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51화 (451/917)

1.

걱정이 컸다.

&2리(주가 감금형과 추방형을 유예받기 위해 마련해야 하는 벌금 액수가 절대 적지 않았던 까닭이다.

마녀는 대체로 부유하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녀도 금화를 환전해 현세에 나오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당장 굉장히 궁핍한 상황에서 만났던 샤론만 해도 집단소송에 시달려 탈탈 털리기 전까지는 수백억대 자산가가 아니었던가?

다행히 아멜리아의 경우는 위원회에서 손해를 입은 마녀들과 조율해 일정금액을 배상하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짓긴 했다.그렇다고 남은 빚이 갚기 수월한 액수냐 하면 전혀 아니라는 문제다.

제머나이나 예소드처럼 현세에도 사업을 펼쳐 천문학적인 재산을 쌓은 것이 아닌 이상에야 말이지.

재판이 끝나고 곧장 아멜리아를 만나러 가려 했던 시우는 소피아와 마주쳤다.

“소피아 님, 혹시 아멜리아 님 못 보셨나요?”

“아, 시우군. 그건 말이지….”

곧장 보고 싶었건만

애;하게도 아멜리아는 각종 행정 절차와 스승님이 남겨주신 상속 유산을 확인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바로 가신 건가요?”

“그러게, 나도 얼굴이라도 보고 가라고 말했는데…. 오늘 안에 처리하고 싶다고 해서 말리지 못했어.”

“그럼, 혹시 언제쯤 시간이 나실지는 이야기해 주셨나요?”

“마침 오늘 밤 안에는 처리하고, 내일 아침에 직접 만나러 간다고 전해 달래.”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소피아 수석교수도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만 해도 시우가 아직 노예이던 시절이었는데.가끔가다 옛 인연을 만나면 이렇게 격세지감을 느낀다.

“오랜만에 뵐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우는 예의를 지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려 했다.

그런 시우를 소피아가 붙잡았다.

“내가 원망스럽지 않아?”

뒤를 돌아보자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모으고 면목없다는 듯 눈을 피하는 소피아가 있다.

소피아는 분명 아멜리아를 위해 시우를 이용했다.

아멜리아가 도를 넘은 투정을 부리거나 시련을 선사했을 때는 종종 도와주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아멜리아의 정서 교육을 위해 시우를 희생했다 따져 묻는다면 소피아로서는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거기에 소피아가 아멜리아가 고통을 겪다 폭주할 때까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반면, 시우는 사지로 들어가 그녀를 구해내기까지 했다.

“네게는 정말 미안해. 앞으로 평생 옷가지를 걸치지 말고 알몸으로 생활하라고 해도 반성하는 마음으로 따라야 할 정도야.”

“안합니다, 그런명령.”

언뜻 말투는 가볍지만, 그 안에 진심이 느껴졌기에 시우도 웃으며 맞받아쳤다.

사실 아멜리아와 시우가 엮이고 더불어 시우의 노예 생활이 꼬이는 것에 일조한 사람이 이 소피아다.하지만 그 점에 대해 유감을 품고 있느냐 하면 아니다.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혼자 힘들어하던 아멜리아에게 최초로 도움의 손길을 뻗은 것이 소피아였으며, 일전 보더타운의 여관에서 한번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바 딱히 그녀를 책망하고 싶진 않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최대한 도울 테니까.”

“네, 일이 생기면 부탁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고개를 조아려 사과하는 소피아를 뒤로하고 시우는 제머나이 백작가로 돌아왔다.

2.

시우는 아멜리아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모든 행동의 원인, 그녀의 서툼, 부족함까지도 안아주고 싶다.

아멜리아가 여전히 시우에게 ‘사랑’을 품고 있다면 시우 역시 부응해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결 과제가 있다.

일부다처 하렘도 창작물에서나 그럴듯한 것이지 현실로 넘어오면 꽤 절차가 복잡해진다.샤론, 쌍둥이, 스승님께 미리 허락을 구해야 한다.

오늘 아침 쌍둥이와 샤론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아침까지의 시간을 이용해 쌍둥이와 샤론을 앞에 앉혀두고 차근차근 둘 사이에 있던 모든 일을 밝혔다.

아멜리아의 아픈 과거까지 일일이 들춰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대충이나마 짚고 넘어가 두었다.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부분이라 여긴 까닭이다.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긴 어긋남이지만 간추리자니 생각보다 짧게 끝난 설명.

지난번 예소드 백작에 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화냈던 사람이 쌍둥이였던 바.조심스레 쌍둥이의 눈치 먼저 살폈다.

조금 놀랐다.

오딜과 오데트의 눈이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훌쩍, 오데트 설마 우는 건 아니지? 아이처럼?”

“훌쩍, 언니야말로…. 자꾸 소매로 눈을 비비던데?”

“나는 눈에 속눈썹이 들어갔을 뿐이야. 너도 알겠지만 내 속눈썹은 나비의 더듬이처럼 길거든.”

“나도 속눈썹이 들어갔어. 길이도 언니랑 똑같이 길어서 특히 아프네.”

최대한 감정이 실리지 않게끔 객관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는데 의도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다.

오딜과 오데트는 누가 봐도 흐르는 눈물을 참느라 한껏 눈을 치켜뜬 상태로 평소보다 기운 없게 투닥이고 있었다.

“큼, 끄음…. 부교수님 께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매일 과제만 내주는 못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엔 슬쩍 샤론 쪽을 봤는데….

샤론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시우를 바라보며 닭똥같은 눈물을 가슴골에 뚝뚝 떨어뜨리는 중이었다.애초에 샤론과 쌍둥이에게 구박을 받고 아멜리아와 확실히 화해할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주선한 자리다.

거기서 이렇게 눈물을 글썽일 줄이라고는….

솔직히 예상 못 했다.

혹시 나 스토리텔링에 엄청난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리액션.

샤론은 뚜벅뚜벅 걸어와 시우를 덥석 안았다.

“엄청 고생했었구나…. 힘들었지?”

“너무 옛날 일이라 기억도 잘 안 나는데…. 괜찮다니까.”

이제껏 게헨나 생활을 물어도 은근히 답을 피해왔던 시우.

따라서 샤론이 시우의 노예 시절 일을 이토록 상세히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공노예 출신이니 그래도 엄청난 고생은 하지 않았겠거니 여겼었는데, 막상 이렇게 조목조목 들으니 괜스레 설움이 복받치는 것이다.게다가 원래 샤론은 눈물이 많다.

최저 시급도 못 받으며 일했었다니, 그 와중에 숙소도 나쁜 곳으로 배정받고 허드렛일까지 도맡아야 했다니.

아멜리아라에게도 사정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솔직히 지금은 좋게 보이지 않는다.

“뭐,뭔가 찔려….”

“그, 그러게….”

한편 함께 라티푼디움에서 생환한 이후로는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최초 시우를 이용하려고 접근했던 쌍둥이다.

설령 그 이후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해도 말이다.

은근히 시우의 의사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성교육’을 진행했었던 만큼 샤론처럼 당당하게 위로하긴 힘들어 땀을 뻘뻘 흘리는 중이었다.

“아무튼 오딜 님과 오데트 님, 그리고 너만 괜찮다면 잠깐이라도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스승님은 따로 찾아뵐 예정이고.”

샤론은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시우를 괴롭혔다는 점에서 솔직히 곱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용서했다는데.게다가 시우의 목숨을 위해서 그렇게 고생을 했다는데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전에도 말했지만 난 괜찮아. 시우가 잔뜩 사랑받는 건 어찌 됐건 기쁜 일인걸.”

“이해해 줘서 고마워.”

다음은 쌍둥이의 발언.

“오달 님 오데트 님.”

“언젠71『이렇게 /줄은 알았지.”

“하긴 아멜리아 부교수님은 소년기 조수님을 독차지한 전적도 있잖아.”

“이제 와서 한두 명 더 늘어봐야. 어차피 우리 상대는 못 돼.”

쌍둥이가 선선히 허락하는 것은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시우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을 적 누구보다 분주하게 치료법을 밝히러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그 이후로도 시우를 살리기 위해 살생부라는 것을 이행했다고 하지 않은가?

어찌보면 쌍둥이가 시우와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은 아멜리아의 덕택이다.

그걸 깡그리 무시하고 무작정 싫다고 떼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구구절절 말하는 건 뭔가 겸연쩍다.

길게 말하는 대신 투쟁심을 불태우는 것으로 보여주었다.

“대신 돌아오면 협의회에 들어오라고 해! 아무리 부교수님이어도 날로 먹는 건 인정 못 하니까!”

“맞아요, 맞아요.”

3.

어느덧 깊어진 밤.

밤새워 뒤척이던 시우는 산책을 나섰다.

딱히 목적을 지닌 산책은 아니었다.

발길이 닿는 곳으로 향하다 보니 어느새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다.

일전에도 아멜리아를 찾기 위해 들렀던 적은 있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 당시보다 좀 더 구석구석.

5년If의 희로애락이 S힌 1경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부지의 담벼락을 따라 길고 구불구불하게 난 배수로.

비 오는 날을 정말로 싫어하게 됐던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지어진 지 굉장히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 배수로는 악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던전이 되었었으니 말이다.

시우의 5년 간 잠자리를 책임졌던 마구간.

원래도 거의 관리가 되지 않았던 건물이었는데 유일하게 유지보수를 해주던 시우가 없어지자 그야말로 폐허 같은 모습이 되었다.

지나간 일은 미화된다고 하던가?

시우가 게헨나 탈출이 목전에 임박했을 때 했던 생각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탈출을 위해 마법 연구하며 고군분투했던 나날이 떠오르자 그리움….

“그립진 않네.”

같은 건 없고 갑자기 앞으로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뽕이 차올랐다.

이후에 시우의 정식 근무처였던 도서관도, 뭔가 관람료를 내야 할 것처럼 세련되게 꾸면 진 회랑과 교사도 둘러보았다.

역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아카데미답다.

시우는 많은 것이 변했는데 이 멋들어진 교사는 천 년의 시간에도 불변할 것을 다짐이라도 하듯 한밤의 고요함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때.

딱히 약속을 주고받았던 것은 아니다.

시우가 트리니티 아카데미를 찾은 것도 단순 변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운명처럼, 촛대가 일렁이는 회랑의 맞은 편에 한 마녀의 모습이 보였다.

제 몸통만 한 커다란 책을 끌어안고, 스승님의 유품인 망토를 두르고 있는 아멜리아 메리골드.

서로를 향해 걸어오다 회랑의 중간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멈춰 섰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말자.

그동안 떨어져 있던 만큼, 서로 해주지 못했던 일이 있던 만큼.

앞으로 잘 해나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아멜리아의 마음에 아직 ‘사랑’이 남아있을 때의 얘기긴 하다만….

자연스럽게 키스할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고 괜찮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며 시우가 깨달은 것.

긴장했다.

예상치 못한 우연한 재회.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건 분명 아멜리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생겨나는 반사적인 작용이다.

인사를 해야 할지, 재판 결과에 대한 심경을 물어야 할지, 아무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하던 차.

“시우.”

정작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아멜리아였다.

이곳이 배경이어서일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한 감회에 휩싸였다.아멜리아가 부교수였고, 시우가 전속 노예이던 시절 말이다.

“네, 아멜리아 님.”

“시우만, 괜찮다면 함께…. 여행을 가지 않을래요?”

설마하니 갑작스럽게 여행의 제안을 받을 줄은 몰랐던 시우.

여행? 갑자기?

오늘 유달리 인상에 깊게 남아있던 사건, 막대한 벌금 및 배상금 부과와 결부되자 아멜리아의 과감한 여행 제안이 조금 다르게 해석된다.혹시 이거 야반도주 아닌가?

입을 멍하니 벌리고 아멜리아를 바라보고 있자니 추가로 말을 얹는다.야반 도주 제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하고 차분한 목소리.

“시우와 같이 여행을 가고 싶어요.”

소피아의 말에 따르면 각종 행정 업무와 잔액확인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다는 아멜리아.

그런 그녀가 결국 빚을 갚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은 아닐까? 싶어 떨리는 눈동자로 아멜리아를 봤을 때.

“시우만 괜찮다면…요.”

시우는 깨달았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한껏 가장한 무표정.

눈과 손가락까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치맛자락을 쥐어뜯는 손과 촉촉한 눈동자.

실은 이 말을 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멜리아가 야반도주라니 그런 짓을 할 리 없지.

공연한 착각을 한 것 같아 우스워 시우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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