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멜리아가 제주도의 호텔을 예약했다 해서 지금 이 시간에 거기까지 갈 수는 없다.
따라서 시우는 조용히 아멜리아의 예약을 취소하고 인근 호텔을 새로이 잡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늦은 시간임에도 숙소를 예약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나 당일이었다면, 아니면 새해를 앞둔 12월의 마지막 날이거나 새해 첫날이었다면 이 많은 호텔이 사람들로 빼곡하게 들어찼겠지.
마침 딱 애매한 12월 27일.
가까스로 보도 10분 거리의 5성 호텔을 잡을 수 있었다.
제머나이 백작가로부터 금전지원이 완전히 끊겼기 때문에 꽤 부담스러운 액수다.
그래도 타카쇼가 호스트 알바 당시 억지로 쥐여준 돈과 샤론과 생활할 때 나눠 받았던 현상금이 조금 남아있어서 여행 중 돈 걱정은 크게 할 필요가 없을성 싶었다.
한강을 스치며 불어오는 차가운 도시의 밤 공기.
코트 깃을 세운 사람들은 잔걸음으로 발길을 재촉하며 택시를 잡아타고.
아직 크리스마스의 장식이 남아있는 거리에는 흥겨운 캐롤이 흘렀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첫 마실 나간 강아지처럼 시우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
본인은 자각이 없는 듯하지만 한참 전부터 벌어졌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도로를 달리는 차를 보며 시선으로 쫓는가 하면, 신호등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가려는 것을 시우가 잡아채기도 했다.
“이제 곧 도착하네요.”
“알겠어요.’’
세계 불가사의라도 접하듯 광고가 재생 중인 거대한 전광판을 바라보던 아멜리아는 시우의 말에 30분 만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하나도 놀라지 않은 척, 태연한 척 굴었는데 그 점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덕분에 아멜리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의 문제에 대해서도 잠시 고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근사한 호텔 로비에서 심야 체크인.
여담으로 아멜리아 같은 미인이, 그것도 외국인이 길거리를 떠돌면 시선을 집중시킬 것이 뻔한바 시우는 미리 박영의 부적을 챙겨왔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 소소한 해프닝이 생겼다.
체크인을 해주었던 여직원은 한참이나 홀린 듯이 아멜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던 것이다.
하긴 아멜리아와 시우의 관계가 최악이던 시절에 온갖 욕을 속으로 퍼부으면서도 차마 외모에 관련된 욕설은 하지 못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윽고 엘리베이터에 카드키를 인식시키고 층수 버튼을 눌렀다.
어플로 예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을 예약한 만큼 한강뷰 고층 스위트 룸이었는데 막상 체크인까지 하고 나니 이게 기분이 또 묘하다.
아멜리아. 호텔.
이렇게 따로따로 보면 이상할 것 없는 단어가.
‘아멜리아와 호텔’로 합쳐지면 굉장한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일전에 보더 타운의 소피아의 별장에서 묵게 됐을 때의 기분이랄까.묘한 긴장감과 낯섦 그리고 어색함이 감돌았다.
아멜리아는 지면이 올라가는 감각에 어깨를 움츠리며 여행 가방 손잡이를 꽉 잡았다.
오딜과 오데트가 현세에 처음 나왔을 적, 온갖 것을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로 받아들였다면 아멜리아는 모든 사건을 ‘뭐야 이거!’ 정도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아까보다 붙어선 거리도 유독 가까웠고 말이다.
어깨에 손을 얹어 안심시키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라고 생각한 시우가 푹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멜리아를 슬쩍 다독여주려는 순간.
-띠 링!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좌우로 거울이 늘어선 복도가 보였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네.”
아까보다 명백히 성량이 줄어든 아멜리아.
이젠 아예 주눅이 들어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그도 그럴게 아멜리아는 기본적으로 촌뜨기였다.
더군다나 스승님의 가르침과 경험 덕분에 현세를 ‘아주 불쾌한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생전 처음 보는 풍경에 과잉 각성하여 어깨를 움츠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
신기하기도 했고, 경악스럽기도 했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시우의 뒤를 쫓는다.체크인만 했다면 객실에 들어가기는 아주 쉽다. 카드키를 열기만 하면 끝.
“여깁니다.”
시우가 문을 열던 동작을 유심히 살펴보며 마법적 작용을 살피던 아멜리아는 짐을 풀며 얼핏 숙소를 둘러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객실 자체는 굉장히 청결한 편이었다.
방금 삶아낸 듯한 침구에서는 은은한 소독제 향이 났고, 어째 졸부 같은 느낌이 드는 소파도 보풀 하나 없이 잘 관리되고 있다.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널찍한 스위트 트윈룸, 그것도 5성 고층 객실 한강뷰.
하지만 아멜리아의 표정에 낭패감이 어린다.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것이다.
게헨나에 존재하지 않는 60층이 넘는 어마어마한 호텔의 위용과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된 라운지를 목격했을 때 아멜리아는 당연히 자신의 예약이 성공적이었다고 자부했다.
신문물이 가져다주는 패닉 중 자긍심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모처럼의 분전은 헛발질이었다.
하지만 설마하니 그 커다란 호텔 안에 이런 성냥갑 같은 객실이 존재할 줄이야….
층고도 낮고, 인제 보니 붉은 카펫도 싸구려다.
습도가 제대로 유지되지 않은 탓에 지나치게 건조하고, 두 사람이 지내기에는 너무도 좁다.
2층 면적까지 따지자면 오두막집보다도 작은 수준이다.
괜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선 탓에 일을 이렇게 꼬아 버리다니.이래서야 그에게 폐만 끼치던 예전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막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분주했던 시우가 그런 아멜리아의 속마음을 알아차릴 리 없다.
“아멜리아 님.”
“네.”
한 면이 통째로 유리로 되어있던 창가를 서성이던 시우가 아멜리아를 불렀다.쭈뼛쭈뼛 괜히 주눅이 든 상태로 대답한 아멜리아.
“여기좀 보실래요?”
시우의 손짓에 아멜리아는 종종걸음으로 창가에 다가갔다.그 사이 잠시 어디론가 향하는 시우.
카드키를 꼽음과 동시에 들어왔던 조명을 끄자….
“야경이에요. 우리나라에선 이걸 보려고 집값을 엄청 얹어주고 사요.”거대한 건물, 그보다 더 거대한 철제 다리, 그리고 거리 곳곳에서 빛나는 빛이 환하게 아멜리아의 시야를 채웠다.
자책감 실망감에 젖어가던 아멜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눈앞의 풍경은 게헨나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그야말로 불야성과 같은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예뻐요.”속마음이 고스란히 흘러나온 아멜리아는 유리창에 손을 댄 채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지면부터 강 맞은 편의 불빛을 하나하나 훑었다.
“여기가 시우의 고향….”엄밀히 말하면 시우가 어렸을 적 살던 아파트는 재개발로 허물어졌지만 그래도 서울 토박이 출신이었던 건 사실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그리고 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퍽 귀여웠기에 얌전히 지켜보았다.
2.
비록 스위트 트윈이라지만 호텔에 공동 투숙을 하게 된 두 사람.
로맨틱한 야경을 안주 삼아 미니바의 와인을 홀짝이다 보면 절로 사랑을 노래하게 되기 마련이다.
언뜻 발그레 달아온 뺨이 보이고, 눈이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당겨 앉은 연인의 키스.
이후는 바로 옆의 침대로 직행…이 정석인데.
아멜리아와 시우의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안녕히 주무세요.”
“시우도.... 잘 자요.”
놀랍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심지어 꽤 규칙적인 수면을 취하는 시우가 잠자리에 드는 것은 크게 이상하지 않지만, 잠을 거의 자지 않는 아멜리아조차 얼떨결에 각기 다른 침대에서 베개에 머리를 뉘게 되었다.
둘 다 숨 막히는 어색함과 긴장 속에서 꿈나라로 후퇴를 선택한 것이다.
“하아… 암.”
시우는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한숨을 하품처럼 얼버무렸다.
역시 도저히 거리감을 잴 수가 없다.
아멜리아의 과거를 알고, 그녀가 자신을 위해 고생해주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차라리 감정이 벅차오르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달랐을 것이다.
함께 거의 아무런 대화도 없이 와인잔을 부딪치던 중 벽치기 하며 와인 키스를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기억을 잃고 아멜리아와 행복했던 시절처럼?
아멜리아가 부교수이고 시우가 관리인이던 시절처럼?
한껏 달아오르려던 불길에 찬물을 끼얹자 행동력과 충동을 대체하는 것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어려움뿐이다.아멜리아가 다시 오두막에만 머물지 않고 현세에 나온 것.
시우의 고향을 보고 싶다고 한 건 부정할 수 없는 그린라이트이면서도 굉장히 얼떨떨한 상황인 것이다.
아마 견우와 직녀도 이런 상황에서 만났다면 오작교 위에서 하루는 청승을 떨지 않았을까….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 시우는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그의 호흡이 느릿해지자 그제야 조그맣게 몸을 돌리는 아멜리아.
시우 쪽을 힐끗 바라보더 니 조용히 몸을 일으킨다.
그가 자고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아멜리아는 몸을 일으켜 그의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시우….”
역시 너무 어렵다.
사랑이라는 건.
그것도 부채의식을 끌어안은 채 사랑해야 한다는 건 아멜리아에게 참 어려운 일이다.
시우에게 용서받길 바라며 현세를 떠돌 적 아멜리아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드는 꿈을 꾸었다.
그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순간에 대해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이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아멜리아의 부족함을 이해해주었고 용서해주었다.
언젠가 잃을 것이 두려워, 상처 입는 것이 두려워 뒷걸음질만 쳐왔던 아멜리아에게 처음으로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준 사람.
그런데.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바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우의 손을 잡았다.
아멜리아가 다치게 한 왼손.
아직 신경이 제대로 연동되지 않아 감각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두툼하고 두꺼운 손을 쥐자 가슴이 뭉근하게 쿡쿡 쑤셔왔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때는 솔직하지 못했다’라는 말로 변명하고, 스스로 납득하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몹쓸 짓을 그에게 했었다.
소중하게 손을 움켜쥔 아멜리아는 그의 손등을 뺨에 대었다.
“...무서워요.”
시우가 했던 걱정은 비단 시우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때의 키스는 오랜 재회에 격해진 감정 때문이었을 뿐이고, 지금은 식어버린 거면 어쩌지?’ 라는 걱정 말이다.
시우는 분명 아멜리아를 용서했다.
그가 잘못했다고 말했던 부분도 아멜리아는 분명 용서해주었다.
그러나 갈등과 싸움이 반드시 결별을 뜻하지 않듯, 용서와 화해가 반드시 사랑을 뜻하지는 않는다.
용서했고, 용서받았을 그뿐일지도 모르는 관계.
더군다나 시우의 옆에는 이미 연인이 있다.
“시우는 다정한 사람이니까요….”
아멜리아의 아픔에 공감해 용서해주었지만, 용기를 내 부탁한 여행에도 동의해주었지만 거기까지일지 모른다.
그것이 아멜리아를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실은 많은 것을 부탁하고 싶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세요.”
“손을 잡고 마주 보며 웃어주세요.”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안아주세요.”
가만히 누워있는 시우의 얼굴로 몸을 수그리던 아멜리아.
그의 입술과 맞닿기 직전 멈춰 선다.
“키스해 주세요.”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아멜리아는 시우의 손을 꾹 잡고 뺨에 비볐다.
그래도 이제 다시는 혼자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백 년이 걸려도, 천 년이 걸려도 그가 다시 돌아봐 줄 때까지 노력할 것이고, 기다릴 것이다.
아멜리아는 한참이나 그의 손끝에 걸린 온기를 나눠 가졌다.
그렇게 탐색의 첫날밤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