벽한 차단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머리 벗겨진 과장 부장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먹을 것 같은 식당에 생전 처음보는 금발미녀가 등장했으니 자연스럽게 소동이 일었다.다행스럽게도 제 역할을 해준 부적과 칸막이 덕에 점원이 주문을 받아간 시점부터 금방 소란이 가라앉았지만 말이다.
한편, 이쯤 되자 혼자 구름 나라를 걷고 있던 아멜리아도 조금 진정이 되었다.
코끝을 찌르는 자극적인 음식 냄새와 어수선한 식당 분위기에 조금 진정이 된 것이다.
“아멜리아 님, 그나저나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요?”
아멜리아의 눈치를 살피던 시우가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새로이 부과된 벌금과 배상금은 억 앞에 네 자리 수의 숫자가 앞에 붙는 금액으로 그야말로 억억억억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아무리 지금 이 순간이 만족스럽고 즐겁다고 해도 10년 안에 아멜리아가 해당 금액을 가납하지 못한다면 감금형에 이어 추방형이라는 끔찍한 형벌이 기다리게 된다.
“현실적인 이야기요?”
극적인 화해와 달콤한 키스 이후에 현실적인 이야기라….
설마 결혼에 관한 이야기일까?
실로 소녀소녀한 행복감에 젖은 아멜리아는 세르토닌이 왕성히 분비되는 하이 상태였다.
따라서 다소 엉뚱한 결론을 도출하고 자세를 반듯이 한 채 진지한 눈빛으로 시우를 보았다.
“준비됐어요.”
이상한 기백이 느껴지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주춤했던 시우.준비했던 말을 꺼낸다.
“다름이 아니라 아무래도 적지 않은 금액의 벌금이잖아요. 저도 힘이 되고 싶기도 하고….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얘기군요.”
시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상황을 파악한 아멜리아.
한껏 들떴던 기대감이 바람이 빠지는 러버덕처럼 쪼그라든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었다.
잠깐만 방심해도 날아가 버릴 것 같던 이성이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시우가 도와줄 필요는 없어요. 제가 벌인 일이니까요.”
“제가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큰 도움은 안 될지라도 돕고 싶어요.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먼저 말씀만이라도 해주세요.”
뜻밖의 시우의 진지한 눈길.
그저 겉치레가 아니라 진심으로 돕고자 하는 것이 느껴져 아멜리아는 또 한 번 기쁘다.그렇게 대략적인 상황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르스 마그나 타운에 있던 메리골드 저택을 처분하기로 했어요. 인근 사유지까지 전부 판다면 8000파운드 정도 받을 수 있다고 해요.”
그 밖에 상속받은 유산을 총망라하자면.
금고 은행에 보관 중인 현금 5천 파운드.
마법 용품 및 아티팩트 중 메리골드의 자성 마법과 관련이 없는 물품 약 1만 파운드.
각종 예술품 2000파운드.
타로 타운 북동쪽의 목초지 1000파운드.
그 외 게헨나 군데군데 존재하는 별장을 합쳐 4,000파운드.
시우는 아멜리아의 말을 듣는 대로 머릿속 계산기를 두들겼다.
아멜리아가 마련해야 하는 벌금과 배상금은 총 21만 2,000파운드.
그녀가 유산을 처분해 모을 전재산은 대략 3만 파운드, 한화로 약 240억.
남은 돈은 자투리를 떼어내도 18만 파운드, 한화로 약 1,440억이라는 무지막지한 금액이 된다.
아직도 자릿수가 그대로다.
==iW=2F 타운어' 거주하는 마녀의 평균 재산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마법 연구에는 크게 지장이 없는 수준이고 평생을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돈이라지만 천문학적인 빚 앞에는 초라해지는 것이다.
시우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방법이 전혀 없지야 않겠지만, 고생길이 훤하게 열린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처지였던 샤론은 10년간 13억을 벌어 원금 1억을 갚았다는데….
그나마 벌금에는 이자가 붙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 안 하기가…. 힘든데요?”
“향수를 팔기로 했거든요. 필요한 재료와 기재를 주문해놨으니…. 하루 뒤에는 충분히 작업에 들어갈 수 있을 거에요.”
아멜리아의 향수.
게헨나의 돈 많은 마녀 사이에서도 없어서 못 구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걸로 빚을 다 갚을 수 있을런지….
시우가 알쏭달쏭해하는 사이 주문했던 김치찜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