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판 내내 머리가 멍했다.
분명 이 자체로 커다란 이벤트…라기보다는 불쑥 끼어든 인생의 재앙이자 걸림돌일 텐데.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평생 만져본 금화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은 벌금과 배상금?
10년 내 가납 실패 시 감금형과 추방?
사실 상황 자체를 놓고 보면 아무리 외부 상황에 둔감한 아멜리아라도 가벼이 여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스승님이 남겨주신 유산은 마법연구를 수행하기 풍족할 정도로 충분했다만, 아마도 벌금액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평생을 게헨나에서만, 그것도 골방에서만 살아온 아멜리아에게 추방형은 무겁다.
마법 연구를 할 수도 없이 면벽 수련만 해야 하는 감금형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렇게 차분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은….
용서 받았다
&쩌;평생 다가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그와 키스 직전까지 갔었다.
시우도 분명 입을 맞추려고 했던 것이다.
마음 한 귀퉁이에서는 여전히 그를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남아있다.
아직 갚아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꼴불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체통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마음 한구석에 무너지지 않는 기둥이 놓인 기분이었다.
“이쪽, 이쪽 그리고 이쪽에 서명해주세요.”
대기실로 돌아와 앉아있자니 여태 심문을 맡았던 코하브 백작이 서류를 듬뿍 가져와 아멜리아 앞에 내려놓았다.
모든 조항을 꼼꼼히 검사하고 서명한 아멜리아.
코하브 백작은 묵묵히 그것을 챙겨 들고 짤막한 인사를 남겼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다시 이런 일로 뵙지 않으면 좋겠네요.”
“코하브 백작님도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소피아가 걸어들어왔다.
아멜리아를 보자마자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더니 꽉 껴안는다.
“아이구, 얼굴이 반쪽이 됐네….”
“소피아, 영체는 그 정도로 볼살이 빠지지 않아요.”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눈물을 글썽이는 소피아의 모성의 상징에 파묻힌 아멜리아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믿을 수 있는 친구의 품이라는 것이 이토록 따뜻할 줄이야.
잠깐 2차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던 두 사람.
“아멜리아.”
이내 어둑한 표정이 된 소피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벌금이랑 배상금은 내가 도와줄게. 절반도 뚜리겠지만 모아둔 돈이 조금 있으니까 보탬이 될 거야.”
소피아는 이 일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 여기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시우를 위해 살생부를 이행하던 사실을 몰랐다는 것.
속삭임의 마녀가 아멜리아가 지친 틈을 타 유혹의 손길을 뻗는 동안 그녀를 찾지 못한 것.
더군다나 아무것도 모르던 아멜리아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오지랖을 떤 결과 시우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앞의 두 개는 불가항력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 것은 정말로 할 말이 없다.
아멜리아와 시우가 극적으로 틀어지기 전에 에프터 케어라도 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소피아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폭주해버린 아멜리아를 저지한 것이 소피아의 업보에 직격타를 맞은 신시우여서야 더더욱 면목이 없는 것이다.
“소피아.”
이에 아멜리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제도 긴 시간 대화를 나누며 소피아가 지닌 자책에 대해 하고 싶던 말은 전부 했다.
소피아가 무리하게 시우와의 접점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아멜리아가 시우 사이에 관계가 생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아주아주아주 희박한 확률이었겠지.
아픔도 없었을지라도 사랑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멜리아는 소피아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아멜리아, 그러지 말고….”
너무나도 손쉽게 거절당한 지원 제안.
소피아는 단순히 아멜리아의 금전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여겼다.
자투리를 제외해도 자그마치 금화 21만 파운드다.
시청에 직접 내야하는 벌금은 어찌저찌 감당할 수 있겠지만, 아멜리아의 마법이 영향을 끼쳐 연구를 망친 마녀들에게 지급해야 하는 손배금이 문제였다.
소피아의 전 재산을 팔아도 절반도 갚을 수 없는 액수다.
그게 아니라면 소피아가 미안해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정말 괜찮아요’라는 의미로 금전적 도움을 거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고지식하고 프라이드가 강한 아멜리아가 제아무리 곤경에 처했다 한들 남의 손을 빌려 해결하려 들 리 없다.
어떻게 하면 아멜리아가 부담을 느끼지 않고 도와줄 수 있을지 고민하던 소피아.
그런 소피아를 아멜리아는 반듯한 눈으로 올려보았다.
“저의 잘못이니까. 스스로 책임지고 싶어요.”
한점의 타산이나 흐림도 없이 올곧게 올려보는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소피아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자부했는데 어쩜 이리 마음을 몰라줬을까?
“마음은 정말 고마워요, 소피아.”솔직하게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꾸벅 조아리는 아멜리아를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비록 같은 선택을 했을지라도 원인이 다르다.
아멜리아의 거부는 알량한 자존심이나 아집에서 나오는 일차원적인 고집이 아니다.좀 더 깊고 확실히 뿌리를 내린 신념이라 부를만한 것이 편협함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리 와, 안아보자.”
“이미 안고 있잖아요.”
“언제이렇게 기특해졌니….”
“돈이 없으면 소피아도 마법 연구가 힘들어지잖아요. 게다가… 소피아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른 사람이면 ‘뭐 저 정도로….’라고 시큰둥하게 반응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소피아는 고집불통 답답이 시절부터 아멜리아를 지켜봐 왔던 사람이다.미미하지만 확실한 성장이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정 그렇다면 알겠어. 그래도 힘들면 꼭 부탁해야 해? 내 일이 아니라도, 너도 내가 곤경에 처하면 똑같이 도와줄 거잖아.”“네, 그렇게 할게요.”
두 사람은 마치 자매처럼 한참이나 서로를 안고 있었다.
2.
99그 . . .
정열이 채 식지 않은 침대 위.
습기로 뿌옇게 변한 유리창에 건조한 담배 연기가 한 겹의 흐림을 더한다.
창밖을 향해 엎드린 코하브 백작의 나신은 하얀 살갗 위에 맺힌 땀방울로 관능적으로 빛났다.턱을 괸 채 가뿐해진 몸을 니코틴으로 채워가던 백작은 어깨너머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는 마법 서적을 손에 쥔 에렐림 공작이 등을 기대고 있었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히 빗어진 비단 같이 검은 머리칼도.
흘러가듯 활자를 훑는 백색과 은색이 뒤섞인 눈동자도.
조금 전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단정한 모습이었다.
마음 속 깊이 공작을 사모하고 추앙하는 코하브 백작이지만 가끔은 그녀가 너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인간도 마녀도 아닌 인형 같달까….
엄밀히 말하자면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본느 코하브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은, 비단 정사 이후에도 평소의 모습을 보이는 블랑쉬의 모습 때문이 아니다.조금 더 전의 기억 때문이다.
메리골드 전 남작이 사건을 일으키고 블랑쉬가 수습에 나섰던 날, 제머나이 백작과 에버그린 마녀가 찾아와 에렐림에게 청했다.15분만 더 ‘심판’을 늦춰달라고 말이다.
어차피 메리골드 남작을 처단할 모든 준비는 끝나있었고, 그녀를 향해 지속적인 중단 요구만 이어지던 때였다.간단한 이권 거래 끝에 공작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약속된 15분이 추가로 흘렀을 무렵.
공작은 예정대로 ‘심판의 창’을 투하했다.
모든 방어를 무효화하고 마법적 상성 관계를 무시하는 빛의 창이 천공에서 지상으로 쇄도했다.그 순간 메리골드가 만들어낸 공간의 난수화는 사라지고 구속되었던 시민은 해방되었다.
즉, 시간 순서로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다음과 같다는 의미.
⑴심판이 내려짐.
(2)메리골드가 펼친 공간의 난수화가 정상화됨.
(3)메리골드가 심판을 상쇄함.
24위계에 달하는 에렐림 공작의 심판이라지만, 피해 규모를 줄이기 위해 위력이 약화하였다.
따라서 23 위계의 메리골드 남작이 그것을 상쇄하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의문점이 있다면 왜 블랑쉬가 (2)의 장면을 보고도 마법을 회수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한 번 방출한 마법을 회수하기 어렵기 때문, 이라고 답할 것이다.
실제로 이 광경을 바로 옆에서 본 제머나이도 에버그린도 그 점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코하브는 알고 있다.
그때 펼쳐진 마법은 힘이 조절된 일격이며 에렐림 공작의 마법적 능력은 통념을 능가한다.
만약 블랑쉬가 원했다면 언제든지 폭격을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만 마법이 상쇄된 이후, 새파랗게 달아오르는 투명한 눈빛으로 광장 한가운데 서로를 부둥켜안는 남자 마녀와 메리골드 남작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을뿐.
블랑쉬는 왜 공격을 멈추지 않았을까?
왜 그런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본느.”
상념에 잠기던 코하브는 블랑쉬가 책에서 눈을 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블랑쉬는 책을 덮고 손끝으로 코하브의 매끈한 허리를 쓸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다.
묻고 싶은 것도 있다
그레;이 의문;'질문은 기본적으로 그녀가 불순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내포한 것이다.
조금 생각을 정리한 코하브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저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느릿한 손동작으로 가운을 풀어낸 블랑쉬의 나신이 부드럽게 코하브 백작의 몸 위로 포개어졌다.뱀처럼 코하브를 휘감은 에렐림 공작은 그녀의 귓불을 애무하며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왜, 그때…. 마법을 회수하지 않으셨나요…?”
잠잠해져가던 잿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치솟는 욕정.그 욕정 속에서 코하브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때?”
“메리골드 남작에게 심판을 내리시던 때…. 시간이 있었습니다. 마법을 회수할 시간이요. 물론, 블랑쉬 님의 저의를 의심하려는 것은 아니고… 아….”
“그랬던가요?”
아직 젖어있는 비부를 깊숙하게 휘젓는 긴 손가락에 코하브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손끝에 매달린 담뱃불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휘청였다.
“너무 집중했던 탓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네요. 마법을 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겠죠…?”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왜 미리 말하지 않았나요?”
다른 사람에게는 들려주지 않는 탁하고도 끈적한 목소리가 귓가를 채우자.코하브 백작은 자신의 의문을 잠시 덮어두었다.
“그건….”
어쩌면 단순히 실수 혹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에렐림 공작은 분명 위대한 경지에 올랐지만, 그것이 실수 없는 완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더군다나 누구보다 마녀를 위해 쇄신하던 그녀가 마녀에게 피해가 되는 일을 할 리 없지 않은가?
“이본느, 절 의심했군요.”
“의심… 이 아니…라…/’
코하브 백작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끊기는 것은 그만큼 능숙하게 약점을 공략당했기 때문이다.이미 수십 년이나 육체적 관계를 맺어오며 코하브는 단 한 번도 공작에게 이겨본 적이 없었다.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부들부들 떠는 코하브 백작.
자신의 의심이 공연한 짓이었다고, 그걸 입에 담은 것은 더욱 공연한 짓이었다는 후회도 열락의 파도에 속절없이 쓸려나간다.
그렇게 신음을 삼키는 이본느의 등 뒤로, 투명한 에렐림 공작의 눈동자가 맴돌았다.