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54화 (454/917)

1.

6시 이른 아침 상쾌한 기상.

어색하기 그지없던 분위기 속 어느새 잠들었던 시우는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났다.

낯선 눈앞의 풍경을 인식함과 동시에 지난밤 일들이 회상록처럼 흘러간다.

아멜리아와 뻘쭘한 동침.

대화다운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각기 침대에 누워있던 상황이었는데.

“...응?”

고개를 돌려보자 옆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아멜리아가 없다.

호텔에 처음 들어섰을 때랑 똑같이 정갈하게 정리된 침구류만 보일 뿐이다.

시우는 놀랐다.

설마 아멜리아가 이대로 떠나버렸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멜리아 님?”

시우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때, 침실 바로 옆에 딸려있는 욕실 문이 열린다.

어제 입었던 하얀 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있는 아멜리아였다.

언제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단정하게 빗어져 있는 금발도, 요정을 연상시키는 깨끗한 눈동자도 여느 때 같다.다행히 밤새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우려는 기우에 그친 듯하다.

“잘 주무셨어요?”

남몰래 속을 쓸어내리며 아침 인사를 건네자 아멜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씻고 계셨나요?”

욕실 안에 문을 하나 더 열면 화장실이 있긴 한데 아멜리아는 마녀기에 굳이 갈 일이 없다.그렇다고 씻었다기에는 머리카락도 뽀송뽀송하고… .

혹시 현세의 욕실이 신기해 기웃기웃 구경하던 것은 아닐까?

어제 그녀의 행동을 살펴보면 충분히 그럴만했다.

“아니요, 시우 잠시만 와보세요.”

아멜리아는 시우의 소매를 슬쩍 끌어 욕실로 데려갔다.

그 순간 약간의 수증기와 함께 마음이 차분해지는 라벤더향이 코끝을 가득 채운다.

욕조에는 살짝 보랏빛으로 변한 따뜻한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게다가 목욕 용품을 올려놓을 수 있는 욕조 선반에는 와인과 잔, 그리고 포장을 뜯지 않은 담배가 놓여있다.목욕하던 건가?

“아침 목욕물을 준비했어요.”

“목욕물이요?”

“시우는 아침에 목욕하는 거 좋아하니까요.”

시우는 아멜리아를 보았다.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진 얼굴은 힐끗거리며 눈동자와 함께 칭찬을 기대하는 듯했다.

그나저나 혹시 이거….

시우는 그제야 일련의 사건이 연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태여 짐가방을 스스로 들려 했던 아멜리아, 숙소를 예약하며 고집스레 제 손으로 하려던 아멜리아.

아침에 먼저 일어나 목욕물을 준비하는 아멜리아까지.

마치 시종 같은 행동이었다.

그 예측에 확신을 더하는 아멜리아의 추가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온 아멜리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목욕 시중이 필요하면 말해주세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건 그거다.

물론 보살피고자 하는 마음이나 사랑이 조금도 없다고 보긴 힘들지만 과거의 속죄에 가깝다.

예전 아멜리아가 턱 끝으로 시우를 부려 먹었던 것처럼, 아멜리아는 시우에게 예전 자신이 받았던 것을 돌려주려는 것이다.

미안하기 때문에, 면목이 없으므로.

아멜리아 나름대로 그것을 갚아 나가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시우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옆을 스쳐 지나간 아멜리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사고 과실이 100대 0인 것도 아닌데.

괜히 아멜리아만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되는 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모처럼 준비해 준 것이다.

시우는 옷을 벗어 대충 걸쳐 놓고 욕조 안에 들어갔다.

딱 좋을 정도로 따뜻한 물과, 무엇보다도 아멜리아 특제 입욕제의 향기는 제머나이 욕실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욕조조차 호화욕장으로 만들어내는 듯한착각이 들었다.

여기에 와인과 담배 한 대라면

“잠깐, 담배?”호텔은 실내 금연이 기본 베이스다. 담배를 피우면 체크인 때 예치해두었던 20만 원을 벌금으로 차감해버린다.

“아멜리아님!”시우는 다급히 아멜리아를 불렀다.

문 앞에서 들리는 깜짝 놀라는 인기척.

“도와드릴 게 있나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호텔은 금연입니다!”

잠깐 정적.

“당연히 알고 있었어요.”

뭔가 부시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박자쯤 늦은 아멜리아의 대답이 들려왔다.

2.

“아멜리아 님. 여태 이러고 계셨어요?”

목욕을 끝내고 나온 시우가 발견한 것은 다소곳한 자세로 욕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아멜리아였다.정말 시종이라도 된 것처럼 시우가 유유자적 목욕하는 내내 앞에서 이러고 있던 것이다.

“네.”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보여주기식, 속죄를 위한 자기만족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아멜리아는 인간관계에서 그런 잔머리를 굴릴 능력이 안된다.순전히 진심으로, 시우를 위한답시고 이렇게하는 것이리라.

관리인 시절 그녀 밑에서 시달리던 건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과거에 얽매인 건 더는 원하지 않았다.

부족함이 불러왔던 과거의 잘못이 앞으로의 관계를 방해한다면 차라리 없던 것으로 치고 싶었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러지 마세요.”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겠지.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변한 어조에 아멜리아는 당황한 듯이 허둥거렸다.

왜 시우의 얼굴이 굳어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뭔가 실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짙은 우려가 고스란히 나타난다.

시우는 아멜리아의 손목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접시를 깨뜨린 아이처럼 겁에 질린 아멜리아를 그저 껴안았다.

시우의 품에 안긴 아멜리아는 아무런 저항 없이 몸을 맡겼다.

“말씀드렸잖아요. 정말로 괜찮다고, 이제 미워하지도 않고 전부 이해한다고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어요. 시우가 힘들었던 만큼…. 저도 시우한테 해주고 싶어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가녀린 목소리로 답하는 아멜리아.

답답했다.

아멜리아에게 화난 것이 아니라 여태 거리감 핑계를 대며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답답했다.

“정말 괜찮으니 하지 마세요.”

“할거에요.”

“하지 마세요.”

“할거에요.”

정작 당사자는 굉장히 심각하지만, 대사만 듣자면 굉장히 유치한 실랑이.

서로가 켕기는 게 있는 상황이 그 원인인지라 이대로는 답이 없겠구나 싶다.

어제 와인을 마시면서 이런 대화를 나눠야 했지 않을까?

뒤늦게나마 서로의 입장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여기서 깔끔하게 정리해요.”

“정리…?”

“먼저 제 생각부터 말씀드릴게요. 아멜리아 님이 이렇게 행동하시는 건 도리어 불편합니다. 저라고 뭐 잘한 일만 있다고 이렇게 사과를 받겠어요.”

“제가 더 잘못했잖아요. 가만히 있던 시우를 시달리게 한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시우에게 용서받아 기만하려고….”

기만?

그건 아니다.

“기만이 아니었잖아요. 아멜리아 님은 저한테 잘해주려고 하셨을 뿐인 거,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아멜리아가 누구보다 시우를 소중히 생각하고, 과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그걸 만회하고자 소년기 시우에게 잘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기적인 욕심으로 보였던 그녀의 행동이 타산 없는 호의라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다.

“오히려 제가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죄송하게 생각해야죠. 차라리 그때 제가 조금 진정하고 대화를 나눴다면 아멜리아 님이 혼자 고생하실 필요도 없었을거에요.”

“그건 아니에요…!”

아멜리아는 그 말을 듣고 휙 시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시우는 분명 모진 말을 내뱉고 아멜리아에게 떠났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쪽지를 남겨두었다

너무 심;1 해구 미안1;다고, 언제 한번 머리를 식힌 채 대화하고 싶다는 용의가 담긴 쪽지를 말이다.

속삭임의 마녀가 그것을 조작하고 내용을 바꿔칠 때까지 몰랐던 것은 순전히 나약한 자신이 겁에 질려 확인을 미뤘기 때문이다.

“시우는 쪽지를 남겼잖아요…. 바보처럼 제가 그걸 안 읽고 혼자 헛고생한 거잖아요….”

“그건 아닙니다! 더군다나 헛고생도 아니었어요!”

아멜리아가 설마 설마 그 시점까지 쪽지를 읽지 않았으리라곤 예상 못 했다.

그녀가 어떤 과거와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지 알고 있지 못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정말 대화하고자 했으면 현세로 돌아오기 전에도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다.

단지 그녀의 얼굴이 보기 힘들다는, 껄끄럽다는 이유로 수동적인 대화 의지만을 전달한 까닭에 아멜리아는 착각과 불안함 속에서 현세로 향해야 했다.그것도 시우가 모르는, 케테르와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목숨을 건 전투를 넘겨왔다.

얼마만인지 모른다.

이렇게 서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부딪친 것이.

“더군다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진짜 부담스럽다니까요!”“왜 부담스러운데요! 제가 더 잘못했다고 아까부터 말하고 있잖아요!”

두 사람은 거의 쉴새 없이 말을 쏟아내며, 덩어리처럼 뭉쳐있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 조용한 아멜리아조차 빠르게 말을 이어가며 흡사 연인 간의 싸움처럼 뾰족한 목소리와 높은 어조로 외쳤다.

비록 그 내용은 내가 잘못이 더 크오, 아니오 다 불초의 소행이오 하는 싸움이긴 했지만 시우도 진지했고 아멜리아도 진지했다.

숨이 가쁠 정도로 언성을 높이며 말을 주고받던 와중 먼저 지친 것은 아멜리아였다.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진실이 족쇄처럼 발목을 잡아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제가 시우를 괴롭혔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잖아요….”“몰랐다고 해서, 미숙하다고 해서.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시우가 힘들었던 게 없던 일이 되진 않잖아요….”고개를 숙인 아멜리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더없이 행복한 순간에도 과거는 아멜리아를 조여왔다.

그를 무심히 바라보던, 모욕을 주던, 터무니없는 잡일로 괴롭히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날 때마다, 그것에 괴로워했을 분해했을 시우를 떠올릴 때마다.

괴롭다.

그를 사랑하면 사랑하게 될수록 괴로워질 것이 두렵다.

“시우한테 갚아주고 싶어요. 시우의 노예가 되어서라도 바로잡고 싶어요….”“아멜리아님….”

그렇구나.

시우는 어제 느꼈던 거리감이 비단 시우 혼자만의 마음 탓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긴 했지만 정작 이런 대화는 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멜리아 역시 시우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헷갈리고 있다고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행복감에 취할 자격이 없다 여기며, 스스로 선을 그어왔던 것이다.

“제가 미워요…. 너무, 너무….”

아멜리아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렁그렁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소매로 쓱쓱 닦으며 터지려는 울음보를 참아 히끅거리고 있었다.

시우는 아멜리아에게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멜리아는 손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다 잔뜩 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모르겠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저도 할 수 있는 거면 대답해 드릴게요.”

울음을 꾹꾹 눌러 간신히 되 삼킨 아멜리아가 입술을 달싹였다.아주 조심스럽고, 애달픈 질문.

“제가…. 시우를 사랑해도 괜찮은 걸까요?”

이것이 아멜리아가 등을 돌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사실 이 대답을 시우가 떳떳하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만.

그래도 일단 아멜리아를 안심시킬 방법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질문에 확실한 대답이 될 방법도.

전에도 했지 않은가?

시우는 아멜리아와 입술을 포갰다.

뒤로 물러서려는 아멜리아가 도망치지 못하게 허리를 감싸 안고.그녀의 얇은 입술을 벌려 진득하게 혀를 섞었다.

가볍고 풋풋했던 키스 따위가 아니다.

그녀를 원한다는 마음을 때려 박듯 서로의 혀를 뒤엉키게 하는 진한 키스였다.마치 청춘 드라마 주인공처럼 멋들어진 키스를 끝냈을 때.

아멜리아는 얼굴이 퐁 붉어진 채 얼어있었다.

띄엄띄엄 흔들리는 입술이 그녀가 엄청나게 놀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녀가 안쓰러워 홧김에 키스하긴 했지만 너무 부끄러워하고, 저런 반응을 보이니 괜히 머쓱하다.

“됐나요?”

오버풀되어 과열된 나머지 초점도 제대로 잡히지 않고 풀려버린 아멜리아의 눈.아멜리아는 시우의 옷깃을 덥석 잡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과 목소리.

“한 번으로는…. 잘 모르겠어요.”그리고는 시우의 목에 매달려 오히려 키스해왔다-그녀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닷새 전이지만.

진정한 의미로 서로를 마주보게 된 것은 지금이 아닐까?

부드럽고 뜨거운 아멜리아의 혀끝을 느끼며 시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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