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네요.”그렇게 아멜리아와 시우의 갑작스러운 여행이 성사되었다.
여행제안을 수락하는 시우 앞에서 아멜리아는 펄쩍펄쩍 뛰며 기뻐하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한 미소를 짓지도,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몸을 배배 꼬지도 않았다.
그저 옛날 보더 타운 동행을 요구했을 때처럼 무표정으로 휙 돌아섰을 뿐.나란히 걷는 아멜리아의 옆 얼굴은 생각을 종잡을 수 없을만큼 무표정했다.시우에게 있어 가장 익숙한 아멜리아의 자성마법, 포커페이스가 발동된 것이다.
“왜 그러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빤히 바라보는 시우의 시선에 응하는 아멜리아.
이거 뭔가….
예상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달까.
지난 밤 시우와 아멜리아는 진솔한 대화를 나눴고 긴 시간 동안 풀리지 않았던 오해와 앙금을 풀었다.
케케묵었던 애증은 애정으로, 요지부동이었던 두 사람의 간극은 밀착으로.
안 좋게 헤어졌던 연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면서, 수술비를 대주기 위해 러시아에 대게 잡으러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중간에 코하브 및 알비레오 백작이 오지 않았다면 진득한 키스를 이어갔을 정도로 애틋한 분위기가 흘렀던 것이다.
분명 그럴진대….
대체 이 거리감은 뭘까?
아멜리아를 따라 나란히 걷고 있기는 하다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아멜리아는 눈을 마주쳐오기는커녕 앞만을 보며 꾸준히 나아가고 있어 벌써 5분 넘게 침묵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
혹시.
이거 타이밍이 완전히 꼬인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아멜리아와 시우의 인연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우선 공노예 시절과 부교수 초기 시절.
서로가 서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냉전기.
다음은 전속 노예 시절과 담당 교수 시절.
아멜리아와 시우가 가까워질 뻔했으나 결국 최악의 방식으로 틀어졌던 과도기.
또 다음은 소년기 시절과 보호자 시절.
가장 가까워진 듯했으나 결국에 파탄까지 나버린 침체기를 거쳐 각자 오랜 시간 동안 얼굴을 보지 못하고 지낸 기간까지.
아멜리아와 시우가 떨어져 있는 동안 둘의 관계는 정체가 아닌 후퇴를 거듭했다.
분위기를 타서 키스까지 이어졌다면 모를까 극적인 재회를 방해받고 나서 재판이라는 큰 사건이 지나자 세 관계 중 어디에 초점을 둬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이 온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혹시?
5년 동안 축적해온 타카쇼의 연애 담론.
심심하다 싶으면 하도 옆에서 쫑알거리는 통에 그 데이터베이스는 시우의 무의식에 한껏 축적되어 있다.거기서 기인한 타카쇼의 뇌내 열변이 시작됐다.
‘어이 신시우. 여전히 동정 같은 사고방식이로구나.’
그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분명 부교수는 신시우를 애타게 보고 싶어했다. 실제로 겨우 만나서 대화하게 되었을 때는 꽤 괜찮은 반응을 보였지. 그 까다롭고 무서운 아멜리아님이
‘요기에 뽀뽀해주세요’라는 표정으로 바라볼 정도로 말이야.’
‘음…. 그랬지.’
‘하지만 슈네.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에 대해서 알고 있나?’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니가 만든 거 아니야?’
팔짱을 끼고 무게를 잡은 타카쇼.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 동물. 억압된 자유의지를 되찾고자 하는 본능은 목숨을 도외시할 만큼 강렬하다! 즉, 신시우를 만나지 못했던 아멜리아는 그 환경에 반항하듯 오히려 어느 때보다 신시우를 원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지난밤, 간절했던 소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대뇌피질에서 도파민이 폭주하는 극적인 재회를 방해받고 충분히 냉정한 사고를 거친 아멜리아는 깨닫게 된다.
‘응? 나 생각보다 엄청나게 기쁘지 않은데? 게다가 여자친구까지 그렇게 많이 만들어뒀다고…?’ 라고.
쉽게 말해 꿈에서 볼 정도로 가지고 싶었던 구두가 막상 신고 보니 별로인 심리가 된 것이다!
사랑이 영원한 것이라 주창하는 자는 이상주의자에 불과하다!
사랑이란 사소한 것에도 타오르고, 아주 작은 일에도 식어버리는 촛불에 불과한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가문에서 중매해줬으면 이주 만에 이혼했을지도 몰라!’
이상 열변을 토하던 타카쇼는 페이드 아웃.
절대 당사자에게 말하지 못할 난폭한 이론이지만, 어째 일리가 있어 보인다.
지금 상황에선 너무 그럴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먼저 여행을 제안한 건 이상하지 않은가?
시우가 혼란스러워하는 순간.
아멜리아는….
‘시우와 여행…. 시우와 여행…. 시우와 단둘이 여행…. 시우와 단둘이 여행….’
시우에게 할 말을 적어놓고 겨우겨우 말한 여행제안이 통과했다.
거기서 기인한 가슴이 벅차오르는 긴장감에 로봇처럼 뻣뻣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2.
아멜리아 메리골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건 순전히 오만에 불과하던 것일까?
가슴에 돌 하나를 얹은 것 같다.
샤론에게도 쌍둥이에게도 기정사실인양 말해뒀는데 실은 관계가 아예 리셋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애초에 두 사람이 연인처럼 ‘사랑’을 나눈 기간은 기억을 잃은 시우가 신체적으로 성인이 됐을 무렵~ 시우가 기억을 되찾기 전 까지다.고작 며칠인 것이다.
어쩌면 헛다리를 짚고 김칫국을 저수지째 마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우의 타는 속도 모른 채 아멜리아는 미리 싸두었던 짐을 들고 왔다.
성인 남성이 몸을 웅크리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여행 가방이었다.
“제가들어 드리겠습니다.”
행동의 관성 + 장소의 분위기까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혼잡한 머릿속과는 별개로 몸이 먼저 움직여 아멜리아의 짐을 대신 맡으려 들었다.그때 아멜리아는 휙 하고 몸을 돌렸다.
“아….”
마치 시우에게서 짐가방을 지키기라도 하겠다는 몸놀림.두 손으로 꾹 짐가방을 쥔 아멜리아는 경계하듯 말했다.
“제가들게요.”
“대신 들어 드릴 수 있는데요.”
“아니요, 제가들게요.”
단호함 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아멜리아는 시우의 호의를 단박에 거절했다.
아예 몸을 돌려 시우가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곳으로 짐가방을 옮겨버린 것이다.
이는 일종의 의사표출이었다.
두 사람의 과거가 담긴 공간을 거닐며, 새로운 감회를 느낀 것은 시우뿐만이 아니다.
아멜리아 역시 과거 자신이 했던 어리석은 행동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그를 못살게 굴고, 신분제를 태연하게 들먹이며 그를 노예로 부렸던 나날들.그는 고맙게도 아멜리아의 치기 어린 투정의 나날과 괴롭힘을 이해해 주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것으로 끝낼 수 없었다.
잔잔한 수면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도 파문이 남는다.
하물며 사람과의 은원이란 것이 그토록 간단히 풀릴 리 만무하다.
이제는 그를 노예처럼 부리는 일은 조금도 없을 예정이다.
뭐든지 스스로, 그에게 기대지 않는 자력갱생.
오히려 지난 5년의 시달림을 당해왔을 시우에게 대가를 치르기 위해 노예라도 자처할 생각이다.
그런 굳은 의지를 숨긴 아멜리아는 짐가방을 뒤로 들며.시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어?”
예상대로 큰 충격에 빠진듯한 시우의 표정을 보자.
거대한 케이크 같은 성취감이 몰려온다.
‘진작에 이렇게 해야했는데’라는 쌉싸름한 후회가 토핑으로 얹어진 케이크였지만 말이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어 황망해하던 시우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물었다.아직은 억측일 뿐이다.
“그나저나 여행이라니… 어디로 갈 예정이신가요?”물어보면서도 내심 정해져 있다고 본다.
아멜리아와의 가장 따뜻한 추억이 담긴 곳은 굴피나무 숲의 오두막이니까.
“현세.”
하지만 아멜리아는 뜻밖의 대답을 내려놓았다.
“시우의 고향에 가보고 싶어요.”
시우의 오해를 풀어버릴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이다.
3.
집행유예 상태나 다름없는 아멜리아가 현세로 출국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마녀 사회가 ‘귀족’에게 보내는 신뢰는 커다란 모양이다.
뭐, 아멜리아는 ‘전’ 귀족이 되었지만.
아무튼 아멜리아가 직접 출입국장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소소한 해프닝은 있었지만 두 사람은 한 시간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넘을 수 있었다.
시야가 출렁이는 왜곡감을 느끼고 잠시 후.
대리석으로 이뤄진 출입국 사무소의 로비 풍광은 어디 가고 두 사람은 한강 둔치에 서 있었다.
“욱….”
기분 좋은 밤바람이다만, 여느 때처럼 워프의 멀미를 견디며 헛구역질이 나온다.
꽤 돈을 많이 받던데 시승감 정도는 개선을 해줬으면 싶다.
한편 아멜리아는 그런 시우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주변의 풍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
비록 아멜리아가 살생부의 이행을 위해 현세를 돌아다녔다 한들.
이동 경로 자체가 남극, 북극, 사막 등 험지와 극지에 국한되었다.
잠깐 시우를 만나기 직전 도시에 들렀던 적이 있긴해도 한국 굴지의 땅값을 자랑하는 여의도의 화려함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적어도 목이 꺾여라 올려봐야하는 건물이 병풍처럼 서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때보다 훨씬 마음의 여유가 생겨 주위를 둘러볼 여력이 생긴 점도 한몫하겠지만 말이다.
극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다를 바가 없다.
강화유리로 전면을 장식한 빌딩을 보며 아멜리아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검은 한강 수면에 빛나는 인공조명의 불빛.
경적을 울리며 지자고는 유소리를 들S며 어안이 벙벙한 심정을 느끼던 아멜리아의 경황 없는 의식을 시우의 한마디가 되찾게 한다.
“그럼…. 우선 숙소를 예약하겠습니다.”
숙소, 예약, 시우가.
여행을 오면 숙식할 장소를 정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불과 조금 전 아멜리아는 결심하지 않았던가?
시우에게 일을 떠넘기지 않겠노라고.
그것이 아주 최소한의 속죄라고.
“제가할게요.”
“ 아?”
작심 삼일도 아니라 작심 세 시간 만에 일을 떠넘길 수는 없었던 아멜리아는 휙 무서운 기세로 시우의 손에 든 스마트폰을 뺏었다.제머나이 백작이 외부인 명의로 개통해주었던 휴대폰을 받아든 아멜리아는 다시금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아멜리아는 스마트폰을 처음 본다.
시우가 이 기계로 숙소를 예약하려는 듯 했기에 엉겁결에 빼앗았을 뿐.
손바닥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데 화면이 너무 깨끗하게 반짝반짝 빛난다.
손으로 화면을 문지르면 최첨단 마법 실험 설비의 수정스크린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한다.내용물을 자세히 보니 이 근방의 숙소를 사진으로 찍어서 만들어 놓은 듯한 화면이 있다.
흡사 아티팩트 같은 문명의 이기에 크게 당황한 아멜리아의 눈이 핑핑 도는 와중.
시우는 머쓱하게 아멜리아에게 다시 휴대폰을 받아가려 했다.
적어도 시우가 본 기억 속 아멜리아가 스마트폰 외 현대 문물을 사용하는 모습은 없었기에 당연히 사용법을 모르리라 추측한 것이다.
“제가 하겠습니다. 이 근처는 제가 잘 알거든요.”
하지만 아멜리아는 먹이를 빼앗기는 다람쥐처럼 스마트폰을 품에 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할수 있어요. 충분히.”
심호흡을 하고 스마트폰을 바라보던 아멜리아는 차분히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시우가 여기서 숙소를 예약하려던 것을 보면 이것은 카탈로그.
거기에 손끝의 움직임에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면 실험 설비처럼 대하면 될 것이다.
하나하나 클릭해보며 대충 작동방식을 익힌 아멜리아는 가장 근사해 보이는 호텔 정경에 가장 근사해 보이는 사진을 클릭했다.
예약하기 버튼까지 누르자 떠오르는 결제창과 암호 창.
아멜리아로딩중….
아멜리아가 화면을 가리기라도 등지고 작업하고 있었기에 기웃거리던 시우가 한동안 뇌사에 빠져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뒤늦게 발견하고 말했다.
“거기부터는 제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밀번호를 제가 알고 있어서요.”
그녀는 완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은한 희열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여서 살짝 의아했다.
“알려주면 제가할게요.”
"그럼, 3821입니다.”
“삼, 팔, 0|, 일….”
폭탄이라도 해제하듯 금지로 신중하게 버튼을 누르는 아멜리아.
그러자 약간의 진동과 함께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됐다.
시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를 도왔다.
“여기요.”
시우는 아멜리아에게 휴대폰을 받았다.
언뜻 무표정인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녀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통해 감정을 읽어내는 일명 ‘아멜리아 리딩’은 노예시절 시우가 MAX까지 능력치를찍어놓았던 스킬이다.
요 몇 달간 제대로 활용한 적이 없어 신뢰도가 좀 내려가긴 했지만, 지금처럼 아멜리아가 눈에 보이는 반응을 보일 땐 더 없이 유용했다.
살짝 가빠진 숨.
안쪽으로 말아 문 아랫입술.
동그랗게 변한 눈과 15도 올라간 왼 눈썹.
이하 아멜리아의 감정 성분표.
[기쁨 25%]
[자기만족 10%]
[뿌듯함 25%]
[살짝 피곤함 40%]
어째 이상한데.
시우는 아멜리아가 예약한 숙소를 들여보았다.
“오, 좋은 곳으로 해주셨네요.”
“당연하죠, 이 정도는 제힘으로도 할 수 있는 걸요.”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제주도의 호텔을 예약해 놓고 있었다.
꼬맹이 아멜리아와 스승님
갓지은밥 님이 그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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